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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하나님께 취한 마음) (요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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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하나님께 취한 마음)
본문: 요한복음 15:1-8

멕스 루케이도 목사님 <예수님처럼>에서

1.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고린도후서 6:1에서는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에 대해서 놀라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고후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홀로 또는 우리 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함께 일하는 동역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순간도 교회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 분이 언제나 함께 하시기에 성스럽지 않은 순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분의 임재는 결코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 분의 임재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흔들릴 수 있으나 그 분의 임재의 실체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의 부분에 임재하고 계신다면 우리가 순간순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것은 가능할까요? 내가 숨쉬고, 생각하고, 밥을 먹고, 직장에 나가 일을 하고, 쉬고,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에도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이 친밀함을 과연 느낄 수 있을까요?
  이런 의문을 품고 있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프랭크 로바크(Frank Raubach)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884년 미국에서 태어나 문맹자들을 위해 선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계속적인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기를 갈망한 어느 날의 일기 속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런 교류를 항상 유지할 수 있을까? 깨어있는 동안 내내 그렇게 살다가 잠들 때 그 분 품안에 잠들고 다시 깰 때 그 분의 임재 안에 깰 수 있을까? 그 임재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항상 그 분의 뜻을 행할 수 있을까? 항상 그 분의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언제나 내 마음에 거하실 수 있도록 내 생각의 흐름 속에 시시각각 주님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을까? 내 남은 인생을 이 질문의 답을 찾는 실험으로 삼으리라.

  그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내적인 교제를 갈망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머물기로 연습했다. 로바크가 이렇게 결심하고 하나님과의 교제 연습을 시작한 때가 1월이었습니다. 그는 1월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을 느끼고 있다. 지금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는 이 손가락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기 바란다. 내가 걷는 걸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흘러나오기 바란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그의 일기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주님만이 저를 이해하실 수 있고 주님만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걸 깨닫고 나니 주님과 저 사이가 얼마나 더 가까워졌는지요! 하나님,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낯선 분이 아닙니다. 온 우주에서 주님은 단 한 부분도 낯선 데가 없는 유일한 분입니다. 주님은 온전히 제 안에 계십니다. 여기에 ....
  날마다 하나님과 끝없는 영적 교제로 광채를 발하며 “하나님께 취하여” 이 땅을 사실 맛보신 그 놀라운 위력을 나도 하루나마 약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록한 때가 6월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순간순간 교제하며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취하여 살기를 원했던 때가 1월이었으니까 꼭 반 년 만에 로바크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순간순간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로바크의 이런 경험과 모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도 로바크처럼 하나님과 그런 교류를 항상 유지할 수 있을까요? 깨어 있는 동안 내내 그렇게 살다 잠들 때 그 분 품안에 잠들도, 다시 깰 때 그 분의 임재 안에 깰 수 있을까요? 우리도 그 임재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로바크의 이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소망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수도원에 틀어박혀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기를 원했던 갇힌 영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평범한 교사로서 살면서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 이것이 과연 현실성 있는 목표일까? 과연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내가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하면 내가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광적이며 극단적으로 비춰지진 않을까?’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하나님과 막힘없는 교제를 누렸다면 우리도 누려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되기 원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의 모습을 봅시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느끼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금방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5:19)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14:11)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느니라.”

  예수님은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심판을 듣지 않고는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인도 없이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고는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말, 모든 행동,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막힘없는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것을 원하실까요? 아들과 끊임없이 교제하셨던 아버지는 우리들과도 막힘없는 교제를 원하실까요? 물론입니다. 사도바울은 (롬8:29)에서 말씀합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미리 정하셨다.” 하나님은 아들과 나누신 그 친밀함을 우리와 같이 나누기 원하십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이 포도나무의 비유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 분께 붙어있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가지는 나무의 연장입니다. 어디까지가 나무고 어디부터가 가지인지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가지는 열매 맺는 순간에만 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함께 했습니다. 가지는 나무에서 양분을 빨아들입니다. 가지가 나무로부터 분리되는 순간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왔다가 떠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일 아침 우리를 찾아오셨다 주일 오후에 떠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머무시며 우리의 삶 속에 계속 임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듯 우리도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 수 있을까요? 내 어깨위에 보이지 않는 그 손과 내 귓전에 맴도는 그 분의 들리지 않는 음성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을까요? 맥스 루케이도는 책에서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침에 잠에서 깰 때 하나님을 생각하라. 이제부터 아침에 잠에서 깰 때 맨 먼저 외치는 소리는 “아 피곤해! 여보! 오늘 지구의 종말이라는 뉴스 없어? 그러면 회사에 안 나가도 될 텐데.....” 이렇게 말하지 않고 하루를 맞이하기 전 먼저 하나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눈을 뜨는 순간 잠깐이나마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잘 자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는 주님께 속한 자입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는 순간.... 하루에 대한 당신의 모든 소원과 희망이 야생 동물마냥 당신을 엄습해 온다.

아침마다 첫째로 할 일은 그 모든 잡념을 밀쳐내고 다른 목소리를 들으며 다른 시각을 입는 일이다. 다른 삶,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고요한 삶이 내 안에 잦아들게 하는 일이다.”
  아침에 깰 때 직장의 업무, 어제 잠들지 못하게 만든 그 스트레스, 내가 늘 추구하던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째, 말없이 바라는 중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침묵의 시간을 보내십시오.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입술을 닫고 하나님 앞에 잠잠히 있어보는 것입니다. (시 46:10)에서 말하는 것처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의식은 하나님 앞에서의 침묵의 결실입니다.

  셋째, 수시로 짤막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영성의 사람들은 이 짤막한 외마디 기도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도 속으로 조그맣게 할 수 있는 기도가 외마디 기도입니다. 앞에서 소개했던 로바크는 하나님께 여쭈어보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네가 지금 주님의 뜻 가운데 있습니까?” “주님, 지금 제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처럼 짤막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을 생각하면 평범한 것들이 비범한 것들이 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 이 시간도 다스려 주시옵소서.” “예수님, 주님은 나의 쉴 곳이 되십니다.” 이런 짤막한 기도 한마디에 출퇴근 시간이 치열한 투쟁의 검투장이 아니라 순례의 길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전철이, 부엌이, 사무실이, 병원이 기도하는 장소로 변하게 됩니다.

  끝으로, 잠자리에 들기 전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하루 일을 마치면서 우리의 마음을 그 분께 내려놓는 일입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기도했던 것처럼 하루의 마감도 기도하십시오. 좋았던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하시고, 힘들었던 부분은 하나님께 질문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십시오. 힘을 구하십시오. 눈을 감는 순간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느니라.” (시 121:4) 기도하다 잠들어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아버지의 품보다 더 잠들기 좋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들도 듣지 못하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고, 그 어떤 사람들도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며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살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께 취한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께 취해 사셨기에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웠습니다. 두려움 없이 너무나 자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술과 같은 세상의 것에 취해서 살아갈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에 취해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취해서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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