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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수되는 믿음 (딤후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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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되는 믿음 (딤후2:1-2)

[1] ♠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2] ♠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저는 1.5세이지만, 한국 교회와 한국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한국 교회의 영성과 그 희생적인 신앙을 존경하고 아름답게 여겨 왔다. 그리고 그 영성과 신앙이 다음 세대로 전수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3 세대가 함께 하는 비전예배를 드리고 있고 Holy Wave 영어 예배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유산을 반드시 다음 세대에게 전수해야만 한다. 나는 한국 교회와 모국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지난 달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탈레반 인질사태를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특별히 한국 교회를 참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반응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더욱 컸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당시에 한국내의 반대 목소리가 심각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를 향한 반대 목소리이기도 했다. 어떻게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에 대한 반대가 이처럼 극심할 수 있을까? 이것은 참으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한 가지 느껴지는 것이 있었는데, 그동안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에 덕을 세우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에 수많은 기여를 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난 10-20년 동안, 교회로 인해서 한국 사회가 아픔을 많이 느낀 면도 있는 것 같았다.

(2)또한 한국 교회를 대표할 만한 한 목소리가 없었다. 한국 교회가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누군가 이 상황을 인도할 수 있었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하나되지 못했다. 미국에서 9.11사태가 발생했을 때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가 모든 교회의 대표로 일어났다. 그리고 교회의 대표자로서, 우리들이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 지, 어떠한 메시지를 붙잡아야 하는 지 등등, 시대에 필요한 목소리를 내주었다. 또한 존 화이퍼 목사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지 말고 그 분의 주권을 붙잡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물론 우리는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읽을 수는 없지만 이러한 목소리는 National voice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러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3)당시에, 사건이 발생되고 1-3주 동안, 한국 교회는 너무도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목소리만을 내고 있었다. 그 때에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자’라고 하는 일관성 있는 목소리가 있었어야만 했다. 아프카니스탄은 선교의 마지막 frontier이고, 바로 그곳에 한국인의 순교의 피가 흘렀다. 이것은 분명히 슬픈 일이지만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 중심으로 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전의 섭리를 대변하고 그 분의 역사를 선포할 수 있었어야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우리는 이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 국민의 25-30%에 이른다. 그러나 영적인 힘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숫자보다는 영적인 힘이 더욱 중요하다. 많은 숫자보다는 하나님 편에 서서 철저히 훈련받는 사람들… 이들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환영하였고 그들을 영접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확고한 12명의 제자를 세우는 일에 전심으로 노력하셨다. 숫자의 상식을 뛰어넘은 가장 엄청난 역사는 기드온의 역사였다. 그들에게는 정말로 숫자가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에 32,000명의 이스라엘 군사가 상대할 미디안 군사의 숫자는 무려 135,000명이었다. 대략 1대4의 ratio였다. 현대의 군사 전략가들의 말에 따르면, 방어는 1대4의 비율로 가능한지만 공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뜻 밖의 말씀을 하셨다. 32,000명의 군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렵워 떠는 군사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셨다. 그러니 22,000명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대4의 ratio가 1대13의 ratio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도 많다고 하셨다. 그리고 물가에서 물을 마실 때에 두 손을 모아서 마시는 군사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남은 군사의 수가 300명이 되었다. 이제는 1대450의ratio가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300명의 군사들이 전쟁을 치르게 하셨고 엄청난 승리를 이루게 하셨다. 하나님께는 숫자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필요한 것은 정말로 무장된 신실한 백성들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긴장을 잃지 않고 준비된 자들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다.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지난 100년 간, 한국 교회에는 엄청난 부흥이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교회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숫자만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숫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도 그랬다. 이제 우리는 교회를 다시 바라다 보아야 한다. 한국 교회를 말하는 것은 이민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같다. 한국 교회의 고통은 우리 이민 교회의 고통이기도 하다.

이번 주와 다음 주의 설교는 특별히 훈련사역에 대한 내용이다. 지금은 많은 숫자를 말할 때가 아니라 오직 훈련된 하나님의 제자를 이야기 할 때이기 때문이다. 즉, ‘Different Maker’, 뭔가를 break-thru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양성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둡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동안 우리는 훈련을 너무 막연하게 생각해 온 것이 아닌가? 우리 교회의 전통으로 여기며 달려온 것이 아닌가? 나 자신부터 부끄러움을 느낀다. 주님이 우리에게 출정명령을 내리신다면 우리는 자신있게 뛰어 나가서 탈레반과 같은 사람들을 상대로 하여 영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물어보실 때에 우리는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주와 다음 주의 설교를 통해서 소망을 키워 나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있게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훈련을 통해서 제자를 양육하는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께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다. 마가복음 3:13-14을 보자.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때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산에 오르시어 12명의 제자들을 세우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다.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가르치셨다.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고, 말씀은 어떻게 읽는 것이고, 전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고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 것이며 귀신은 어떻게 쫓아내는 것인가 등등… 주님은 당신의 삶을 통해서 그들을 친히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들을 따로 세우시고 전도하도록 친히 commission(위임)하셨다. 그리고 훈련받은 제자들을 보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사용하셨다. 전도가 주된 목적이었다. 또한 그들에게 권세를 주셔서 마귀를 쫓아내게 하셨다. 그들에게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하늘의 권세를 주신 것이다. 우리는 각각 하나님의 교회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각의 교회에게 음부의 권세를 이길 힘을 주셨다. 주님께서는 시간을 가지시고 제자들은 키우고 양육하시며 하늘의 권세를 주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권면을 주시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라고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들도 가서 그들을 제자 삼으라’고 하셨다.

