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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평화를 이루는 법 (수 2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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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평화를 이루는 법 (수 22:1-12)

(1)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2)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일에 내 말을 너희가 청종하여 (3) 오늘날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4) 이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편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5)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6)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 (7) 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모세가 바산에서 기업을 주었고 기타 반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요단 이편 서편에서 그 형제 중에서 기업을 준지라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 장막으로 돌려 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8) 일러 가로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 금, 동, 철과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 형제와 나눌지니라 하매 (9)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신 대로 얻은 땅 곧 그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 (10)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 (11)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편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편에 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12)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제가 좋아 하는 말씀 중에 사도행전 13장 36절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시대 동안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었고, 이 뜻을 따라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다윗 시대의 사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통일왕국을 이루고 그 기초를 닦는 일이었습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 뜻을 잘 분변하는 것이 예언자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의 사명이었습니다. 어느 때는 심판을 외쳐야 될 때도 있고(아모스), 어느 때는 회복을 외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에스겔, 제2이사야). 어느 때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외쳐야 할 때도 있고(이사야) 어느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외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호세아).

우리나라에도 시기와 그의 맞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일제 시대의 과제는 해방이었습니다. 40, 50년대는 일제 청산과 분단의 극복이었습니다. 6,70년대는 산업화와 근대화였습니다. 7,80년대는 민주화와 인권이었습니다. 성공한 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일제시대는 민족의 고통에 동참하는 시기였습니다. 산업화시대는 교회의 부흥기였습니다. 80,90년대는 교회의 질적 성장의 시기로 제자화와 문화화 시기였습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시대적 과제는 무엇일까? 저는 단연코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정권기에 대표적으로 드러났던 우리 한국사회의 모습은 진보와 보수로 대변되는 이념갈등이었습니다. 여기에 인터넷과 첨단화되어가는 물질문명에 기초한 세대 갈등이 더하여 졌습니다. 노사간에도 여전히 불신과 투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쟁의가 극단적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세계적으로는 테러와의 전쟁으로 인한 이슬람 문명권과 미국을 중심한 기독교 문명권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동북아는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날로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동북아는 각 나라가 군사대국화를 추진하여 아주 위험한 지역이 되고 있습니다.

평화는 한국 사회가 다종교사회이기 때문에 특히 더 중요합니다. 기독교, 천주교, 블교가 주류 종교이고 여기에 무신론자와 미신 숭배자도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이번 아프가니스탄에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억류된 일로 인하여 수면 아래 있던 반기독교 정서가 노골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표출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한국교회 내부의 자성의 목소리는 대부분은 겸손한 선교와 한국교회의 도덕적 영향력의 회복이었습니다.

