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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내 것이라 (사 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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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것이라 (사 43:1-7)

      <사랑의 세 요소>

      사랑은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그리고 이 둘 사이를 사랑으로 연결시켜주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 앞에 꼼짝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맥을 못 추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입니다. 물론 거꾸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는 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이라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를 사랑으로 묶어주는 사랑은 항상 상호 교류성(reciprocity)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을 주거니 받거니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짝사랑과 같이 일방적인 사랑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고, 사랑받는 자는 사랑을 돌려주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그냥 사랑을 받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일방적인 짝사랑의 경우 참된 사랑이 일어난다고 볼 수 없겠지요.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의 반응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아 부을 뿐, 사랑받는 자의 사랑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참된 사랑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그리고 이 둘 사이를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이 있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사랑받는 것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둘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사랑으로 상호 작용을 할 때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로,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로 위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들에게 주신 약속: “그대 고향에 돌아가리”>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잡혀와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나라와 고향을 잃었습니다. 민족의 자부심인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원수 나라에 잡혀와 미래를 기약할 수 없습니다.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도무지 희망이 없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아픔과 좌절감이 있습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가 각축을 벌이는 국제 정세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강한, 힘센 나라들이 있는 떡 버티고 있는 한, 약하기 짝이 없는, 포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실의와 비탄에 잠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오랜 포로 생활이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이스라엘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의 약속이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회복 약속의 근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를 엮어주는 사랑은 일시적이고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운 사랑이 아닙니다. 우주만물을 창조주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무제약적인 사랑입니다.

      ① 1a(첫 절)-7절(마지막 절):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하나님

      본문은 문학적인 구조가 아주 특별합니다. 처음 1절 전반부와 마지막 7절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먼저 1절 전반부를 보세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야곱,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분 하나님은 사랑받는 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맨 마지막 7절을 보세요.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니라.” 여기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으신 창조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은 버리고 우상잡신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보다는 자기의 영광을 먼저 구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 제국의 손에 부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② “두려워하지 말라”로 시작되는 두 단락: 1b-3절, 5-6절

      이렇게 처음과 끝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으신 창조주라는 사실을 강조한 뒤, 그 사이에 들어가 있는 다섯 구절은 내용상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 후반부에서부터 3절까지가 한 단락이 되고, 5-6절까지가 다른 한 단락이 됩니다. 그런데 이 두 단락은 모두 “두려워하지 말라”는 확신으로 시작합니다.

      먼저 1절 후반부를 보세요.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스라엘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제일성(第一聲)은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벨론에서 참혹한 포로 생활을 하면서 아무 소망이 없다고 할지라도 두려워말라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죽음 밖에 없습니다. 모든 꿈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깊은 터널 속에 들어가 언제 출구가 나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도 두려워말라는 것입니다!

      왜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지요.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이지요. 구속 혹은 속량이라는 말은 인질로 잡혀 있는 사람을 몸값을 지불하고 풀어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43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할 때 하나님께서 속량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지으셨고 속량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많은 백성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수많은 백성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지목하여 선택하셨습니다. 계약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아,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요! 오늘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모든 희망이 끝나고 한숨과 좌절과 상처만 남았어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는 말은 주님께서 다 책임져주신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이 지으셨고 속량하셨고 지명하여 세우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벧전 2: 9절의 말씀처럼 이제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우리는 오늘 아무리 상처가 깊고 모든 꿈이 산산조각 나서 죽을 지경에까지 몰렸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모든 희망을 접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에 2절을 보세요.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기 보세요. 혹독한 시련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나옵니다. 물, 강, 불, 불꽃, 다 무시무시한 시련을 상징하는 이미지들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셨고 속량하셨고 지명하여 불러 세워주셔서 하나님의 소유된 이스라엘은 어떤 혹독한 시련을 만나도 건져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실제로 지난 과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시무시한 홍해 바다를 건널 때 건져주셨습니다(출 14-15장). 이스라엘이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침몰치 못하도록 막아 주셨습니다. 불과 불꽃은 전쟁의 참화를 생각나게 합니다. 갑자기 쳐들어 온 바벨론 군대가 온 이스라엘을 무자비하게 누비고 다녔습니다. 모든 집과 재산들이 불에 탔습니다. 성벽이 불타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 폭삭 무너졌습니다(왕하 25: 8-17). 곳곳에 화염과 연기가 치솟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불 속 한가운데를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게 하시고, 불꽃이 혓바닥을 날름거려도 결코 태우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이 있든 불이 있든, 강이 있든 불꽃이 있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3절을 보세요.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애굽과 구스, 즉 에티오피아와 스바, 즉 아라비아는 이스라엘의 해방과 자유를 방해하는 주변 열강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나라들이 아무리 군사력이 강하고 힘이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이스라엘의 해방과 자유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왜요? 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1절 후반부와 3절까지가 한 단락이고, 그 다음 단락은 5-6절입니다. 5-6절을 보시겠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여기에서도 “두려워 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지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시마다 때마다 도와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하나님은 동서남북 사방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모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땅 끝에 있다할지라도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③ 조개 한 가운데 숨어있는 진주: 4절

