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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의 공동체 (시 119:10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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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공동체 (시 119:103-108) 

목사님이 어느날 어느 자매의 가정을 심방했는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안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에서는 물소리도 나고 인기척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할 수 없이 문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라는 글을 써놓고 돌아왔습니다.
다음 주일날 그 자매를 만난 목사님이 연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자매는 얼굴이 발개지면서 “창세기 3장 10절을 보세요”하며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재빨리 성경을 들춰보았더니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라이만 비처가 지방에 설교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날은 폭풍이 극심하고 아주 추운 날씨였습니다. 악천후의 날씨 속에서도 말을 몰아서 작은 시골 예배당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한 명도 예배당에 오지 않았고 예배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겨우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비처는 그 한사람을 놓고 설교를 해야 할지 의문이 들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습니다. 오하이오 주를 여행하고 있던 비처 목사에게 한 낯선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20년 전 어떤 곳에서 한 사람을 놓고 설교하신 일을 기억하십니까?”  “네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 군요.”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때 목사님의 설교가 내 영혼을 구했고 저를 목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오하이오주 전역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그 결과 온 세상을 뒤바꾸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확신해야 할 것은 한 사람이라도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는다면 그 설교는 최고의 설교라는 것입니다.

지난 두 주일 교회는 예배 공동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이며 응답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감격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러 나아가며 하나님께서도 친히 오시어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되 특별히 말씀으로 만나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말씀이 중요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을 재미있게 분류한 것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수면파가 있습니다. - 부족한 잠을 교회에 와서 보충하는 사람들입니다.
초조파가 있습니다.  -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입니다.
채팅파가 있습니다.  - 옆 사람과 계속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입니다.
열독파가 있습니다.  - 예배시간 내내 주보만 읽고 또 읽는 사람들입니다.
동아리파가 있습니다.  - 예배 이후에 가질 모임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서당파가 있습니다.  - 설교 시간에 성경 일기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분석파가 있습니다.  - 설교 내용 따지느라 은혜를 까먹는 사람들입니다.
콩밭파가 있습니다.  - 눈은 목사님을 보고 있지만 마음을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패션파가 있습니다.  - 목사님의 복장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는 사람입니다.
편식파가 있습니다.  - 자기가 좋아하는 메시지가 나올 때만 아멘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파에 속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집중하고 말씀 속에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꿀보다 더 달다는 말씀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저의 장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답니다. 76세의 노모가 돋보기 너머로 읽어가는 성경 말씀을 읽으며 깨달은 것입니다. 말씀에 맛이 있습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집중하여 들으면 말씀의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맛은 기쁨을 줍니다. 말씀을 깨달을 때 얻는 기쁨입니다.

꿀은 아주 귀한 식품입니다. 꿀은 양식으로도 완벽할 뿐 아니라 치료의 능력과 효과도 탁월합니다. 꿀은 어떤 꽃에서 모았느냐에 따라 그 맛이 여러 가지입니다. 그리고 쓰여지는 용도도 다릅니다. 제가 목이 자주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밤 꿀을 먹으면 목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꿀에는 단 맛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맛, 쓴맛, 신맛, 덟은 맛, 모든 맛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맛은 사람의 몸에 유익하게 작용합니다. 쓴맛은 쓴맛대로, 신맛은 신맛대로 유익하여 좋은 작용을 합니다. 꿀 속에는 프로폴리스라는 성분이 들어있는데 그 성분은 사람의 면역력을 좋게 하고 세균과 나쁜 병균들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의학의 발달하여 좋은 약품들이 있어서 치료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거의 모든 병의 치료를 꿀에 의존하였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꿀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며 유익하고 또한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과도 같았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 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맛은 곧 말씀의 힘이요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 속에 어떤 힘과 능력이 있을까요? 이것을 맛으로 표현 하였는데요

1. 말씀의 맛(말씀의 힘과 능력)은 나를 강건하게 합니다.

"불가능합니다" 라고 하면 말씀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고 하십니다.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18:27)
"너무 지쳤어요" 라고 하면 말씀은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마11:28-30)" 라고 하십니다.
"아무도 나를 진정 사랑하지 않아요" 라고 하면 말씀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요13:34)" 라고 하십니다.
"더 이상 못해요" 라고 하면 말씀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12:9, 시91:15)" 라고 하십니다.
"앞이 캄캄해요" 라고 하면 말씀은 "내가 네 발을 인도하리라(잠3:5-6)" 라고 하십니다.
"저는 제 자신을 용서 못해요" 라고 하면 말씀은 "내가 너를 용서하리라(요일1:9, 롬8:1)" 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해나갈 수가 없어요" 라고 하면 "네 모든 필요를 채우마(빌4:19)" 라고 하십니다. "저는 항상 걱정이 많고 좌절해요" 라고 하면 "너의 염려를 내게 맡기라(벧전5:7)" 라고 하십니다.
"너무 외로워요" 라고 하면 "내가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리라(히13:5)"  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말씀은 나를 붙잡아 주고 강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위로를 받고 말씀에서 힘을 얻습니다.


2. 말씀의 맛(말씀의 힘과 능력)은 내 길을 비추어줍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할 때 말씀은 나의 가는 길을 인도해주십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캄캄한 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가운데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비추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 우리의 길을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말하기를 말씀은 우리 인생의 항로를 안내하는 나침반이라고 했습니다.