한국사회는 또한 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지금 6자 회담과 남북정상 회담이 예정 중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된다면 북한과 미국 간의 북미수교 가능성까지 있습니다. 아주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더라도 북한이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않던 통일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일의 시간표는 계속 진행되고 앞당겨지고 있는데 문제는 한국사회나 한국교회가 이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준비하지 않고 맞는 통일처럼 재앙이 없습니다. 통일비용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더 큰 문제는 서로 이념이 다른 곳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한 체제 안에서 살게 될 때의 갈등입니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북에서 넘어온 새터민들이 1만 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잘 정착하고 있는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한 인들이 가지고 있는 우월의식도 문제이고, 여전히 이념적 시각과 편견이 살아 있기에 하나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이유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롭게 사는 법과 평화를 만들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전에는 평화하면 어떤 평화냐, 즉 폭력과 거짓을 위장하고 있는 평화냐 아니면 힘으로 억누르는 평화냐 하며 평화의 성격을 따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어떤 평화든 평화 자체가 선이 되는 시대입니다. 과거가 어떠했든지 드러내서 갈등을 일으키기보다는 덮고서 평화를 향해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과거를 들추어서 드러내는 정의보다 덮고서 용서하고 화해하는 평화의 가치가 더 크고 소중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간간의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개인과 개인의 문제에 있어서는 사회에서 요구되는 수준보다도 더욱 더 평화가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참고 믿어주고 덮어주는 것이 유일한 선택입니다. 드러내고 폭로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을 폭로하고 드러내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허물을 대신 지시고 우리 죄를 덮어주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는 바로 주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서로가 평화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말씀 순종이 주는 평화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가나안 땅 정복 사업은 약 7년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이 7년 동안 요단 강 동편에서 기업을 이미 받았던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절반 지파는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도 앞장서 건넜고, 큰 전투에서도 앞장섰으며,  모든 지파들이 기업을 얻기까지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호수아도 인정하였습니다. 3절입니다. “오늘날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하니님 여호와의 명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이제 모든 지파에게 안식이 주어졌기에 이제 이들 지파들의 의무는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 세 지파에게 탈취한 수많은 재물을 주며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허락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한 가지만 명령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5절입니다.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이 말씀은 이미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때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입니다. 1장 7절과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는 자신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하면서 이 말씀이 사실임을 체험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였고,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형통하게 만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세 지파에게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교훈하는 데 다른 길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특히 여호수아가 말씀 순종과 더불어 그의 인생에서 깨달았던 것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 “그에게 친근히 하는 것”의 은혜였습니다. 단순히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즐거워할 때는 더 이상 그때부터는 율법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말씀이 즐겁게 되기를 바랍니다.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2장의 말씀 전체는 서로 말씀에 순종하려는 노력에서 빚어지고 있는 사건입니다. 오히려 말씀에 대한 과잉 순종이 문제가 되었다 할 것입니다. 평화는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마음의 평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든든히 지키시고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 때문에 그 인생에 평화가 있습니다. 강한 나라의 백성들은 든든하듯이 강한 자가 우리를 지키시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말씀을 순종할 때 또한 우리는 인생을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을 위축되게 만드는 것은 죄입니다. 죄가 인간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진리 안에 거하는 자이고 진리에 거하는 자는 모든 일이 당당합니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야 평화가 주어집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순종이라고 하여 이 순종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래서는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갈등만 빚어 질뿐입니다. 심한 경우는 정의라는 명목으로 전쟁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이는 말씀 순종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말씀 순종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적용하여야 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자는 자신에 대해서는 고지식할 정도로 철저하지만 다른 사람을 향하여는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갖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는 십자가가 항상 앞서야 합니다. 십자가는 타인을 위한 자기 희생과 자기 부인입니다. 상대방에게는 배려의 마음을 갖지만 자신을 향하여는 철저함을 요구하는 것 이것이 제대로 된 말씀 순종입니다. 이러할 때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2)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

22장의 사건은 이 세지파가 돌아가면서 요단강 언덕에 큰 제단을 세우는 데서 발생합니다. 10절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 아마 처음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넜던 길갈 근처였을 것 같습니다. 그 위치는 요단강 서편 이스라엘 지파들이 기업으로 받은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제단을 세웠다는 소리를 듣고 온 이스라엘이 분노하여 실로에 모여 이들과 싸우려합니다. 가나안 땅에는 오로지 여호와의 법궤가 있는 곳만이 하나님의 제단입니다. 그런데 다른 제단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중죄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왕국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났던 결정적 원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태동된 지방 산당들이었습니다. 북왕국을 세웠던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베델 근처에 단을 세웠고 이 ‘여로보암의 죄’ 때문에 북왕국이 멸망합니다.

이들은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위원장으로 하여 열 지파의 대표들을 모아 진상조사단을 꾸려 요단 건너편 지파들에게 보냅니다. 비느하스를 비롯한 대표들은 요단 건너편 길르앗에 이르러 그 곳 세 지파를 보자마자 잘못을 추궁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7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첫째는 요단 가에 제단을 세운 것은 광야에서 바알브올을 섬겼던 죄와 같은 우상숭배의 죄임을 고발합니다. 브올의 죄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머물 때 모압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다 이스라엘  백성 24,000명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염병으로 죽게 되었던 사건을 말합니다(민 25:1-9).  바로  그 사건 당시에 진상조사단의 대표격인 비느하스가 활약을 했습니다. 비느하스는 그때 이스라엘 진중까지 우상숭배자하는 미디안 여인을 데려온 자와 그 여인을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로 함께 죽였습니다. 그러자 곧 하나님의 염병 재앙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이 질투라는 단어가 ‘젤롯’인데 이는 ‘열심’으로 바꿀 수 있고 예수님 시대에는 이 비느하스의 모범을 따르는 열심당원들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비느하스는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가지고 그들을 설득합니다.

