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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진실 (암 5:4-8, 요일 4:7-12, 막 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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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진실  (암 아모스 5:4-8, 요일 4:7-12, 막 3:31-35)
 
오늘 성경말씀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살아가면서 사랑과 증오가 교차되는데 오늘이야기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요한1서에서 사랑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 이십니다.

저는 이 말씀이 아주 단순한 선언문 같으면서도 중요한 시사성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 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랑의 일입니다. 하나님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사랑 이야기를 계속해서 성경말씀 전체에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믿어왔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축복은 하나님의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모스서를 읽어 봤더니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합니다. 내가 그토록 그대 백성들을 사랑해서 나와 사랑을 나누었던 곳 사랑을 약속했던 곳 세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약속을 했던 사랑의 장소, 사랑의 보금자리 세 곳에서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겠다. 사랑하는 하나님이 우리한테 주시는 청천병력 같은 얘기입니다. 첫 번째 베델이라 이름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야곱이 형님과 싸우다가 도망가는 길인데 중간에서 밤에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야곱에게 약속을 준 곳. 아침에 일어나서 야곱이 너무 고마워서 돌로 단을 쌓고 회개하고 그곳에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했습니다. 베델. 하나님의 집.

그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가운데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서 예배하는 것 말고 그 이전부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로 베델이라는 곳을 가장 성지와 비슷한 예배장소를 얘기했습니다. 베델은 누구나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곳 이었습니다. 아모스 말씀입니다.

베델에 갔더니 이제는 너무 타락하고 아무리 식민지 삶이라고 해도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고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지 않고 불의가 횡행하니 나는 그런 곳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다. 나 여호와 하나님 베델을 떠난다. 나를 베델로 만나러 오면 나는 없다. 베델이 공동화 되는 현상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베델에 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이방 쪽 이면서 동시에 불의한 백성들이 오기 때문에 나는 베델에 있지 않겠다. 베델이 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제가 제 가슴속에 베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니 저한테 오십시오. 베델 이란 이름은 없다.

하나님의 집은 더 이상 한 곳에 정착하고 싶지 않다. 베델은 타락했다 망했다. 베델에 가지 마라. 두 번째 아모스 선지자가 선언 합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지금 가나안 땅에 막 들어가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가야 가나안땅에 진입하는데 강물이 너무 넘쳐 들어갈 수 없어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기적과 같은 역사를 베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 건너갈 수 있도록 요단강 물이 말랐습니다. 길이 생긴 겁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출애굽 할 때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 광야로 올 수 있었던 것처럼 똑같은 기적의 역사가 가나안 입성할 때 생겼습니다. 요단강 물이 갈라졌습니다. 사람들이 강물을 건너서 첫 번 발을 디딘 곳. 너무 감격스러워서 여호수아가 백성들 모아놓고 이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기념하고 만나자. 그곳 이름이 길갈입니다.

이곳에 단을 쌓고 유대교 전통대로 할례를 베풀고 또 유대교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밤에 짐승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우린 유대 백성입니다 라고 표시하던 그 유월절 예배를 드리고 출애굽, 가나안 입성 똑같은 뜻입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곳에 오면 하나님을 만난다. 첫발을 디뎠던 곳. 우리 한국에서도 선교사들이 와서 인천 앞 바다에 첫발을 디딘 적이 1884년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가 둘이 배에서 똑같이 뛰어내렸다.

그래서 그 해를 성스러운 기념일로 지킬 정도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강을 건너서 첫 번째 발을 디뎠던 곳. 길갈. 그곳에 하나님을 위한 예배장소를 만들자. 하나님의 사랑이 그곳에 있다. 성지입니다. 아모스 선언입니다. 길갈은 타락했다. 하나님은 없고 우상이 대신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도 필요 없다. 길갈로 가지 마라.

세 번째 야곱의 조상, 여호수아의 조상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한 곳이 있는데 그곳은 어떤 곳이냐 하면 처음에 아브라함이 가족을 이끌고 지금 블레셋이라 이름 하는 땅에 왔는데 사막을 건너왔기 때문에 물이 필요합니다.

우물 하나를 팠습니다. 팠더니 그 블레셋에 있는 왕의 신하들이 와서 우물을 탈취해 갔습니다. 그래서 왕한테 한 얘기입니다. 제가 판 우물을 제 가족에게 주시면 암양 7필을 드리겠습니다. 계약입니다. 우물 하나를 쌓은 곳이 있는데 그곳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이 생겨난 고향 원적지입니다.

그곳을 브엘세바 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영원한 샘물 그런 뜻입니다.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아브라함이 첫 번으로 선민이 된 원조를 만들었던 곳. 샘물 브엘세바. 그곳에 가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얼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 곳이 예배하는 곳입니다.