      자, 이렇게 처음 1절 전반부와 마지막 7절이 이스라엘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하고, 그 가운데 끼어 있는 두 단락, 즉 1절 하반부부터 3절까지와 5-6절은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두려워말라는 권고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본문 1-7절 정 중앙에 끼어 있는 말씀이 참 보배로운 말씀입니다. 4절 말씀이지요.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여러분, 이 말씀이야말로 조개 한 가운데 진주를 감추듯이 본문 한 가운데 숨어있는 진주라 할 것입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아, 이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요. 창조주와 심판자, 즉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이 창조 때로부터 우주 마지막 날까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배롭게 존귀하게 여겨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이 있듯이 하나님이 지으신 이스라엘이야말로 그런 존재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는 상황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희망이 없습니다. 수 만 가지의 희망이 물거품이 되어 자기 나라를 멸망시킨 원수 나라에 포로로 잡혀와 있습니다. 도무지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 사랑 운운할 여유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신들에게 완전히 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에 대해서는 수만 가지의 회의만 밀려 올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자유와 해방을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재가 변하여 영광의 화관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상처 속에서 새로운 치유를 여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소망이 끊어진 가운데 새로운 소망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과 같이 극한 시련과 무수한 좌절과 상처,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대해서 수천 가지의 회의,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갖지 못한 분들이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시간과 공간만 다를 뿐 오늘 우리 역시 바벨론 포로와 같이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삼키려는 강물과 불꽃이 혀를 날름거릴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인간의 모든 기대와 소망이 끊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고 속량하셨고 지명하여 부르셔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배롭게 존귀하게 여겨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아의식을 바꾸자>

      노벨상을 제정하게 된 알프렛 노벨(Alfred Nobel, 1833-1896)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1888년에 알프렛의 동생이 사망했는데 신문사가 착각을 해서 알프렛 노벨이 죽었다고 부고 기사를 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알프렛이 신문을 읽다가 자기가 죽었다는 사망 기사를 읽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죽음의 상인, 다이너마이트 왕(The Dynamite King) 알프렛 노벨 사망하다.” 물론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사람은 노벨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자기가 만든 다이너마이트가 인류 평화를 위해 좋게 쓰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누구도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노벨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사람들은 다이너마이트로 무기를 만들어 대량 살상을 자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부고 기사는 노벨이 큰 무기 공장을 만들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람으로서 기록했습니다. 노벨은 큰 충격을 받고서는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자기의 전 재산은 인류 평화에 공헌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하여 상금으로 주라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지요.

      잘못된 사망 기사 하나가 노벨 개인의 인생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미래를 바꾸었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이렇게 큰 문제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자의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시간과 공간만 다를 뿐 바벨론 포로시기를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문제와 시련을 겪으며 삽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우리를 삼켜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할 때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패배자요, 사랑받지 못할 자요, 버림받은 자라는, 부정적인 자기 인식이 지배할 때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모든 장밋빛 희망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섭리나 사랑에 대해서 물밀 듯 회의가 밀려올 때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는 ‘나’(I)라고 하는 1인칭 단수 주격이 12번 이상이나 나온다고 합니다. 또한 ‘너’(YOU)라고 하는 2인칭 단수 주격 역시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중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대신에 여러분 자신의 이름을 대입시켜 읽으면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우리 1-4절까지만 야곱과 이스라엘 대신에 우리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읽겠습니다.

      “○○야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야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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