두 번째는 아간의 죄를 언급합니다. 아간의 죄 때문에 아간의 온 가족이 몰살을 당하였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아이 성에서 패배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진상조사단은 이 죄가 단지 너희들만의 죄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죄이며 이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심판을 당할 것이라 말합니다. 18절입니다. “너희가 오늘날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 이스라엘은 공동체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민족은 한 공동체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하면 모든 사람이 고통을 겪습니다. 마치 한 배를 탄 사람들과 같다 할 것입니다. 내 자리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 하여 배 밑바닥에 구멍을 내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 진상조사단의 모습은 성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정을 듣기 전에 모여서 요단 건너편 지파들과 싸우려 하였습니다. 진상조사단은 상대방의 말을 듣기도 전에 자신들의 일방적인 판단들을 쏟아 놓습니다. 요즘 ‘버럭 00’하는 말이 유행입니다. 전후사정도 듣지 않고 버럭 화부터 내는 것이지요.

이러자 르우벤과 갓 지파는 자신들이 왜 그런 일을 하였는지 속사정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결코 제단을 세워 제물을 바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강변합니다. 그 이유를 24, 25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분의가 없느니라 하여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으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곧 지금은 서로 한 형제처럼 지내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 자손들이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있는 성전에 예배드리지 못하게 하고 이스라엘 하나님과 너희는 상관이 없다 미리 염려하여 이 단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코 이곳에서는 번제나 화목제나 다른 제사 등 일체의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며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는 한 형제임을 증거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르우벤, 갓, 므낫세 절반 지파가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그 주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가나안 땅입니다. 그러나 이 2와 1/2 지파는 요단을 건너기 전 취한 이 동편의 땅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살아 있을 때 그 땅을 달라고 강청하였습니다. 처음 이 제안을 받았을 때 모세는 반대했습니다. 가데스바네아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40년 전에도 불순종하여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했는데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까 염려가 되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계속된 강청에 다른 지파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싸울 때에 가장 앞장서서 싸우기로 약속하고 모세는 조건부로 요단 동편 땅을 기업으로 줍니다.

요단 동편 땅이 그들의 기업이 되긴 했지만 이곳은 기업을 삼을 곳이 못됩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보너스일 뿐이지 보너스가 기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식은 19절 말씀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 소유지가 만일 깨끗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를 취할 것이니라” 요단 동편 땅이 깨끗지 않다는 판단이 들어가 있습니다. 약속의 본류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우리의 본업은 여호와를 섬기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 직업을 취하고 있지만 여기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고향은 하늘나라입니다. 본업을 포기하고 부업에 열중하면 존재가 불안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부업에 매여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마치 성지순례를 떠난 순례자가 어느 마을에 머물러 장사나 하며 만족해하는 모습과 같다 할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데도 핵심이 있고 부차적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핵심이고 축복은 결과물일 뿐입니다. 축복 때문에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힘써도 되는 일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핵심 중에 핵심입니다. 모든 성경은 십자가 밑에서 조명되어야 합니다. 특히 구약을 더욱 그래야 합니다. 전쟁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 기사 때문에 기독교가 폭력적 배타적이 되기 쉽습니다. 구약 시대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모든 것을 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그 시대는 어쩔 수 없어 전쟁을 하였지만 하나님의 본심은 사랑이요 평화입니다. 심판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판단을 뒤집어 놓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갈등과 전쟁이 아닙니다. 이제는 자기를 희생하는 섬김이요, 모든 갈라진 것들의 화해와 평화입니다. 불행히도 교회 역사는 이 십자가를 십자군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구약시대로 돌아간 것이지요. 전쟁으로 건설하는 평화는 평화가 아닙니다. 나쁜 평화가 없듯이 좋은 전쟁도 없습니다. 그 대가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십자가입니다. 구약의 모든 전쟁은 이제 십자가의 눈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은 정복 전쟁의 승리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 희생자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평화를 이루는 자로 오십니다.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라는 곳에는 전승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승탑 모형이 독특합니다. 보통 전승탑은 미 해병대 병사들이 점령한 고지에 성조기를 꽂는 그런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러나 이곳의 전승탑은 어머니가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상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결국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며, 이 모상은 바로 그 아들을 맞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이를 통해서 전쟁의 승리보다 전쟁의 야만을 드러내고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핵심은 십자가이고 십자가에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다른 은혜는 부차적인 은혜일 뿐입니다.

