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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에도, 집에서도 모이는 신앙 (행 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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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도, 집에서도 모이는 신앙
(사도행전 2장 42절~47절)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여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열리는 영남 선교 대회를 앞두고 8월20일부터 22일까지 청양 숭의청소년 수련원에서 수련회가 개최된다. 우리 교회는 여기 수련회에 참석하여 영적인 은혜를 받고 신앙의 기본이 회복되어야 하겠다.

성령을 받으면 신앙의 기본이 바로 선다. 초대 교회도 건강한 교회의 첫 모습이 바로 모이기를 힘쓴다는 것이었다. 행2:41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는데 그 제자의 수가 3,000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행2:46을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있다. 기독교 사회가 아니고 유대교 사회요,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따르는 이 새로운 교회의 움직임은 유대 사회에서 너무나도 초라하고 낯선 무명의 도였다. 그러나 이 3,000명의 사람들은 모이는 일에 우선하였다. 이것이 감동의 드라마다.

어떻게 모였는가?

1. 날마다 모였다.

초대 교회는 처음부터 신기록 열전이다. 어떻게 날마다 모일 수 있었는가? 약속을 미루고 지금 할 일을 뒤로 하든지 먼저 하고, 아니면 더 일찍 일어나서 자신의 일과를 마무리 짓고 난 후 어찌 하였던 날마다 힘써서 모였다.

2. 마음을 같이하여 모였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제자가 된 그들은 마음이 분열되지 않았다. 마음이 하나로 일치하였다. 모이는 일을 위해 왜? 라는 다른 이견이 없는 것, 그것이 또 한의 신기록 열전이다. 누구나 어렵게 생각되는 것에 하나되는 마음을 만들려고 힘썼던 것이다. 예수는 크리스챤의 주인이요, 크리스챤의 스승이다. 그리스도 한 분만이 나의 자랑이요, 나의 구원이다. 그를 따르기 위해 마음을 같이 하는데 다른 우선 순위를 내려놓으면 된다. 세상으로 가고 싶은 것을 내려놓으면 모이게 된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3. 성전에 모였다.

예루살렘 처음 교회는 주일이 아니라 안식일에 모였다.
예루살렘 처음 교회는 교회도 없어서 유대인 성전에 모였다.
예루살렘 처음 교회는 제도도, 제직도 없었다.

유대교의 한 무리처럼, 한 분파처럼 모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는 자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기를 힘썼다. 120문도의 숫자이든지 3,000명의 숫자이든지 더 나아가 4,000명, 5,000명, 10,000명의 수가 되었든지 성전에 모였다. 이는 자력이 힘을 가지고 쇠를 잡아 당기듯 십자가의 도와 성령의 역사가 저들을 한 모임으로 잡아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혜가 임하면 어찌하든 모이게 된다.
은혜를 경험하면 모이는 일을 더 잘하게 된다.
은혜가 있던 곳에 기쁨이 있고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자유와 소망이 있기에 모임을 방해하는 것을 피하여 모이려고 힘쓰게 된다. 모이면 힘을 얻고 모이면 격려가 되고 모이면 믿음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무디를 찾아온 청년에게 “왜 모여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무디는 벽난로에 장작을 꺼내 보여 주었다. 그 불은 꺼지고 연기가 났으나 집어넣으니 다시 발갛게 타올랐다. 그때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모이는 것은 성령의 임재의 수단이 된다. 모일 때 은혜를 받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21세기도 마찬가지다.

히10:24 “모이기를 패하려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더욱 그리하라”고 하였다.

교회의 모임을 중요시하자. 큰 모임, 전체 모임에 힘을 써서 동행하자. 미스바 모임이 승리의 모임이 되었고 수문 앞 모임이 은혜 받는 모임이 되었고 다락방 모임이 성령을 체험하는 모임이 되었다. 모이는 일에 앞장 서자. 모이면 복 있는 인생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힘써서 모이는 교회의 모임과 함께 집에서도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모이는 모임! 예배를 위한 주일 모임보다 결코 외면해서는 안되는 모임이 있다.

행2:46中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라고 하였다. 초대 교회는 집에서 모이는 모임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집은 성전과 사이즈가 다르다.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제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3,000명의 무리들은 각자의 집에서 나누어져 모였다. 지역별로 모였다. 소수의 모임이기에 행2:42의 기록처럼 모임이 가능했다.

1. 떡을 떼는 모임이 가능했다.

떡을 나누어 먹는 것은 한 식구 모임이란 말이다. 한 가족, 한 식구라는 이 뜻은 믿음의 공동체로서 소속감이 있는 모임, 은혜를 나누는 모임, 서로를 섬기는 모임을 보여준다. 즉, 친밀감이 있는 모임을 의미한다.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의 모임을 의미한다.

2. 기쁨의 모임이 가능했다.

은혜를 받은 마음은 원망이 물러간다. 그리고 기쁨이 샘솟는다. 기쁨이란 단어는 JOY다. JOY란 말은 Jesus, Others, You의 첫 글자가 모여서 이루어진 단어다. 예수 앞에 오면 기쁨이 생긴다.

행2:46의 기록처럼 초대 교회의 모임은 기쁨으로 모이는 가정집 모임이었다. 예수님을 앞에 모신 모임이기에 기쁨의 자리였다. 부담감의 모임이 아니었다.

