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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 (갈 5: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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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
성경 : 갈5:16-25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지난 주 부터 계속해서 왜 훈련이 필요한지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다. 훈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지난 주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전수해야 한다는 설교 말씀을 나누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음과 뜻을 전수하며 제자를 세우셨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더라도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또다른 제자들를 세웠다. 초대 교회의 중요한 패턴은 이같이 제자를 세우는 일이었다. 이후에 서신서에서도 그들은 제자도의 전수를 강조하였다. 지난 주에 나눈 디모데후서 2장을 보면, 바울이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준 권면의 말씀이 나온다. 목회자는 성도들로 제자를 삼아야 하고 또 그들은 다른 성도들로 다시 제자를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전수되는 사역이 바로 교회의 사역이다. 이러한 면에서, 제자훈련이 우리 교회의 전통이며 system의 일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늘은 우리가 왜 제자훈련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성령의 측면에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자. 그 이유는 우리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 안에는 성령이 임하신다. 고린도전서 12:3을 보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들이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셨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임하신 성령을 좇아서 살고, 사모하고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 분과 발을 맞추어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피아노를 친다고 모두가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레슨과 과정을 마쳐야 하고 자신의 음악을 준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일은 일생일대의 감동이며 크게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다른 감동이다. 우리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려면 옛 사람의 모습을 버리고 마음을 새롭게하여 성령을 좇아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훈련이다. 나의 옛 모습, 나의 구습, 그리고 나쁜 습관들을 버리기 위해서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더 깊이 기도하고, 전도와 선교에 전심을 다할 때에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과 성령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요한복음 4:17을 보자.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게 될 것이고 그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요엘 2:28-29을 보자.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은 단순한 영향력이 아니다. 그리고 부어주신다는 것에 주목하자. 그로 인해서 자녀들이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이 이상을 보고, 그리고 늙은이들이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때는 분명히 성령의 때이다. 지금은 성령과 함께 사역하는 때이다. 사도행전 1:8을 보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우리는 성령이 임하시고 권능을 받을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는가? 목회자인가? 아니면 평신도 지도자들인가? 아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성령을 따라 살며 그 분과 동행하기 위해서 제자훈련을 받는 것이다.

70년 대에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쇼코이 요코이라는 일본 할아버지였다. 그 사람은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고 나서 곧바로 동굴 속에 숨어 버렸다. 일본인들은 모두 물러갔고 미군이 그곳을 점령하게 되었지만, 쇼코이 요코이는 30년동안을 은둔하여 살았다. 그 사람은 참으로 들쥐와 같이 살았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렇게 보고 계신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참 구원을 받은 자들인데 아직까지 우리의 신분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서 은둔하여 살고 있지나 않은가? 우리는 단순히 믿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셨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는데 아직도 우리는 옛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나 않은가? 이제 우리는 왜 훈련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아보자. 이것은 미룰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감당해야하는 소명인 것이다.

(1)우리 앞에 충돌되는 두 가지 길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길은 없다. 오직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오늘 말씀의 16절을 보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좇아 행함과 육체를 좇아 행함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17절은 좀 더 노골적인 비교를 하고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두 길이 서로 거스리고 대적하고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역시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길이 아니면 저 길 뿐이다. ‘대강 살겠다’라는 생각은 할 수 없다.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이것을 보더라도 다른 어떠한 관계보다도 나를 더욱 절대적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가 미지근하니 토해내치겠다고 하셨다. 미지근한 것은 먹기에도 힘들다. 우리는 어중간한 곳에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중간 지대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성령의 길이 아니면 육신의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더욱 기도와 말씀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2)어느 쪽이든 우리를 지배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19-21절을 보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처음 3가지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이다. 즉, 성적인 일이다. 성적인 유혹은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요셉처럼 우리도 단호하게 잘라버릴 수 있어야 한다. 단호하게 잘라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성적인 유혹에 넘어지게 되고 이성을 잃게 된다. 목회자도 예외일 수 없다. 목회가가 넘어지면 그의 목회는 물론이고 가정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 문제이다. 그들은 아무리 이야기하고 권면해도 돌이키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이 재앙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이냐고 물으면, 알면서도 이 재앙으로부터 돌이키지 못한다.
-우상 숭배와 술수이다. 이단에 빠지면 지배를 당한다. 훈련을 통해서 말씀 위에 든든히 서 있어야 한다. 진리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단에 빠지게 된다.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이다. 서로 분쟁하면 한도 끝도 없이 분리되어 간다. 다 망가지고 만다. 손해보는 것은 오직 주님 뿐이시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지배를 당하게 된다. 오직 성령의 하나되는 것을 지켜 행할 수 있어야 한다. 분쟁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법에 호소하거나 소송을 걸면 참으로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술 취함과 방탕함이다. 자제할 수 없고 곧바로 지배를 당하는 일이다.