아모스의 예언입니다. 베델 폐기, 길갈 폐기, 아브라함이 만든 곳도 폐기. 하나님은 특정한 곳에 존재하지 않겠다. 나를 화석화 시키고 나를 묶어놓고 동시에 그곳에 나 대신에 우상을 가져다 놓은 백성들아 나는 살아가고 싶지 않다. 그 선언입니다. 사실은 우린 하나님을 제 성에 모시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을 특정 건물에 모시고 싶어 하기도 하고 특정한 곳에 모시고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제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저는 제 속이 제 입이 제 손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이렇게 믿을 때 저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보고 나는 너를 떠난다. 네 삶을 떠난다. 저는 빈 껍질 일겁니다.

하나님이 떠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떠났다는 말입니다. 최근 역사 이야기 하나 드리겠습니다. 몇 백 년 전의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터키를 여행하시면서 이스탄불에 가시면 교회가 자랑하는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바티칸에 성 베드로 성당과 맞먹을 정도로 위대한 역사를 지닌 성당이 성소피아 성당입니다. 이 성당은 콘스탄틴 황제가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교회를 세웠을 때 대표적인 성당으로 만든 곳이 성소피아 성당입니다.

이 성당이 시간이 흐르면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갈등 때문에 오스만투르크의 손에 들어가면서 기독교적인 성당이 회교도 사원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어 이 성당에 시멘트를 바르고 못을 박고 먹칠해 버리고 하나님이 계시는 성당을 박물관으로 박제화 시켜버렸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여행하시면 박물관으로 변한 성소피아 성당을 보실 겁니다. 비극인데요, 하나님이 떠나셨습니까? 그랬더니 정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은 어느 장소에 메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 시작했던 교회가 이교도의 박물관이 됐습니다. 그러나 터키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본래 우리 것이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얘기를 한 이유는 러시아 얘기 잠깐 드리려고 합니다.

러시아는 예나 지금이나 정교회가 국교입니다. 공산치하에서 고생할 때 힘이 들었지만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정교회를 국교로 가질 정도로 러시아는 정교회 전통이 강합니다. 어떻게 국교가 됐느냐 하는 얘기 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본래 러시아 사람들이 기독교인 이 된 게 아니고 러시아와 인접한 스칸디나비아,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사람들이 먼저 예수를 믿고 러시아에 내려와서 거기서 전도를 시작을 했는데 그 당시 여왕 이름이 올가 라는 여왕이었는데 전도를 받고 옛날 얘기입니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주교님한테 세례를 받고 여왕이 기독교 신자가 됐습니다. 그러면서 여왕이 키예프란 도시를 수도로 삼으며 무슨 결단을 했냐하면 나한테 세례 준 주교님이 믿는 기독교를 국교로 하고 싶은데 좀 힘이 들어서 시일을 두고 미루다가 이 여왕의 아들이 나오는데 아들이 이슬람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국교가 실패했는데 손자가 다시 왕통을 이으면서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국교화 하기로 하고 신하들을 전 세계에 보냈습니다. 왜 보냈냐하면 우리 할머니가 기독교를 좋아하셨다는데 객관적으로 검토해보고 보고서를 만들어라. 첫 번째 보고서는 이슬람 사원을 다녀온 사람들 보고입니다.

우화 같은 얘기를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이슬람이 국교가 되면 술을 못 마십니다. 이 왕이 나는 술을 좋아하는데 술을 못 마시면 안 되겠다. 유대교 성지를 보고 온 신하가 유태인이 되지 않으면 유대교가 되지 않는답니다. 유태인으로 국적을 다 바꿔야 된답니다. 그건 안 되겠다.

로마가톨릭 보고 온 보고 속에 예식이 있는데 너무 단조롭고 권위주의 적입니다. 그래서 그것도 싫다. 소피아 성을 보고 온 사람들의 보고 가운데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성당에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지금 우리가 하늘에 왔는지 땅에 있는지 분간 못하겠습니다. 너무 아름답고 황홀해서요.

지상에서 만든 최고의 예술적 건물인걸 보고 우리는 보고 온 느낌을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아름다움, 화려함 모든 것의 조합입니다. 그 종교 이름이 뭐냐? 정교회입니다. 러시아도 정교회로 하자. 말하자면 소피아 성당의 내면적 우화 중에 하나입니다. 이 성당이 지금은 철문으로 덮여져 있고 쇠못이 박혀있습니다.

