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더 높음으로의 인도 (행 27:20-26)

  • 잡초 잡초
  • 268
  • 0

첨부 1


더 높음으로의 인도 (행 27:20-26)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
            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이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바울을 선택하셔서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여 양육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로 부르신 후에는 일일이 간섭하시고 동행하시고 방향을 지시하시며 인도하셨습니다. 선택받음은 은혜이고 축복이고 행운입니다. 단 택함 받은 사람은 간섭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내 자식은 부모가 간섭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간섭하십니다. 왜냐하면 더 넓은 세상으로, 더 높은 세계로, 더 깊은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마침내 로마로 갑니다. 더 넓은 세계로, 더 높은 세계로, 더 큰 사명을 펼칠 로마로 떠납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마침내 몇 단계를 거쳐서 로마로 갑니다.

죄수와 함께

1절을 보면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가기로 작정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로마로 가라고 계시하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전도하는 것을 최대의 꿈으로 비전으로 여겼습니다. 마침내 그 뜻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래서 꿈에 그리던 로마로 갑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는 바울 일행이 페리호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호화여객선을 타고 간 것이 아니고 아주 초라하게 갑니다. 1절을 보면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백부장 율리오의 인솔로 갔다”고 했습니다. 이 배에는 모두 276명이 탔습니다. 그중에는 죄수들도 함께 했습니다. 이 죄수들은 이미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들로 로마로 가서 원형극장에서 짐승 떼와 싸워 밥이 되거나 찢겨져 죽을 눈요기 감이 되기 위해서 가는 죄수들입니다. 바울도 전도하다가 고발당했는데 로마로 가서 재판받겠다고 상소해서 지금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죄수신분쯤은 문제가 아닙니다. 로마로 가서 법정에 서서 전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전도자들은 죄수의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오늘도 전도할 때 죄인 취급을 당합니다.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비난합니다. 그래서 선교지에서는 신분도 바꿉니다. 때로 수난도 당하고 봉변도 당합니다. 모두 예수 때문에 당하는 죄수 아닌 죄수처럼 해야 전도가 가능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피를 흘리고 순교도 당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초창기 복음이 들어왔을 때 모든 여성들은 숨죽이고 죄인 심정으로 교회에 나갔다. 그러면 집안에서 얼마나 죄인 다루듯이 취급했는지 모릅니다. 내쫓기도 하고 매를 가하기도 하고 욕을 먹기도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유교집안에서 장남이 예수 믿고 신학교 간다고 호적에서 파내지고 내쫓김을 받은 목사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집안도 복음화가 되었습니다. 초창기에는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가 되어서라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당시 로마로 가는 것은 죄수로 가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얼마든지 편안한 수단으로 로마에 갈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구지 이 길을 택하게 하셨습니다.

파선

바울이 지금 로마에 가는 것은 순전히 전도하려는 목적뿐입니다. 그것도 성령의 계시를 받고 가는 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에게 순탄한 길을 주셔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바울에게 그렇게 해 주셔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하나님을 위해서, 복음전파를 위해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은 넓고 큰 꿈을 안고 로마에 가서 전도할 비전을 가지고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험난했습니다. 바울이 탄 배가 로마로 가던 도중에 파선합니다. 14절을 보면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 유라굴라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20절에 “여러 날 동안 해도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 구원의 여망이 보이지 않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보름동안을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배가 표류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바울을 훈련하고 계십니다. 바울에게 아직도 훈련이 더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회심 후 눈코 뜰 새 없이 1차, 2차, 3차 전도여행 통해 온갖 어려움 다 경험했습니다. 행 14장을 보면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돌에 맞아 실신한 적이 있습니다. 행 16장을 보면 빌립보에서 귀신 내쫓았다고 고발되어 군중에게 매 맞아 죽을 뻔도 했습니다. 행 21장을 보면 바울을 죽이려고 훈련된 사람이 40명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거기다 굶주림과 헐벗음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 등 모진 훈련을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훈련이 더 필요했던 가 봅니다. 하나님은 모질게도 바울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것은 로마로 가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신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무엇이나 순탄한 것이 없습니다. 인생행로도 살펴보면 결코 평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아도 결코 평탄하지 않습니다. 형통을 구해도 소용없습니다. 아예 인생의 행로에는 형통이란 없습니다. 또 복음전파의 과정에도 평탄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모두 형통하고 평안하리라고 기대하면 안 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바울은 큰 뜻을 품고 꿈을 가지고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분임에도 지금 복음을 전하고자 가고 있는 그 길을 평탄케 하지 않고 죽음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 광풍이 유리굴라고 했습니다. 유리굴라 라는 말은 동풍과 북풍을 의미하는 합성어 입니다. 이 바람을 당시 사람들은 유리굴 이라고 불렀는데 우리 표현으로 말하자면 “광풍” 미친바람 즉 죽음의 바람입니다. 이 바람이 배를 뒤집어엎고 바울 일행을 보름동안 유례없는 고난의 길로 내 몰았습니다. 때로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오해할 때가 생깁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데 왜 평안하게 형통하게 안 해주나 하는 오해입니다. 요즘 기도도 조금하고 헌금도 조금하고 봉사도 조금했는데 하나님이 왜 안 알아주시는가 하고 샐쭉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시험 들기도 합니다. 그것이 오해입니다.

바울은 지금 성령께서 로마로 가라고 해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관광 가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의 가는 길에 형통을, 평안을, 순조로운 길을 마련해 주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파선 했어도 바울이 타면 형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이 보름동안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고 밤낮 해도 달도 보이지 않게 파선해서 사지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얼마나 혼비백산 했는지 20절을 보면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그때 겁이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때로 이렇게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요즘 내가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데 어느 날 큰 병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의문이 발생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병을 주시는가, 왜 이런 실패를 주시고 고난을 주시는가” 그래서 의기소침하고 시험 들고 용기를 잃게 됩니다.

