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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들레헴의 하나님 (룻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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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룻1 : 1 - 22절                 
제  목 : 베들레헴의 하나님

10개월 동안 21명을 살해한 엽기적인 연쇄살인범 유영철과
    한국만화사의 거인 이 현세 씨와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둘 다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유영철은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많아서 화가가 되려고 했던 꿈이 있었는데
  색맹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예고 입학을 접고 그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유 영철이 이 현세의 만화를 굉장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현세 씨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마는 자신이 색맹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거기서 포기하지 아니하고 만화가란 굳이 색칠을 하지 않아도
    길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부지런히 펜화를 연습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생이 한계상황에 부딪힐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 에 따라 인생길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를 통해 우리는 기업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과
  또 기업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어지는 사사기는
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서
  안식을 누리는데 실패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오늘 살펴볼 룻기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 백성이 어떻게 하면 안식을 누릴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내일의 가족들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룻기서가 기록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1. 룻기서의 배경을 말해보세요(1절)

1절 [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
사사시대란 여호수아 사후 첫 사사 웃니엘로부터 사울 왕이 등장하기 직전
        사무엘 시대까지를 사사 시대라고 합니다.
룻기서에 라합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사사시대의 전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사시대에는
  종교도, 도덕도, 정치도 모두 극도로 타락하고 부패한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나타낸 말이 삿21:25절 마지막에
  [ 왕이 없으므로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로 인하여 주변 다른 민족에 의한 핍박과 억압,
    그리고 여러 가지 자연 재난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룻기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징계가 가뭄을 통한 흉년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때, 하나님을 섬기는 유다 땅의 베들레헴에 살던
    한 가정이 흉년을 피하여 이방 나라인 모압 땅으로 떠났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타락하고 기근이 든 유대 베들레헴을 배경으로 사건이 전개됩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하나님이 주신 기업 안에서도 복된 삶을 누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교회생활을 해도
    얼마든지 이런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다는 점 명심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 시대에 엘리멜렉과 나오미라는 부부의 가정이야기가 나옵니다.


2. 엘리멜렉의 가정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2-5절)