정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러 소피아 성당에 가야하지만 갈수가 없어서 다시 말을 바꾸었습니다. 소피아 성당은 우리 가슴속에 있다. 소피아 성당은 이스탄불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모스크바에 있다. 그래서 모스크바가 중심지가 된 우화를 알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 하시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던 베델. 그런데 베델에 오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떠난다.

길갈. 여호수아 통해서 가나안 입성이라는 대역사가 시작된 곳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전파되지 않는 곳이면 하나님은 떠난다. 브엘세바. 아브라함이란 믿음의 조상의 원적지를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자기 뜻이 선포되지 않고 우상이 지배하는 원적지도 떠난다. 가정도 민족도 신앙의 역사도 하나님은 기꺼이 떠난다.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고 싶은 백성이 없음으로 하나님은 떠나신다.

소피아 성당도 떠난다. 혹시 하나님이 오늘 우리 하나님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이 아름다운 성전을 하나님이 떠나시겠다고 하면 어쩌나. 빈껍데기만 남지 않습니까? 우리가 모여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목적은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당신 사랑하고 싶습니다.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언어로 찬송으로 기도로 하나님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담고 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공의를 이 땅에 선포하고 실천하고 싶습니다. 그 결단하시면 하나님이 안 떠나겠다. 그게 없으면 무슨 소리가 있더라도 나는 떠난다. 너희끼리 만나라. 혹시 우리 교회는 길갈이 아니길 바라고 브엘세바 아니기를 바라고 성 소피아성당도 아니기를 바라고 또 베델도 아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는 곳은 생명이 없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세상이 각박하여 하나님이 있을 곳이 없어서 하나님이 결단을 하십니다. 나대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은 고사하고 불의와 좌절이 있는 세상 어떻게 하면 구해서 내가 다시 만날까. 하나님의 계획은 내 아들을 보내자.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냈습니다.

세상이 요구해서 보낸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고 싶어서 보냈습니다. 세상의 뜻이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이 자기 결단으로 자기아들을 보내서 죽음으로서 죄를 사해주고 부활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대목입니다.

사랑이 뭔지 아십니까? 사랑의 진실은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 요구와 상관없이 자기가 너무 사랑하는 백성들 구원하시려고 자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세상에 자의로 보내셨습니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을 구원시켰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요한1서의 말씀입니다.

사랑의 진실은 사랑합시다가 아니고 하나님 스스로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목적은 하나님이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얻고 싶어서였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사랑의 진실이 있는 곳에 우리는 살아있는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을 찾으셔서 만나면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면 사랑하세요. 요한1서의 말씀입니다. 사랑하세요. 어디서 사랑하면 됩니까?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냈으므로 하나님은 사랑을 받은 당신들 끼리 사랑이 나누어지는 곳이면 하나님은 가겠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 하나님이 계시겠습니다. 요한1서의 말씀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 하나님은 안계십니다. 사랑을 어떻게 나누며 살아갑니까? 사랑이란 진실로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이 오시고 우리 역사해주시고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기본 조건이 사랑입니다. 사랑하고 사시지요. 결혼도 하시지요. 자식과 부모 세상이 모든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랑하면 하나님이 계신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무슨 역사가 일어납니까? 첫째로 사랑의 진실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POWER 입니다. 미국의 역사 중에 하나는 백인의 지배사회 속에서 흑인들이 고통당하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옛날 흑인 해방을 위해서 노력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미국이 존경을 받아서 그분이 죽은 날이 국경일입니다.

그런데 킹 목사가 마지막 순교하기 직전에 읊은 시가 하나 있습니다. 내가 VISION을 보았는데 흑인과 백인이 함께 뛰노는 세상. 손잡고 찬송하는 세상을 내가 꿈에 그렸습니다. 그 꿈이 현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연설했습니다.

흑백이 함께 손잡고 노는 세상. 별것 아닌 얘기 같은데 그게 이 사람이 그린 꿈, VISION을 얘기했습니다. 정치인의 얘기 같아 안됐지만 최근에 오바마란 사람이 한 얘기 중에 제 가슴을 울린 구절이 있습니다. 아마 흑인인 킹 목사의 얘기를 대신 한 것 같습니다. 우리 흑인은 백인이 지배하는 미국을 저주하면서 살고 싶은 생각을 이제는 버리겠습니다.

우리 흑인은 우리가 대표하는 미국으로 다시 만들고 미국의 대표자로 다시 살고 싶습니다. 정치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말의 뒤 속에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고난과 아픔과 실망과 저주를 언제까지 곱씹으며 분노 속에 살라는 겁니까? 언제까지 분노 속에 살라는 겁니까? 아니 우리가 분노하는 미국을 우리가 삼키고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대표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미국의 대표자로 살겠습니다.