지난날 우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 ”
“아무 것도 모르니 나를 가르치소서. 어찌해야 좋을지 나를 가르치소서. ..... ”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 곳에 나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주님 나를 이끄소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의 길을 비추시고 인도해주시니 어찌가야 좋을지 더 이상 방황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 말씀하시는대로 순종하며 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3. 말씀의 맛(말씀의 힘과 능력)은 입술에 찬송과 감사가 넘치게 합니다.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고 위로와 능력을 힘입은 사람들은 마음의 즐거움을 얻고 평안과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그러기에 그 입술에 찬송과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111절)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164절)

시인은 고백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환란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143절)

찬송과 감사가 모든 일이 형통하고 평안하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 위로하고 힘을 주니 오히려 환란과 우환 가운데서도 찬송과 감사를 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참 맛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이 하나님께 올릴 찬송, 새 노래를 부르도록 우리를 이끌어주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캄캄한 밤에도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말씀 속에 있는 것입니다. 


4. 말씀의 맛(말씀의 힘과 능력)은 나를 변화시킵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106절)

지난날 거짓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음을 얻은 후로는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모든 거짓행위를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은 변화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모든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불이 되고 방망이”가 되는 것입니다.

고오찌 요시다로오는 소년은 17세 때 주인의 돈을 훔쳤었습니다. 그리고 18세 되던 해에는 주인의 아내와 불륜의 관계를 맺은 후 그녀를 죽이고 주인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청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결국은 체포되었고, 무기한의 비참한 감옥 생활은 시작되었는데.. 하루는 밤중에 꿈을 꾸는 데 뭔지 모를 환한 빛이 비취더니 하늘의 천사가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네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기 위해 왔다. 지금 내가 네게 보여 주는 성경을 읽고 말씀대로 행하여라.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천사는 고오찌 요시다로오에게 커다란 성경을 펼쳐 보여 주고는 곧 사라졌습니다.
며칠 후, 그는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도 두어 번 또 같은 꿈을 꾸었는데, 이후로 그의 마음에는 뭔지 모를 근심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민 끝에, 천사의 말대로 성경을 읽기로 하고, 곧 성경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일자 무식인 그는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읽기 위하여 동료 죄수들에게 그리고 간수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 그는 드디어 혼자서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밤낮으로 성경을 읽는데만 시간을 보냈습니다. 게다가 성경을 홀로 읽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모아놓고 읽어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교도소 안에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습니다. 성질이 나쁘고 악랄하기로 유명했던 고오찌 요시다로오의 변화는 물론이요, 그와 동일하게 무서운 죄를 저지른 죄인들이 하나 둘 변화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성경은 모든 죄수들의 공동 소유물로서 그들로부터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 안을 변화시킨 장본인이자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고오찌 요시다로오는 특사로 가출옥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하는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에 붙들린 사람들은 변화하였고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들로 승리하였습니다. 말씀의 맛 변화의 능력입니다.


5. 말씀의 맛(말씀의 힘과 능력)은 나를 성장시켜 줍니다.

말씀의 맛은 성장의 능력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은 성장합니다. 성장을 통해 번식하고  종적을 유지합니다.
육신적인 성장과 같이 영적인 성장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적인 성장을 해야 합니다. 밥을 먹으면 건강을 유지하고 자라듯이 성도들도 영의 양식인 말씀을 먹고 건강을 유지하며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씨는 싹을 틔워야 하고 새싹은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믿음의 씨앗이 싹을 내고 자라서 꽃과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5)

이 모든 일은 말씀을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과 권하는 것입니다. 곧 말씀으로 성장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생명의 씨입니다. 생명의 씨는 심겨지기만 하면 싹을 티우고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뿌려지느냐하는 것입니다.
길가에, 돌밭에, 가시덤불속에 뿌려지면 자랄 수 없습니다. 옥토에 뿌려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성장을 이루기 원한다면 우리의 심령을 옥토의 밭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 밭을 옥토의 심령으로 가꾸십시오.
그리하면 말씀의 진정한 맛, 성장케 하시는 말씀의 능력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6. 말씀의 맛(말씀의 힘과 능력)은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변화, 성장, 성숙 이것은 함께 진행되어야 하는 연결된 것이며 동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마침내 이루어야 할 것은 말씀으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말씀의 맛이 바로 성숙이기 때문입니다. 성숙은 구별된 거룩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딤전4:5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짐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딤후3:16-17에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성도의 삶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성숙한 성도는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기쁨을 주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성도는 사랑으로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성도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고전13:11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죄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말씀으로 변화되어 성장하고 성숙한 성도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의 맛(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6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1. 나를 강건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2. 나를 인도해주시는 말씀입니다.
3. 나를 환란과 우환 중에도 찬송할 수 있게 하는 말씀입니다.
4. 나를 변화시키는 말씀입니다.
5, 나를 성장케 하는 말씀입니다.
6. 나를 성숙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말씀을 사모하고 많이 읽고 듣는 일에 열심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들을 때 집중하여 듣고 말씀 속에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참 맛, 말씀의 힘과 능력을 알고 그 말씀의 힘과 능력으로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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