3) 대화가 필요해

그렇지만 어찌되었든 세 지파는 요단 동편 땅을 기업으로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소외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큰 제단을 만들었다고 진상조사단에게 변명합니다. 이 제단은 제사나 어떤 의식용이 아니라 단지 증거하는 기념 제단일 뿐이라고 변명합니다. 이들의 말이 열 지파의 진상조사단을 설득시켰습니다.  30절입니다. “제사장 비느하스와 그와 함께한 회중의 방백 곧 이스라엘 천만인의 두령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의 말을 듣고 좋게 여긴지라”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내용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자 이스라엘 백성들도 좋아합니다. 32,33절입니다.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방백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을 떠나 길르앗 땅에서 가나안 땅에 돌아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러 회보하매 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의 거하는 땅에 가서 싸워 그것을 멸하자 하는 말을 다시 하지 아니하였더라” 오해가 풀렸습니다. 이처럼 모든 문제는 그 속사정을 듣고 나면 이해가 됩니다. 우리의 싸움의 많은 부분은 상대방의 진심을 듣고 나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짜고짜 버럭 화를 내며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갈등이 커집니다.

어느 지하철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젊은 남성이 두 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에 올라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이들은 지하철에 올라타자마자 차 안에서 뛰어다니며 전동차 안을 소란스럽게 만듭니다. 심지어 어른들이 읽고 있는 신문도 손으로 낚아채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아이들의 아빠는 말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속으로 그 아빠를 욕하며 불쾌해 합니다. 승객 중 한 명이 참다못하여 아이 아빠에게 아이들을 제지 시키라고 말을 합니다. 그때 그 아이 아빠가 제정신이 든 듯 이렇게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 정신 아니라서 그랬습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병으로 고생하던 제 아내가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나 제 아이가 정신이 없어서 그랬나 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 전동차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아빠나 아이들을 측은히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도 이들에 행동에 대해서 불쾌해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삽시간에 일어난 마음의 변화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 속사정을 듣는다면 이해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대화의 부재요, 소통의 부재입니다. 서로 충분히 듣고, 또 자세히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전제로 서로 타협점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부부 관계도 그렇고 부모와 자녀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속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들을 때 피상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과거나 상처, 집안 환경과 자라온 형편을 안다면 더욱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 여름성경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름성경 학교 마지막 행사로 세족식을 하였습니다. 세족식은 부모가 자녀들의 발을 씻으며 서로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아들의 발을 씻어 주며 엄마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누구보다 너를 사랑한다. 네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무엇이든 들어줄게.” 그러자 아이가 묻습니다. “그럼 피자도 구워줄 수 있어?” 합니다. 뜬금없는 요청에 엄마는 의아해 하며 “그럼 물론이지”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갑자기 대성통곡하며 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그 아이가 평상시 엄마 말을 잘 듣지 않고 늘 반항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 계기가 바로 피자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엄마는 시부모 일로 바쁘고 아빠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는데 그때마다 그 아이가 피자를 구워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엄마는 전혀 의식치 못했는데 이때마다 거절을 했다고 합니다. 그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자 아들은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고 엄마에게 반항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세족식 과정에서 이 속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자 아이나 엄마나 서로 얼싸안고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단순한 문제인데 우리는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함으로 서로 미워하며 힘들게 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국사회는 대화가 부족합니다. 자기 입장만 강요하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인터넷 공간은 더 심합니다. 그 사람의 진심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마구 판단하고 비아냥댑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화를 하고 그 중심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대화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격체로 대우하면 서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집단과 집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의 느낌과 원하는 바를 알고 그에 동조해 주면 평화의 길은 쉽게 열릴 수 있는데 우리는 자기 말하기에 너무 빠릅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으시고 우리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 좋습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중심이 무엇인지 먼저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중심을 본다면 사랑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평화는 대화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서로의 입장이 되어 그 진심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다면 평화는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의 사랑과 깊은 대화를 통하여 사랑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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