VISION 치고는 굉장한 VISION입니다. 미국 얘기 아니고 오늘 우리에게 돌아가겠습니다. 혹시 우리 살아가면서 분노하며 사는 기억 없습니까? 좌절이 화석화 된 것 아닙니까? 분노와 좌절감. 뭔가 우리가 피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분명한 분노가 있을 겁니다. 개인의 분노 억울함, 미움, 증오. 언제까지 꽁꽁 끌어안고 사시렵니까? 예수님의 사랑이란 말씀은 이렇습니다.

사랑이 오면 그런 방식으로 살면 안 된다. 아니 저주하고 싶은 우리 삶을 계속 저주하는 게 아니라 저주하고 싶은 삶을 씹어 먹던 삼켜먹던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서 내가 살고 싶다. 사랑의 파워는 뭐냐 하면 세상을 변화시키되 저주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소화해서 음식 만들어서 내가 저주하는 그 대상을 내가 대표하면서 살겠습니다.

정치인의 얘기를 넘어서서 예수께서는 저주하며 살지 말고 사랑하며 이기며 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근데 예수님이 중요한 얘기를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여러 가지 중에 당시 상황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와서 왼뺨을 때리면 왜 때려 하고 분노 속에 평생을 살지 말고 오른쪽까지 주면서 잊어라.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시 로마 시민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한대 치면 반항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분노와 좌절. 그대로 계속 살아봐야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건 당한 서러움 이고 오른쪽 뺨을 대주는 것은 내가 분노로 살게 아니라 내가 분노를 이기고 삼키는 방식으로 살 테니 내 오른편도 때려라. 하고 스스로 얘기하면 로마사람은 치지 못합니다. 맞을 때는 종으로 맞았고 오른쪽 뺨 댈 때는 주인으로서 해왔습니다.

거룩한 분노, 사랑의 분노라고 표현합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5리를 짐 들고 가달라고 하면 그것은 힘없는 유대백성이 걸머져야할 종 된 분노입니다. 그 다음 부터는 분노가지고 살게 아니라 분노는 없어질게 아니므로 그 다음부턴 이렇게 얘기하라. 내가 10리를 갈 테니 짐 주십시오.

6리부터는 네가 주인이다. 오리까지는 분노와 미움으로 살았지만 6리부터는 분노를 극복하는 차원 높은 사랑의 분노를 통해서 5리 까지 왔던 것도 다 삼키고 10리 까지 가서 사랑으로 이겨라.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은 생명을 줍니다.

사랑은 지는 게 아니라 반드시 이깁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기느냐. 십자가 방식으로 죽는 것 같지만 부활 이라는 방식으로 분노와 좌절을 삼키고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사랑의 POWER입니다. 지고 싶습니까? 이기고 살고 싶습니까? 어떤 방식으로 이기며 살 수 있느냐. 사랑의 방식으로 이길 수 있답니다. 나는 저주하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주를 삼키고 저주 대신 내가 사랑하며 내가 사랑을 베풀며 내가 사랑으로 지도하며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분노로 질질 끌려 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사랑하며 이끌며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주셨던 방식대로요. 그래서 십자가란 죽고 좌절하는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부활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주인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리더를 만들어내는 생명의 장소입니다.

그곳에 사랑의 진실이 담겨있습니다. 사랑은 POWERFUL 합니다. 이 사실을 믿으며 주님의 사랑을 믿읍시다. 하나님을 거기서 만나라고 하십니다. 수많은 좌절을 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갑니까?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12지파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1지파인 요셉이 팔려갔다 팔림 받은 요셉이 나머지 11지파로 구성된 형제자매를 다 구한 사건이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예수에게도 열두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제자는 예수까지 팔아버렸습니다. 사랑을 배반했습니다. 그 예수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팔린 예수는 십자가에 죽고 죽음까지도 죽이고 좌절도 죽이고 고난도 죽이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란 이름의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롯 유다는 갔다. 좌절도 분노도 배신도 갔다. 남은 한자리 예수님이 지금 공개 모집합니다. 개방직 자리 하나 마련해 놨으니 신청하세요. 이 자리에 오면 나와 함께 십자가의 고난을 받읍시다.

그리고 나와 함께 죽음까지도 이기고 나와 함께 승리의 부활의 행진에 동참하십시다. 여러분 예수 믿는 목적이 뭐냐 하면 개방직에 도전하는 길입니다. 이 자리를 무한대로 열어놨으니 이곳에 와서 나와 함께 이 길을 갑시다.

사랑은 주는데서 생깁니다. 사랑은 승리하는 생명의 창출이 사랑의 본질이고 그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와 함께 이 사랑을 우리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여러분이, 우리 교회가, 우리 자신들이 사랑의 화신이 되어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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