복음서에서의 제자도에 대한 focus는 사도행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행 6:1을 보자.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당시에는 회심한 성도들을 ‘제자’라고 불렀다. 그들은 회심자나 성도나 신자로 불리우지 않았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믿는 자는 단순한 교인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는 오직 ‘제자’라고 불리웠다. 행 11:26절을 보자.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 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제자들은 안디옥 교회 때에 와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그들이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기 시작하였지만 그들은 제자됨이 먼저였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모든 자가 제자이다. 행 14:22을 보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하고’  사도 바울이 안디옥을 다시 방문했을 때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을 보면 당시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모두 제자라고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이후, 사도행전에서는 모든 믿는 사람들을 제자라고 불렀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통해서, 유럽에 여러 지역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바울은 이들에게 많은 서신을 보낸다. 특별히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는 그곳의 목회자들에게 보낸 서신들이다. 오늘 본문은 젊은 목회자들이 목회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말한 귀한 서신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에게 전수한 믿음을 삶의 훈련을 통해서 다시 전수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또다시 전수하기를 원하였다. 바울은 목회자들이 훈련하지 못하면 그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같이 전수되는 믿음이 지속되어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다. 물론 교회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곳이고, 치유하고, 성도간 교제를 하는 곳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영적 군사들을 양육하고 훈련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것을 못하면 하나님의 교회로서 그만큼 역할을 할 수 없다. 음부의 권세를 이길 힘을 주셨는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훈련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예배가 살아있고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며 교제가 지속된다고 해도, 음부의 권세를 부수어 버릴 수 있는 300명의 기드온 군사를 양성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가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늘의 왕을 섬기는 군사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아니신가? 어찌 철저한 훈련없이 우리의 왕을 섬길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 없다.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은 훈련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만큼 훈련은 중요하다. 훈련은 특별한 사람들만 받는 것이다 아니다. 골로새서 1:28-29을 보자.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사람을 세운다면 그것은 믿는 모든 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각 사람을 완전하게 세우기 위해서 그 각 사람은 훈련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고, 이를 다시 전수해야 한다. 이같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의 훈련을 통해서 제자가 된다. 혹여, 힘든 이민 생활 중에 어떻게 훈련을 받을 수 있느냐고 의심하지 말기를 바란다. 훈련은 주님께서 하시는 사역이며, 우리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과정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과 환경을 탓할 수 없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시니 순종할 뿐이다.

이미 훈련을 훈련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훈련이 끝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어떤 목사의 제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평생동안 지속되어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참으로 간사한 인간들이다. 훈련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간사병에 걸리고 만다. 훈련은 평생동안 받는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새일꾼반을 모집하고 있다. 우리 교회에 새로 온 분들은 새가족반을 마치고 새 가족이 된다. 야구에서 1루까지 나갔다면 2루로 가야할 것이 아닌가? 그것이 새일꾼반인데 보통은 1대1 내지 1대5 정도의 소그룹으로 나뉘어서 기도하며 말씀을 나누는 훈련과정이다. 이것은 교회의 체면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인원은 이미 넘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속해야만 한다.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자라가야 한다. 새일꾼반을 수료한 사람들의 수많은 간증들이 있다. 자신의 영적인 성장이 있고, 가정이 회복되고, 사업이 자리를 잡고, 건강이 회복되는 등 수많은 간증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3루까지 가야한다. 그것은 바로 제자반이다. 목회자들과 1대12 정도의 인원으로 진행되는데, 험청난 영적인 다이나믹이 있다. 제자반을 통해서 우리는 평생의 믿음의 방향이 잡을 수 있다. 금년도에 시작하지 못하는 성도들은 내년에 다시 도전할 수 있고 올해는 다른 평신도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중요한 것을 잊지 말자.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군사를 일으키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는 말씀 앞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은혜로만 가능하다. 결단, 능력, 가르침은 한계가 있고 은혜가 있을 때에 온전한 훈련의 꽃을 피울 수 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출정명령을 주실 때에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들 중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자녀들 중에서 300명의 정예군사가 많이 나와야 한다. 주님이 멈추라고 훈련 휘슬을 불 때에 우리는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멈추고 주님의 명령을 기다릴 수 있는 순종의 종들이 되어야 한다. 기억하자. ‘Fitted for the King’ 목말라서 죽는 한이 있어도 그 자리에 멈출 수 있는 제자다운 참제자들이 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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