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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일을 디자인 하라 (눅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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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디자인 하라 (눅 9:57-62) 

지난 수요일 15일에 올해의 여름수련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한건의 사고도 없이 지켜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우리 감사의 박수를 드리십시다.

수련회를 통해 새로워진 줄 믿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새로워져서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형상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더욱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은 기껏해야 24시간이지마는 내일은 끝없이 펼쳐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표가 나를 향하여 손짓 하고 있기도 합니다.
내 인생의 목표가 어서, 어서 손을 잡아 달라고 나를 부르고도 있습니다.

오늘 6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 하니라”

이제는 새로운 미래를 가져야 합니다.
바로 비전(vision)입니다.

허무한 공상이 아니라 목표가 흔들거리지 아니하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같은 사람인데도 어떤 이는 비전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비전이 없는 걸까요?

그냥 아이디어를 내던지기 때문입니다.
“이건 넘어가자”
“아직 준비가 덜 됐지”
“그냥 평범하게 사는거야”

일반적으로 사람은 막다른 골목에서 위대한 미래를 너무나 쉽게 내버리고 맙니다.
또 해야 할 일이 정신없이 밀려올 때 비전을 잃고 내일을 내 던져 버립니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미래를 내던집니다.
때로는 피곤이 나의 비전을 앗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성결케하라. 하나님과 동행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부정적인 감정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소망 있는 비전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을까요?

저는 운동장을 돌고는 합니다.
그런데 걷다 보면 풍을 맞은 어떤 분을 만나게 됩니다.
한쪽 어깨는 축 내려가 있고,
걸음도 올바르지 못하지만,
그래도 매일 오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매우 용기 있는 모습을 느끼게 합니다.
‘계속 하세요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위험해도 자갈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마세요.
아무리 커다란 상을 탔어도,
분에 넘치는 영광을 얻었다고 해서, 그냥 소파에 앉아서 평생토록 텔레비전만 볼 것입니까?

기억하세요!!
바로의 군대가 시퍼런 칼을 휘두르면서 몰려드는 순간인데도, 모세는 지팡이를 높이 들고는 흔들거리지 않았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의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믿음위에 굳게 서세요!!
그리고 긍정의 바다를 향해 뛰어 들어야 합니다.
가능성의 세계를 향해서 가슴을 여세요.

가능해, 가능해, 가능해...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멘!

나의 맘속에 온전히 주님만 모셔놓고 나의 정성을 다하여 주를 섬기리
기쁘나 슬프나 오직 한 맘 주 위해 한 평생 주만 모시고 찬송하며 살리라
주는 나의 큰 능력 주는 나의 큰 소망 내가 항상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주만 섬기고 사는 것 더 없는 기쁨이요 주가 내 안에 계셔서 동거함이라
기쁘나 슬프나 오직 한 맘 주 위해 한 평생 주만 모시고 찬송하며 살리라
주는 나의 큰 능력 주는 나의 큰 소망 내가 항상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런데 이 위대한 비전을 가라 막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하려는 완벽주의입니다.

과자에 금이 갔다고 운다거나,
장난감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다고 투정을 부리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도 화를 낸다든지 하면,
이건 완벽주의자입니다.
그저 언제나 단정하게 옷을 입고,
신으려는 양말이 한쪽만 삐뚜러져도 칭얼대고,
불완전한 아이에 대하여 인내하기 힘들어 하고,
자신의 실수를 수치스럽게 느낀다면, 이건 완벽주의입니다.

어찌 들어보면 완벽주의가 좋은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주의의 문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적절한 죄책감과 수치스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속에는 ‘마음에 새긴 율법, 양심’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양심은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은 죄에 대하여 유죄를 느낄 때에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무시하면 양심은 점차 무뎌지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을 보세요.
삼하 12:1-13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살해하고도 처음 몇 달간은 자신의 죄를 억압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나단선지자의 비유로 자신의 죄가 드러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 합니다.

시 51평은 다윗의 회개의 시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한 것은,
적절힌 수치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연약하고, 부족해야 하나님이 도우시고, 인도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 5:6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8절도 보세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롬 8:26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하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는 배추를 헤아릴 때나 사용하는 말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다 하려도 들지 말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내 자신이 너무 연약하면,
그 때부터 나는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강하게 의지하고,
위대한 비전을 세우고,
완벽주의를 버리면,
비전대로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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