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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은 진정 자유하십니까? (요 8: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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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진정 자유하십니까? (요 8:31-36)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    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    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

철없을 때, 성경 중에 가장 이해가 안되던 말씀 중 하나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는 말씀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교회 안다니는 아이들이 저보다 더 자유로와 보였습니다. 일요일에 교회 안가도 되지, 술 담배도 하고 싶으면 하지. 그러나 교회다니는 나, 특히 목사 아들이고 목사가 되어야 하는 나는 해야 될 것도 많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많으니 부자유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습니다.

학교 표어로 사용되는 것이 넌센스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아마 학교가 진리를 가르친다고 생각해서 인용하는 성구인 것 같은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가 결코 같은 것이 아닌데다가 학교 다닐 때 자유를 경험했나? 아니었습니다. 철없었을 때 생각이지만 학교 안다니는 아이들이 부러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예수님을 믿고 신앙 생활하는 일이 아주 부자유하다고 생각되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마음으로부터 아멘입니까? 여러분은 진리를 모르는 세상 사람보다 더 자유하십니까? 그렇게 느끼십니까? 감격스럽습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리둥절했습니다,
(33절)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그렇습니다. 자유란 자유없이 얽매인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포로나 학생들이나 군인들에게나 간절한 것입니다. 곧 8.15 광복절이 옵니다만 일제 36년 동안 정말 자유와 광복을 갈망했지 않습니까? 학교 다니는 학생들 또 군에 입대한 자녀들은 얽매어 있는 생활이라고 자유를 간절히 갈망하기도 합니다.
종이 아닌 사람은 굳이 자유가 그렇게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미 내가 자유롭게 잘 사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유없는 종입니까? 대부분 자신을 종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처럼 이 말씀이 와 닿지 않은 것입니다. 선듯 수긍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 얽매여 종노릇하는 문제를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 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34절) “ 죄를 범한 자마다 죄의 종이라”
나는 종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분들, 어떻습니까? 충격을 받으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당신, 종이냐” 하면 “아니다.” 하지만 “죄를 범한 적 있느냐?” 하면 무엇이라 대답할 것입니까? 양심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예, 죄 지었지요.” 한다면 죄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아니 죄 한번 지었다고 어떻게 죄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대답해 보십시오. 정말 죄 한번 지은 정도입니까? 죄를 내가 짓고 싶으면 짓고 짓기 싫으면 죄를 안지을 수 있는 문제입니까? 죄를 짓고 안 짓고 여러분 마음대로 통제가 됩니까? 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셨습니까? 결과는 어떻습니까? 죄 안지으려고 금식하고 기도해도, 죄의 본성은 여전히 그대로 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이제는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자유롭게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누구에게 종이 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살지만 나의 실상은 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죄 안짓고 싶다고 죄 안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 뒤에는 마귀가 있는데 결국은 마귀의 종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연적인 진리를 보지를 못합니다. 마음대로 사는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원했던 삶을 살았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죄에 무섭게 죄에 묶여 끌고 들어가는 어떤 힘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될 것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마귀의 종노릇하는 데서 자유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5절)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죄의 종은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마귀가 처할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돈있고 성공하고 건강하면 무엇합니까? 죄의 종으로 살았다면 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행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35절-59절에서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마귀의 종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8절)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        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종이란 주인이 시키는대로 하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유대인들을 죄의 종이라는 말하셨습니까? 마귀의 지시대로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유대인들이 펄쩍 뜁니다.
(39절)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그 때 예수님께서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이 마귀의 자식인 증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40절에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말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는 것입니다. 마귀는 살인자입니다. 둘째는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하는 것이고 셋째는 마음에 욕심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          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          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율법을 아무리 많이 알고 율법을 지키려고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마귀의 종노릇하는 것에서부터는 해결이 안되더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자기들이 아무리 율법으로 산다고 아무리 내세우고 겉으로는 자유인처럼 보여도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는 그들은 죄의 종이고 마귀의 자식이더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원하는대로 살고 마귀가 하는 것을 하니까.
여러분, 유대인들을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사십니까? 나는 누구의 종된 적이 없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이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48절에 가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귀의 종노릇하며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원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우리 삶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딛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시면서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열매가 맺힙니까?
“내가 죄의 종이구나!”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모범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제가 말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드러내고 죄 짓는 자는 아니었지만 은밀한 죄를 짓는데는 선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행실이 바르고 성실했고 칭찬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않는 때는 음란과 욕심과 거짓과 교만의 죄가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라 하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자꾸 죄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바리새인과 같은 죄임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런 죄책감 때문에 목회를 그만 둘 생각도 했었습니다. 교인들 앞에서 너무 이중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의 죄 실상에 눈이 뜨이고 나서야 비로서 제가 십자가를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백했습니다.
(롬 7:19-24)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오            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정직한 사람은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의 종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것입니다.
(요 8:31-32)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              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누구 말을 듣고 따르느냐에 따라 누구 종인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따르면 예수님 제자이고, 마귀 말을 따르면 마귀의 종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닌척하고 꾸밀 수 있지만 속의 중심은 마귀가 원하는대로 살았던 사람은 마귀의 종입니다. 사람을 은근히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마음이 있고. 또 욕심은 얼마나 큰지 이기적으로 판단하고 살고 거짓말은 밥먹듯이 하면서도 아무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마귀의 종노릇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더 이상 마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마귀의 지시를 분별해야 합니다. ‘죽여라, 거짓말하라, 욕심대로 살라.’ 이것이 마귀의 지시였구나! “이제는 ‘아니야! 안할 거야!’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 말씀을 들으려 하고 그 말씀을 품으면 주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36절)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존 웨슬리 목사님, 아버지도 목사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 수산나로부터 경건한 교육을 받았고, 그 방탕한 시절, 옥스포드 대학에서 홀리클럽이라는 경건 단체를 만들고 성경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는 미국 선교사로 자원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독일에서 온 모라비안 교도의 영적 지도자 스팡겐버그가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할 때 웨슬리는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그가 온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압니다.” 그 때 스팡겐버그는 물었습니다. “그가 바로 당신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 때 웨슬리는 너무나 확신없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기를 바랍니다.” 그의 미국 선교 여행이 실패로 끝나고 돌아온 후 너무나 낙심이 되어 “나는 믿음이 부족함을 느낀다. 나는 설교할 자격이 없다.”고 눈물로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죄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1738년 5월 24일 올더스케잇 거리의 한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을 사회자가 읽는 것을 듣다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는 말씀이 그 마음에 부딪혀 오면서, “그렇구나! 구원을 위하여 나는 다만 그리스도만 믿으면 되는구나. 주께서 나의 죄, 나의 모든 죄까지 다 거두어 가셨구나.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주셨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감격에 차서 동생 찰스에게 달려가서 외쳤습니다. “이제 나는 믿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그 때 웨슬리 목사님에게 용서받은 확신이 임한 것입니다. 죄짐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면 죄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루터는 수도원에서도 얼마나 죄로 고민했는지, 고해성사를 받던 신부가 “루터야, 죄 좀 모았다 가져오너라.”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그러던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읽다가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어느 날 루터는 몸이 몹시 쇠약해진 상태에서 침상에 누워 있는데 마귀가 방에 들어와서는 굉장히 큰 두루 마리 책을 펴놓는데 보니까 자기가 평생에 지은 죄를 다 기록해 놓았더랍니다. 루터는 그것을 다 읽고 난 다음에 마귀에게 말하기를 "맞다. 이 모든 죄를 내가 다 지었다. 그러나 네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셨어." 그 말을 하자마자 마귀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죄 값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죄 값에서만 자유함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합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믿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 살게 합니다. 죄 그 자체였던 우리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
(롬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          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우리가 이 말씀에 거할 때,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는 예수님이 내 생명이 되어 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죄가 내 속에서 일어나고 두려운 일, 염려, 낙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사실상 죄의 종노릇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이 내 생명이시니까. 