여기서 엘리멜렉과 나오미라는 인물을 살펴보면
엘리멜렉 :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나오미 : 사랑 받는 자(beloved)란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나타내 보여주는 가정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은혜를 입은 관계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남편과 두 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대가 끊긴 가장 소망이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은 소망 없이 멸망당할 위기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메시지입니다.
또한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위기의 삶에 직면한 성도에게 주어진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룻기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사시대의 암흑에  대한 기록이 아니고 그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권고하시는 구원의 때를 듣고 돌아가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도 무너진 가정과 공동체가
        어떻게 회복되어지는가? 를 보여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오미의 가정의 불행은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들어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내려감으로 야기된 불행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사사들의 치리 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고 되어있습니다.
농사짓고 살던 그때에 흉년이 들면 어떻게 됩니까?  망합니다. 
흉년이 들면 굶어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굶어 죽으려면 이사를 가야합니다. 
그래서 거기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농사가 잘된 모압 지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너무나 정상적입니다.   
    오히려 이사라도 안가면 바보라고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성경,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너무나 정상적으로 보이는 아비멜렉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명 지명들은 대부분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이란 말은 두 명사의 합성어입니다.
  벧 - 집, 레헴 - 떡 이란 말로 바로 떡 집이란 말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관계된 벧 이란 지명을 보면 
  벧엘(Bethle) - 하나님의 집, 베데스다(Bethesda) - 자비의 집
특히 유다 베들레헴이란 말은 “찬양의 땅 떡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집은 바로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찬양의 땅 떡집인 베들레헴,
    먹을 것이 풍요로운 땅에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유다 땅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왜? 떡집에 떡이 떨어져 떡집을 떠나야 합니까?
왜? 교인이 찬양과 말씀의 떡이 풍성한 교회를 떠나게 됩니까?
  자기 생각의 옳은데로 행동하는 교인들은
      하나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생명의 떡을 먹지 못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면
      교회를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소위 ‘하나님은 왕이시다‘ 라고 하는 아비멜렉같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흉년이 들어 먹고살기가 어려워졌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약속의 땅을 차버리고 이방나라에 가서 살았습니다.
어떻게 잘한 것 같습니까?  못한 것 같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왕이라고 자기 이름같이 그렇게 지어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 사람처럼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이 잘 한 일인냐? 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산다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낙으로 기쁨으로 여겨야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교회를 떠나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이 없는 그런 이방 나라
        그것도 저주받은 모압 땅에는 안가야 되는 것입니다.
  먹고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예수님을 떠나거나 신앙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환경이 어렵다고 신앙의 중심마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 좋은 대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사사시대의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과거 60년대, 7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가 아직도 먹는 문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미국에 간 사람들이 한결같이 첫마디가 `이곳은 지상 낙원이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모든 것이 핍절하던 시절에
미국 슈퍼마켓에 들려보고서 놀라지 않을 사람들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비하면 오늘 우리나라가 얼마나 잘 살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마 나오미의 가족들도 흉년이 들어 고생하다가
  모압으로 이주해 가서 이렇게 잠시나마 행복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 둘은 모두 모압 여자와 결혼하여 행복한 보금자리를 꾸몄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마 하나님께 향한 마음은 점점 멀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키라는 절기도 잊어버리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방민족의 풍습을 따라서 아들 둘이 다 모압 여자를 좋아하여
        그들과 결혼하였습니다.
그것을 누가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가정 안에서 벌써  신앙의 축은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찬송소리 기도소리 예배생활은 저만치 생활의 변두리로 밀려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불행이 닥치기 시작했습니다.
행복의 기간이란 바람결에 날아가 버렸고 불행이 닥치는데,
먼저 남편이 죽었습니다. 하늘처럼 믿고 나갔던 가정의 기둥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이 모두 또한 죽었습니다.
세 과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이겠습니까?
잘 살러 갔다가 그만 집안이 깡그리채 망해버렸습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하나님께서 머물기를 원했던
    그 떡집에 모든 사람이 다 떠나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 비록 기근이 왔어도, 어려움이 왔어도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 땅을 지켜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룻기 2장에 나오는 보아스와 같은 사람입니다. 
보아스는 대하7:14절 말씀처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는 말씀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베들레헴에 비록 지금은 먹을 것이 없어 어려움을 당하지만
눈물 흘려 가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을 고쳐 주시리라고 믿고
  그 땅을 지켜왔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신앙을 버리거나,
믿음의 자리에서 세상으로 떠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대판 엘리멜렉과 같이 하나님이 머물기를 원하는 자리를 박차고
    하나님이 가지 말기를 바랬던 땅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신앙을 떠난 사람들의 말로가 어떻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룻기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비멜렉의 가정의 몰락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1-5절까지 자세히 보면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면
  계속해서 그 란 말이 나오는데 그가 누구입니까? 아비멜렉입니다.
그런데 3절에 그가 죽고 두 아들이 남았습니다.
        두 아들에게 희망을 걸어봅니다만
두 아들 말론과 기룐마저도 모압 여자와 결혼하여
  십년 쯤 살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고
5절에 보면 [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
하나님께서 남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게 하신 것에는 섭리가 있고 뜻이 있고 계획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비록 나의 삶에 희망이 다 날아가 버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뭘 남겨두셨는가를 살펴보면
        그기에 희망을 갖는 믿음의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사6:13절 [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
남겨둔 것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루터기 신앙에 눈이 뜨여져 믿고 붙드시기 바랍니다.
.
남은 사람 나오미가 어떻게 삶을 헤쳐나갑니까?


3. 시어머니 나오미의 권유에 두 자부의 결단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는 무엇입니까?(6-18절)