그리고 반대쪽에 있는 것들을 살펴보자. 22-23절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나무가 심기우면 열매는 반드시 열리게 되어있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안에서 마음껏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시면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가 열리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금할 법이 없다는 것이다. 성령의 지배인가? 육신의 지배인가? 그러니 아직도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 선택의 issue인가? 마약이 선택의 issue인가? 아니다.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마약은 선택의 issue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지만 성령의 사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어찌해야 하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피 값을 지불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런데 적당히 할 수 있겠는가? 적당히 하다보면 우리의 영성이 망가지고 영적인 삶이 망가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선택의 issue가 아님을 다시 명심하자. 그래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옛 것과 구습을 벗어버리자.

(3)상극되는 결과를 주목해야 한다. 생명과 사망의 대결이 아닌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는 공유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로마서의 small vers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마서 8:5-6을 보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생각이 중요하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성령의 생각은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없다. 만약에 회색지대(gray area)가 있다면 대충해도 되겠지만 애초부터 그런 것은 없었다. 우리는 생명을 택할 수 밖에 없다. 비행기 승무원들이 사고시 대처 방법을 매번 같은 말로 반복하는 것을 보자. 그 누구도 주위 깊게 듣지 않지만 그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아 놓은 듯 율동과 함께 열심히 설명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생명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에 관련된 것은 상대방이 듣든지 안 듣든지 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말씀하신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죽음의 일, 상극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은 필수 과제이다. 따라서 훈련도 필수이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라면 무조건 해야 한다. 하지 말라도 해야 한다. 성령의 사람을 만드는 제자훈련을 미룰 수 없다. 대강 대강 해서도 안되고 이를 인정해서도 안된다.

주님의 교회는 이 issue를 가볍게 다룰 수 없다. 교회가 살아있으려면 교회는 이 issue를 반드시 심각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이것은 건물과 간판이 있다하여도 죽은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모형이 있어도 죽은 자 일 수 있다. 교회의 모형이 있고, profile도 있고, system이 있어도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에스겔이 환상 속에서 마른 뼈를 보았다. 그들은 완전히 죽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근육과 살이 생기고 모형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오직 모형뿐이다. 그러나 생기, 즉 성령이 임하시는 순간에 생명이 생기고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마네킹같은 존재라도 여호와의 군대가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군사의 모습이다. 우리들은 주의 권능을 받아서 땅 끝에 이르기까지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인 줄 안다. 그러나 의사가 ‘이렇게 안하면 죽는다’라는 말을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영적인 죽음이 임하다는데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를 살리고, 자녀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며, 교회를 살리는 일인데 어떻게 대강 말할 수 있는가? 24절을 보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놓지 못한 일들, 우리는 단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우리 함께 부르짖자. 온전하지 못하고 늘 반만 드리는 우리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자. 생명의 길을 걷고 성령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자. ‘찾으라, 구하라, 두드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늘 간구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이 마지막 때에 우리 삼 세대가 함께 움직이며 훈련을 받아 성령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며 마지막 시대를 break thru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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