바울은 전도하는 과정에서 헐벗고 주리고 고난당하고 몸에 병까지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쳐달라고 기도했는데도 안 고쳐 주셨습니다. 오히려 그대로 좋으니 더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가는데 일주일이면 갈 곳인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40년 걸려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목사가 되면 되자마자 탁월한 언변을 주시고 초능력을 주시고 신유의 능력도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기대를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야합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려면 몇 가지 먼저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반드시 평안하고 호화롭고 형통하는 것만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형통이 좋은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들을 이렇게 훈련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주 쉽게 평안하게 아스팔트길로 인도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이 로마로 전도하려 간다고 초수단, 초능력, 모든 과정을 무시하고 쉽게 보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바울이 교만해질 까봐 몸에 병을 주셨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가면 바울은 순교해야 합니다. 바울이 너무 쉽게 가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보름동안 바다의 캄캄함 속에서 헤매는 훈련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우습게 여기고 감상적으로 생각하고 동정심을 유발하여 움직이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값싼 은혜를 구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바울 하나님 만남

바울은 그때 파선해서 보름동안 모진 훈련을 받으면서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길은 분명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인데, 이 길은 주께서 분명 가라해서 가는 길인데 왜 이러시나 하고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다 바울이 마침내 그 해답을 얻었습니다. 22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니라, 네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젯밤에 내게 말씀하시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느니라, 그러니 너희는 안심하라.” 우리들이 대부분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신앙생활 시작할 때, 도중에 또 한 번 만나고 또 여러 번 만난 경험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번 만나는 그런 만남은 아닙니다. 여러 번 만나야 합니다. 기도 속에서, 찬양 속에서, 꿈속에서, 일상의 생활 속에서 여러분 순간 마다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때나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평상시에 만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평안할 때, 건강할 때, 잘 살고 있을 때 만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는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게 문제가 있습니다. 목이 마르지 않은 사람은 물을 찾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병원에서 미리 가서 진단받지 않습니다. 평안하고 건강하고 아무 일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오셔도 모릅니다. 문제가 내게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건강이 악화되면 꼼짝없이 병원에 갑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간절히 찾고 사모하면 하나님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그 간절히 찾고 사모하고 필요로 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이 넘어졌을 때이고, 아플 때이고, 배고플 때이고, 실패했을 때입니다. 그 때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절실하게 필요로 합니다. 만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니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로마로 가던 사람들이 보름동안 파선하여 굶고 잠 못 자고 사경을 헤맸으니 얼마나 절박한 순간입니까. 그때는 인간의 영감이, 지혜가, 감각이, 생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눈이 뜨이는 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바울에게 계시로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결코 다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는 반드시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 그러니 그때 바울이 얼마나 자신감이 생겼겠습니까. 다메섹에서 나타나셨던 주님이 오늘 이 절박한 순간에 또 나타나셔서 안심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수들과 276명 앞에 서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권위 있게 진정을 시켰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얼마나 안심하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은 그 순간 로마로 가는 길에 그 어떤 두려움도 가까이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자신감을 얻고 신앙의 높은 경지에 들어갔겠습니까. 살아가는데 고난, 풍파, 실패, 괴로움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신앙의 깊고 높은 경지를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신앙인에게는 그런 영적 경험들이 쌓여야 순도 높은 신앙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사업에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알아주었습니다. 부르는 곳이 많았습니다. 여기저기서 동창회장하라 단체장하라고 했습니다. 또 여기저기서 인터뷰도 요청했습니다. 그분은 장로였지만 장로직은 사치였고 액세서리였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잠간 예배드리고 이곳저곳으로 불려 다니고 가서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할 때는 내가 이렇게 해서 성공했다 하고 나를 강조했습니다. 그런 생활이 언제나 계속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인생의 길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부터 사업이 기우뚱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부도가 났습니다. 그러니까 그 많던 사람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혼자뿐이었습니다. 배신감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캄캄한 밤에 혼자 앉아 기도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밥을 굶어가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가 진짜로 멀리 계시던 그동안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고백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다 잃고 나니까 나를 만나 주시더라.” 하나님은 참 묘한 분이십니다.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다가오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파선 중 평안함

바울은 파선 중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그 와중에도 계시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밤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서 떨며 보낼 때 바울은 그 밤을 얼마나 환상 속에서 보냈겠습니까. 그래서 날이 밝자 바울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외쳤습니다. 22절을 보면 “여러분이여 이제는 안심하십시오, 당신들 한사람도 생명에는 아주 손상이 없을 것이요, 하나님의 천사가 어젯밤에 내게 말씀하시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소,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십시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소.”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멋은 이렇게 위기 때 발생합니다. 계시 받은 사람은 이렇게 멋이 있고 용기가 있고 평안함이 있고 자신감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멋입니다. 신앙 체험자는 이렇게 자신감이 주어집니다. 그때 주어지는 것이 평안인데 그 평안이 “에이레네” “영적 평안, 즉 죽음을 초월하는 평안”입니다. 그 평안은 영감, 계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주어지는 평안입니다. 신앙이 주는 이 평안은 내 운명, 내 목숨, 나 자신을 모두 하나님께 맡길 때 주어진 결과의 선물입니다.

바울은 드디어 로마로 갑니다. 바울 앞에는 이제 더 많은 고난이 기다릴 것입니다. 그 고난들을 다 이기려면 바다에서 파선한 경험이 주효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파선했을 때 주어졌던 평안이 수난당할 때마다 바울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지훈련을 다시 한 번 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모질게 훈련하신 것은 그로 하여금 더 넓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정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