3. 순전한 마음의 모임이 가능했다.

행2:46下에 나오는 순전함이란 것은 이기적 목적이나 계산된 목적이 없는 깨끗한 마음이다. 오직 주님께 은혜 받은 마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더 높여드리고자 하는 마음,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모이는 모임이었다.

순전한 마음은 영성의 기초다. 소그룹은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심플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관심을 갖고 회복해야 할 모임이 있다면 바로 이 모임이다. 이미 소그룹 모임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들은 초대 교회의 두 가지 형태의 모임 앞에 감탄을 한다. 예수님이 이미 수많은 무리를 만나시면서도 12제자의 소그룹을 운영하셨듯이 예루살렘 교회가 대형 모임이면서 작은 소그룹의 모임, 집에서의 모임을 날마다 갖고 있기 때문이다.

릭 워렌은 성서적 모임의 원리를 알고 가장 크게 성장하는 것만큼 가장 작게 성장하라고 하였다. 그는 초대 교회의 모임은 소그룹 모임으로 규정하고 그 소그룹 모임의 목적을 이렇게 찾아냈다. 소그룹의 가치는 오늘 본문 속에 8개가 있다.

① 가르치는 목적 (행2:42)  ② 교제의 목적 (행2:42)
③ 나누는 목적 (행2:42)    ④ 기도의 목적 (행2:42)
⑤ 섬김의 목적 (행2:45)    ⑥ 공급의 목적 (행2:46)
⑦ 예배의 목적 (행2:47)    ⑧ 구원의 목적 (행2:47)을 이루게 한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성전으로 모이는 모임이나 집에서 모이는 모임이나 본질은 똑같다는 점이다. 즉, 무엇을 하느냐가 같다는 것이다. 행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성전에서도 집에서도 실행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소그룹 모임은 교회다. 우리 교회의 속회로 모이는 가정집 모임도 교회와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

교회에서 예배를 했으면 집에서도 예배한다.
교회에서 전도지를 돌렸으면 집에서도 전도지를 돌린다.

어떻게 예배가 축도로 끝나면 예배당 밖에서 예배하는 삶이 끝이 나는가?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예배의 시작이어야 하고 집에서 찬송 소리, 기도 소리, 말씀을 나누는 영적 애찬의 소리가 나야 한다. 집에서의 모임 속에 예배, 친교, 선교, 봉사가 다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로 속회는 집에서 모이는 모임이다. 가정이 교회가 되는 모임이다.

요한 웨슬리는 경건주의 영향을 받았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신앙의 책을 읽는 거룩한 사적 모임, 콜레기아 피에타티스를 스페너에게서 배웠다. 또 웨슬리는 어떤 이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고 천국에 가기를 원하시지요?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을 결코 혼자서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동지를 찾든가 없으면 만드십시오. 혼자서 믿는 고독한 종교에 대해 성경은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의 여러 가지 질문에 대답하고 신앙을 성장하는데 있어 웨슬리는 속회를 중요시 여겼다. 격려와 돌봄으로 함께 하는 자리는 속회이기 때문에 속회 안에서 서로 교제하게 하였다. 신앙의 기본은 모임에 있다. 속회는 바로 집에서의 모임이다. 우리는 이 집에서의 모임이 교회 안에 작은 교회로서의 모임임을 깨닫고 기본을 새롭게 세우자. 집에서의 작은 모임을 불평하고 등한시 한 것도 우리의 허물이다. 우리 모두 기쁨과 순전한 마음을 구하고 가정에서의 예배, 속회 모임에서의 찬송과 기도를 회복하자. 어떡하면 집에서의 모임을 패하고 핑계 거리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버리자. 언제까지 거짓말 할 것인가? 태도를 바구어 먼저 전화하라. 집에서 모이는 속회, 내가 가고 싶다고 전화하라. 생각해 보라. 당신의 가정에서 찬송 소리가 났는가?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단이 되도록 당신의 방문을 열어드렸는가? 집을 오픈하고 언제든지 믿는 자의 만남을 기대하는가? 가정에서의 속회 모임, 생각해보면 자주 돌아와야 한다.

집은 강대상 없는 교회이다. 속장, 인도자는 가운 없는 목회자이다. 소속감과 돌봄을 통한 말씀의 나눔은 진리를 깨닫는 교회학교 교실이다. 내 가정이 제단이 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초청하는 집이 되는 것,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이제부터 우리는 집에서 모이는 모임에 힘써야 한다.

교회 게시판에 붙여둘 표어는 이렇다.

“CM 교인이 OMC 교인이다.”

이 표어대로 집에서 모임을 갖는 것이 바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우리는 작은 그룹인 속회에서도 선교하고 예배하고 교제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CM은 교회라는 자부심으로 가정 모임을 가꾸고 신앙을 재확립하자. 진짜 꿀벌이 꽃을 향해 날아가듯 속회 모임, 집에서의 예배 모임에 달려가므로 예수의 생명을 지닌 진짜 교인이 되자. 가짜 꿀벌은 어디로 갈지 모른다. 크리스챤이 교회에서의 모임과 함께 집에서 모이는 모임에 가야 제대로 된 교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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