  중국 내지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가 선교 사역 중에 신경쇠약에 걸려 앓아 누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과로와 염려와 두려움이 많은 것도 그렇고, 사람들과의 관계 문제도 그렇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친밀하지 못한 내적인 죄와의 싸움에서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도무지 선교 사역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견딜 수 조차 없었습니다. 그 때,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을 그 죄의 권세와 염려와 좌절에서 자유하게 한 것이 말씀이었습니다.

  어느 날 성경 요한복음 15장 5절을 읽었는데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는 말씀이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그는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께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 주는 나무이므로 가지인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다니 어리석었구나.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시옵소서.” 라고 꿇어 엎드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시인하고 회개하며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러자 평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고 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생명이십니다.” 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일 때, 어떤 죄도, 두려움도 염려도 낙심도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승리한 비결이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          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          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          는 것이라”

예수를 믿으시는 여러분, 이제 죄에서 자유하십니까? 죄가 더 이상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합니까? 두려움 염려, 분노, 낙심에서 자유하십니까?
말씀을 수없이 들었지만 자유를 얻지 못한 경우는 왜 그렇습니까?
말씀을 듣지만 평가하고 들어보는 자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약간 머리를 갸우뚱하고 듣는 태도입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귀를 쫑긋 세우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말을 다 같은 태도로 듣지 않습니다. 외판원, 거리 정치인 유세, 존경하는 선생님, 직장의 사장, 모두 다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아멘입니다. 아멘!” 바로 그 말입니다. 이것은 그저 들어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설교 열등감이 너무나 심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내용은 아는 내용인데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 것입니다. 제 속에는 하나님도 잘난 사람 유능한 사람을 택하여 쓰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굳어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에 진심으로 아멘이 되지 않아서 3일을 묵상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3일째 되는 날 이 말씀을 이해하려 하지 말고 믿고 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 저는 이 말씀을 믿겠습니다.” 고백하는 순간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그 만큼 내 마음에 열등감의 짐이 컸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설교가 편해졌습니다. 열등감에서 자유함이 온 것입니다. 다른 목사님 설교에서 은혜받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연약함 모습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나의 약한 것에서 더 큰 은혜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은 가까이 있습니다.

(롬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성도 여러분,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케 하시는 것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품어 예수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아 죄와 마귀의 권세에서 자유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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