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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습니다 (행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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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습니다.

중국에 '소림광기'라는 유머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어떤 분이 마침 침대 하나를 새로 샀답니다. 집안에 들여놓고 보니 너무 아름다운 침대입니다. 그래서 자랑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자랑할까 궁리를 했습니다. 한참 궁리를 하다가 '내가 꾀병을 앓아 누워 있으면 사람들이 병 문안을 와서 침대를 보겠지.' 하고는 꾀병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이 나자 이웃 사람들이 병 문안을 왔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병 문안을 오게 됐는데, 그분은 그분 나름대로의 애로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속바지를 하나 샀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자랑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병 문안을 와서 방에 들어가자마자 한 발을 침대 위에 탁 올려 걸치고는 바깥에 있는 옷자락을 펼치면서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아니, 어디가 아프셔서 그렇게 거동을 못하고 누워 계십니까?' 그랬더니 침대 구경을 시키려고 꾀병을 앓던 사람이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가 앓고 있는 병이나 댁이 앓고 있는 병이나 똑 같은 병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심리가 있습니다. 자랑하고 싶어하는 심리입니다. 이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가운데서 특별히 사람들이 자랑을 잘 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인물 잘 난 것, 또 하나는 자기 혈통, 그리고 자기 지위, 마지막 하나는 남보다 의롭게 산다, 선하게 산다, 양심적이다. 라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안 되니까 거짓을 꾸며서라도 자신을 포장하려는 위선의 삶이 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학력 위조 때문에 수 십년을 쌓은 명성이 하루아침에 돌이킬 수 없는 자리까지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또 정치인들이 대권을 향해 뛰지만 정직하지 못한 도덕성 문제가 불거질 때 한 순간에 정치 생명 마져 위협받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힘들지만, 그러나 적당히 세상에 편승하다 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자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유감스런 사건입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 교회에 왜 이런 일이 있었느냐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교회, 문제 많은 교회, 세속화된 교회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초대 교회는 성령 충만하고 유무상통하고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런 엄청난 비극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하루에도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엄청난 은혜가 있는 교회로 성장을 합니다. 뭐, 순식간에 교회는 만 명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 명 이상 되는 성도들이 한 공동체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자기의 물건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줍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 32절은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모두가 남을 위해 자기의 재산을 내어놓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주에도 보았지만, '바나바'였습니다. 그의 헌신은 초대 교회의 새로운 희망이 되었습니다. 이 부흥의 물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동참하기 원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땅을 팔아 절반은 떼어놓고 나머지 절반을 바쳤습니다. 이것은 요즘처럼 소유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강한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단한 일입니다. 돈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때문에 죽기도 하고 살기도합니다. 살인도 합니다. 돈이란 인격체와 같은 힘이 있어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도 하고, 소망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힘과 권력을 때로는 절망을 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습니다. 물질의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영적인 길들도 열어주시지 않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물질 앞에서 머뭇거리니까 가정이 영적인 문제 앞에 늘 묶여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그 반을 내 놓은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떤 부부입니까? 그들은 부유할 뿐 아니라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체면이나 형식으로라도 자기 집이나 땅을 팔아서 헌금할 정도면 믿음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위해 자신의 땅이나 집을 팔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 교회 건물을 짓는다고 집 팔 사람이 있을까요? 헌금하자고 그러면 자기 땅을 내놓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한 번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얼마는 감추었지만 사도들 발 앞에 내 놓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그렇게 쉽게보면 안됩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헌신을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실수를 합니다. 열심도 있고, 헌신도 하고, 희생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관심이 더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고 신앙생활을 합니까? 아니면 사람을 보고 신앙 생활을 합니까? 우리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왜 상처를 받습니까?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 때문에 시험 드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을 때 이런 고백을 합니다. 창세기39:9절에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면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거룩함이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은커녕 바치고 급살을 맞습니다.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라 부부가 다 죽었어요. 아예 안 바치는 사람도 있는데, 절반이나 바친 이들이 왜 죽어야만 했을까요? 설령 이들이 죄를 지었다 해도 부부를 다 죽이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지은 죄가 뭐가 그리 심각하다고 부부를 세시간 차이로, 그것도 교회 앞에서 그들을 죽여야 한단 말입니까? 사실,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아마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다루신다면 여기 제 정신으로 앉아 있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저를 포함해서 우리 교회 안에도 예배도 채 마치기 전에 송장이 되어나갈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생각해 보세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그 사랑을 가지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다른 문제도 아닌 부흥하는 교회, 그것도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께 바치려는 아주 좋은 동기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분적으로 속였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이 목숨까지 빼앗을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이 과연 사랑을 외치는 하나님이 그렇게 무섭도록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사랑의 주님이 이처럼 두 사람을 죽일 만큼 엄하게 다루신 그 교훈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들 부부가 왜 땅을 팔아서 헌금을 하려고 했는지, 구체적인 동기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만, 문맥상 그 동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아나니아~'이런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원문에 보면 'But(그러나)'이라는 단어가 끼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보셨지요 4:36-37절에 어떤 사건이 나옵니까? 바나바라고 불리는 요셉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재산을 팔아 가지고 몽땅 다 드리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예루살렘 교회 본 출신이 아닙니다. 저 촌구석인 구브로 출신이었어요. 오늘날로 말하면 새 신자가 와서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하나님 앞에 드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어요. 그러니까 만 명이나 되는 교인들의 시선이 이 바나바에게 다 모인 겁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창립 멤버가 아니었는가 라고 말합니다. 그 교회의 기둥을 이루는 지도자였습니다. 교인이 만 명이 넘었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면 그 교회에서 유명하고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가족이 하나 와서는 재산을 다 팔아서 몽땅 바쳤던 겁니다. 온 교인의 시선이 "와! 저 사람이 누구야? 바나바 아니냐!"하고 몰렸어요. 그러자 이들의 마음 속에 질투가 생겼어요. "그래도 내가 이 교회의 기둥인데!" 이들이 헌금한 동기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드린 것이 아니고, 정말 가난한 형제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드린 것이 아니고, 바로 이 질투와 자기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이 동기였다고 문맥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들이 헌금한 동기였습니다. 체면 때문에 한 것입니다. 정말 드리고 싶어서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 때문에, 그래도 내가 저 새가족보다 나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드렸던 겁니다.

