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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 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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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성경본문 : 마태복음 9:9-13

사람은 누구나 오해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고소도 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예수님처럼 많은 오해를 받으신 분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나 죄인들과 대화하시는 것을 보고서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자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아우들조차 형님인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 5절에 보면, 그 형제들조차 예수님을 믿지 아니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그는 메시야가 사람들의 오해를 받을 것에 대하여 이같이 예언했습니다. “3)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

오늘날도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오해는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복음서를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으면서도 마치 자기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아는 것처럼 비판을 늘어놓습니다. 어떤 기회에 갖게 된 그릇된 선입견에 사로잡혀 평생 기독교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기피할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 살펴볼 ‘마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진지하게 말해 줍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영혼에 병든 우리 인생들을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던 마태가 그 자신과 관련이 있는 한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는 갈릴리의 가버나움 세관에서 일하던 세리였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있던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번창한 상업 도시였는데, 마태는 그곳 세관의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유대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직업이었습니다. 그것은 세리들은 로마 제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정한 방법으로 동족을 착취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세리를 율법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곧 죄인들과 같은 부류로 여겨서 경멸했습니다. 세리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회당에 들어가는 것을 금했으며, 증인으로 설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파격적이고도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을 때, 그는 곧 일어나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세관에 사표를 냈습니다. 그런 다음,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인생의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을 기뻐하여 자기 집에서 잔치를 열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 그리고 동료 세리들과 평소에 거래하던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세리 마태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란 유대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당하던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 10절에는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라고 했습니다.

그 날 저녁에, 많은 사람이 마태의 집에 와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곳에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계신 것을 보고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경건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었으므로 세리나 죄인들과는 사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한 장소에 같이 서 있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으셔서 세리가 제공하는 음식을 잡수셨으니 바리새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방 할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의 비난에 대하여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의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의인이 아닌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했습니다. 그들은 의사로 치자면 병든 자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건강한 사람들만 상대하려는 의사와 같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병자를 외면하는 의사라면 아무리 실력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의사는 병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가까이 할 때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건강한 자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혼의 의사이신 구세주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바리새인은 세리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다 듣도록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자랑하다니, 얼마나 가소로운 일입니까? 그러나 오늘날도 이 바리새인과 같이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하기 때문에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병에 걸린 사람이 자기는 건강하기 때문에 의사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 성전에 올라간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리와 죄인들 가운데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중병에 걸린 병자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으므로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실력을 가진 의사가 있더라도 그가 환자에게 관심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명의가 있더라도 치료비를 댈 수 없는 환자는 그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의사가 자선사업가가 아니므로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특이한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치료비를 받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육신의 질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영혼에 병든 자들도 고쳐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겸손히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는 자들을 찾아오셔서 죄 사함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지만, 예수님은 진심으로 반기시고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한번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드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못마땅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4)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

이 비유를 살펴보면, 예수님이 세리나 죄인들을 배척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용납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을 회개시켜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목자가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으러 간 것처럼, 주님께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고 찾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두 번째로, 구원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열기로 하고 많은 사람에게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잔치 날이 되자 주인은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서 시간에 맞추어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냈습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그러자 초청 받은 사람들이 하나 같이 사양했습니다.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밭을 샀으므로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말하기를 “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기를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종에게 이르기를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눅 14:).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종은 복음전도자들을 말합니다. 이 잔치에 참석하는 것은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초대장을 받은 자들은 의롭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 저는 자들, 그리고 강권하여 데려온 자들은 세리들과 죄인들,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전자에 속하는 자들의 대표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정식으로 초대 받았으나 정작 정한 날이 되자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에 도취되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반면에, 후자에 속하는 자들 곧 세리들과 죄인들과 이방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의로움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그들 스스로가 잘 알았으므로 그들은 잔치에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거만을 떨면서 거절할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거절은커녕 나 같은 자를 그 귀한 잔치자리에 초대하다니, 감격해서 달려왔습니다.

구원과 관련해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구원은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0장 9절로 10절에 이르기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원 받는 방법이 너무나 단순하고 쉬워 보이십니까? 맞습니다. 구원의 도리는 결코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는 방법이 쉽다고 해서 구원이 무가치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구원이 너무나 귀하고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장 쉬운 방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자기 행위로 구원 받을 사람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에 의하지 않고 믿음의 방법으로 구원 받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자랑합니다.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고,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고, 자기의 잘난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의롭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보다 그 자신이 더 잘 압니다. 그런데도 교만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위선적인 행위를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의로운 사람으로 꾸밉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거리에서 구제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는 사람들 앞에서 구제에 힘쓰는 선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도할 때도 저들은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이 역시 사람들에게서 기도에 힘쓰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면서 금식하는 표를 내기 위해 슬픈 기색을 내고 머리를 빗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위선을 미워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먼저 위선을 버려야 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위선이나 가식이 필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나와야 합니다. 병자는 의사에게 숨김없이 자기의 병력과 증상을 말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실상을 솔직하게 고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로 10절에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결국, “나는 죄가 없다”는 말은 그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뿐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주님께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는 세리인 자기가 감히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자격이 있을까 의구심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이는 마태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는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셨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분이 있거든 이 시간 주님의 부르심에 “예” 라고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1장 29절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지금 응답하십시오. 그리할 때 영원히 후회 없는 위대한 선택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는 동족의 손가락질을 받던 세리의 신분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제자가 되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예수님, 저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만 제자가 될 마음은 없습니다”라고 사양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가 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제자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신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공생애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가르침을 받고 그 행하시는 이적들을 직접 보고 체험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몇 년 배우는 것보다, 예수님에게서 직접 하루를 배울 수 있다면 그 편을 택하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단 한번 만나 뵙고 나자 180도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무려 삼년 반이나 예수님과 동거 동락하였으니 그 받은 은혜가 얼마나 컸을까요?

그러나 주님의 제자는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우선, 그는 직업을 버렸고, 사랑하는 가족의 곁을 떠났습니다. 세리로서 출세하려던 꿈도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얻을 것이 버린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영광스럽고 위대한 것임을 알았기에 그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우리가 단지 구원 받은 단계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제자가 누구입니까? 스승을 본받아 살아가는 사람, 스승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성도들은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고 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은 곧 열매 맺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 주님의 제자라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아서 온유하고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성품까지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루아침에 예수님을 닮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삼고 끊임없이 힘써 나갈 때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씩 향상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제자는 스승의 일을 계승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에 앞서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분부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도들처럼 가정도 버리고, 생업도 버리고, 전적으로 복음 전파만을 위해 살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복음은 가까운 데서 시작해서 먼 곳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가족,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직장 동료, 이웃 사람들을 일차적인 전도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시집온 외국인들을 전도 대상으로 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뿐 아니라, 선교사들을 후원함으로써 해외 선교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마태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멸시받던 세리였으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병든 자였으나 예수님을 만나 영혼의 병을 고침 받았고, 죄인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열 두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세리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였던 사실이 그에게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를 더욱 겸손하게 만들어서 그를 불러 제자 삼아주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가 수록된 마태복음을 저술했는데, 그의 복음서를 통해서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마태에게 큰 사랑의 빚을 진 셈입니다.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비방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세리의 집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잡수셨던 긍휼히 풍성하신 주님이십니다.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친히 부르셔서 죄 사함과 구원을 주셨고,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사실인즉, 우리가 세리에 비해서 더 나은 점이 있을까요? 세리나 우리나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똑같이 멸망 받을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세리 마태가 느꼈던 떨림과 감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을 섬길 뿐 아니라, 생활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는데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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