결국 아까운 마음이 많았습니다. 사람을 의식해서 할 수 없이 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궁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적게 드리고 극대의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결과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반만 바치기로 한 것이었어요. 말과 행동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전교인들은 그들이 재산을 다 드린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반을 감추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심각하게 보신 이들의 죄였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2절에 보면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그들의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감추다(νοσφιζω): 착복하다 라는 의미로 디도서 2:10절에서의 떼어먹지 말고 라는 말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죄는 단지 하나님 것을 도적질한 부정직성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또한 거짓말로 속이려 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하나님께 약속드린 바를 온전히 행하지도 않고 온전히 행한 것처럼 거짓말하여 칭찬과 존경과 명성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재산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과 명성 또한 훔치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그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부부가 따로 따로 베드로 앞에 서면서도 꼭 같이 말할 만큼 사전에 의논하여 입을 잘 맞추었듯이 계획된 범죄행위였습니다. 그들은 그 거짓말로 베드로를 속이려 했지만 사실은 본문 3절에서 베드로가 말하듯이 "성령을 속인 것"이었고, 4절에서 말하듯이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는 과연 하나님의 것을 훔치며 하나님을 속이고 능멸하는 일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거짓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십니다.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5편 6절 7절 보면 하나님은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고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44절 이하에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 거짓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말하는 자는 사탄의 자손이요, 사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마치 자기 무기인 양 자기의 전공인 양 사용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거짓말하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가 없습니다.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가 거짓말을 예사로 합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 받을 수 있을까요?

유머이긴 합니다만, 이 시대가 얼마나 거짓이 횡행하는 세태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미국의 한 대학이 20명의 몸에 소형 녹음기를 부착해, 이들이 하루 종일 쏟아 낸 말의 진위를 일일이 추적하여 조사한 결과, '사람은 8분에 한 번씩 거짓말을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같은 통계에 의하면 사람은 하루 동안 2백번 가까이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됩니다. 실로 사람은 밥먹듯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는 거짓이 난무하고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성전에서 거룩하게 예배하고 제사 지낼 때는 굉장히 정직하고 거룩한 백성인 것처럼 보였지만 성전 밖으로 나오면 지능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시고 당신의 핏값으로 세우신 교회가 이 땅위에 거룩한 교회가 되시기를 원했습니다.

보세요. 초대교회는 성령 강림으로 태어난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공동체가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성장 발전을 하고 있던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이 계획을 세우고 땀흘려 노력해서 발전하던 공동체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성령이 주도하시고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성령 공동체였습니다. 초대교회는 그 동안 사람들이 들어보지도 못했고, 경험해 보지도 못했던 전혀 다른 형태의 공동체였습니다. 바리새인의 공동체와도 달랐고, 제사장을 중심한 성전 공동체와도 달랐고, 열심당의 공동체와도 달랐습니다. 다른 모든 인간 공동체와 구별되는 공동체였습니다.

이 공동체의 특징은 거룩성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성을 해치는 중대한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보다는 인간의 의도, 인간의 욕심을 채우려는 불신앙적 사건이요, 불순종의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헌금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헌금하던 현장에서 치신 것입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교회가 거룩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인간 공동체처럼 죄로 물들고 인간의 욕망으로 범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도 중요하겠으나 하나님께는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교회의 거룩성을 지켜야만 모든 교인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아나니아란 이름은 '여호와의 은혜'라는 뜻이고, 삽비라란 이름은 '사파이어'라는 보석에서 온 것으로 '아름다움'이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들 역시 주님의 사랑 앞에 자신들이 은혜 받은 인생이었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비전을 가진 가정을 꿈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이 가정은 그 은혜를 그 아름다움을 지키지 못한 채 비극으로 끝나는 슬픔을 맞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최대의 비극 중의 하나는 서로가 서로를 충고할 수 있는 관계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두 사람 중에서 만약 한 사람이라도 정직할 수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 임금이 자기 나라에 내노라는 공처가들을 한 자리에 다 모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아내가 시키는 대로하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들은 이쪽으로 서시오'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가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그 자리에 남았습니다. 왕이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거기 서 있소. 당신은 아내가 시키는 대로하지 않은 적이 있었단 말이오'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사람들이 많은 곳에는 가지 말라고 해서 여기 혼자 있습니다'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의 제의를 따르면 안됩니다. 기도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거절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도 무작정 따르면 안됩니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가서는 안됩니다.

이 본문의 사건을 보면 재미있어요. 1절에 어떻게 시작됩니까?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았습니다. 2절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아마 주도적으로 남편이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감춘 사실을 누가 알았습니까? 그 아내도 알았어요. 이때 아내가 "여보 우리 하나님 앞에 정직합시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잖아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요. 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악한 일에 마음을 합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사람이 다 망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만일 아나니아가 이런 나쁜 꾀를 내서 아내인 삽비라에게 의논했을 때 삽비라가 말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막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둘 다 살았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이 판 땅에 대한 애착심이 또 다른 탐욕을 불러왔습니다. 탐욕이 어리석은 인생이 되게 하는 이유는 탐욕이 있을 때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자신을 한번 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누구 때문에 신앙생활을 합니까? 누구 때문에 구제사업과 기도, 봉사를 하십니까? 혹시라도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우선순위에 있습니까? 내 체면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 사람의 칭송을 받으면서 은밀한 죄악을 마음에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 교회에 헌신하면서, 속으로 썩어 문드러져 가는 것은 아닙니까? 겉으로 많은 헌금을 하면서, 그러나 얼마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왜 우리가 정직해야하는 줄 아십니까?

첫째,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자는 주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정직한 자를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시84:11에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셋째는 우리가 진실해야 세상을 구원하고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 생명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증인들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해야 될 우리가 투명하지 못하고 정직을 의심받는다고 합시다. 만약에 그렇게 되었을 때에 우리의 전하는 말을 누가 듣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통해 구원받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투명하지 못한데 어떻게 세상 사람이 주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어느 분의 말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진실을 말하십니까? 항상 그렇게 하십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 내일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오늘의 물결이 내일의 파도를 이루고 명년의 홍수를 이룹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 예수님처럼 되십시오. 예수님처럼 진실을 말하고 오직 진실만을 말하십시오." 우리가 모두 이 말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새 사람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하여 바울은 에베소 4장 25절에서 이렇게 교훈합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으로 더불어 참말을 하라."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하기 어렵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던 기도가 바로 우리 기도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51편 1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어야 합니다. 성령의 깨끗하심을 가지고 내 마음을 씻어내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아무도 죄인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회개를 거절하고 거짓을 일상적인 삶처럼 지속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삶 속에 있는 악과 거짓을 주 앞에 들고 나와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지금 거룩성을 회복한 예루살렘 교회는 이 사건으로 인해 더 큰 부흥을 체험했듯이,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위선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끊어, 우리 영혼에 구원이 다가오고 나아가 우리 사회,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위대한 교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기도하십시다.

"오 하나님, 죄악을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서움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회개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문에서 보게 됩니다. 주여, 우리를 더욱 주님 앞에 정직하게 세워 주소서. 주여 이 시간,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이 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주님의 용서와 긍휼을 기대하며,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고 새로운 내일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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