6절 이하 말씀에 보면 나오미가 베들레헴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합니다. 
먼저 무너진 삶이 회복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눈이 뜨여져야 합니다.
6절 [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 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물론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어. 베들레헴 땅에 양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교회 가서 말씀에 은혜 받아야 살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미루어서 안 됩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베들레헴 행을 결단하고 두 자부와 함께 유다로 돌아가다가 
    두 자부에게 권유를 합니다.
그런데 두 자부의 반응이 달리 나타납니다.
나오미가 동행한 자기의 두 며느리를 보고 말합니다.
“ 너희 두 사람은 아직 젊고 앞길이 구만리이니까 다시 시집가서 잘 살도록 해라, 
각자 너희들이 살기 쉽고 편한 길로 가서 살아라` 하고
    며느리들을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헤어지는 것이 너무나 섭섭해서 같이 한바탕을 울고 나서,
큰며느리 오르바는  “ 어무이, 그래도 되겠습니꺼? ” 하고는
      시집오기 전에 살았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둘째 며느리 룻입니다. 
이 둘째 며느리도 큰며느리처럼 자기 길로 가버리면,
  이 시어머니도 속 편하게 갈 터인데,
  이 둘째 며느리가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타이릅니다.
`애야! 너도 너 갈 길을 가라. 봐라! 너 형님도 자기 길을 가지 아니했느냐!     
이 시어미의 말을 들어야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둘째 며느리 룻의 고집도 보통이 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못 갑니다. 못가예, 저를 가라고 야단치지 마이소,
저는 어머니 가는 곳에 가서 같이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시어머니가 다시 타이릅니다.
`얘야! 이것이 어디 고집 부린다고 될 문제이더냐? 죽고 사는 문제이다.
    네가 살려고 한다면 너의 길로 가야 할 것이니라`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어머니! 너무 그러지 마옵소서. 내가 어머니를 쫓는 것은
      단순히 며느리로서 효도를 다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님이 믿고 있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 가족이 그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남자들이 죽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저는 그 하나님이 참 신이신 것을 믿습니다.
어머님이 믿는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니,
저에게 어머니와 함께 살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이 이 정도 되고 보니,                           
나오미는 더 이상 자기 며느리를 만류하지 못하고 함께 길을 가기로 하였습니다. 
나오미는 이 며느리가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그와 함께 살기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나오미가 너희는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큰며느리 오르바는 예 알겠습니다.
          ‘어머니 부디 몸조심하세요.’ 하고는 돌아갔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16절에
[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게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
하고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유다 베들레헴 땅으로 오게 됩니다.

룻은 잘 선택했습니다. 정말 현명한 선택을 했습니다.
왜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하는가 하면
  룻은 복중에 가장 귀한 복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룻은 시어머니에 대한 효심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80년대 가전제품 선전문구 “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 ” 기억나시죠?
그런데 신앙의 선택은 10년 100년이 아니라 영원을 좌우합니다.
얘기 하나 할께요.
우리가 연수를 셀 때 일년, 십년, 백년, 천년, 만년
    그다음 억년, 조년, 겁년(劫年)이라고 하지요? 맞습니까?
그런데 겁(劫)이라는 수가 얼마인 줄 아세요?
겁(劫)이라는 수의 길이가 어느 정도인 줄 아세요?
겁은 가로 30킬로미터(㎞), 세로 30킬로미터(㎞), 높이 3미터(m)가 되는 통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하나도 남김없이 옮겨 놓는 기간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겁(劫)이라고 합니다.
겁(怯)나게 긴 시간이지요.
그러나 겁년(劫年)보다 더 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입니다.
순간의 결단이 이렇게 영생과 영벌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사도
    룻이라는 모압 여인의 순간의 선택을 통해
          영원을 전개해 나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혹 아직 신앙의 결단을 하지 못하신 교인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결단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 나도 믿고 따르기로 결단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어머니와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다는 룻의 단호한 태도 때문에
        나오미는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4.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의 모습 속에서
          어떤 신앙적 교훈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19-22절)

그들이 베들레헴 성읍에 이를 때 사람들이 나오미를 보고
    행색이 너무 초라함을 보고 “이가 나오미냐?” 합니다.
그때 나오미가 하는 말이 20절                       
[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오미란 사랑을 입은 자, 즉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그러나 마라는 괴로운 고통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삶이 어렵다고 교회를 떠나면
      마라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어디에서 회복됩니까?                     
실패의 원인을 환경이나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아니하고
자신의 잘못과 나약함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그것을 경험하며 감사할 때 회복하는 것입니다.
21절에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이라는 말씀은
  원어로 직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나를 비통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13절에서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의 당하는 고통의 문제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는 고백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앞에
  모든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고 굴복하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나오미의 신앙의 장점은
자기의 인생의 고통과 아픔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고장 난 부분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룻기서는
실패한 하나님 백성과 가정의 죄를 들추어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정의 회복에 목적이 있다는 것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30장2절 [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
비록 자기 생각대로 살다가 낭패와 실망 당했다 할지라도
    예수님 앞에 나아온다면 은혜를 입고 삶이 회복될 줄 믿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추수시작 할 때에
      베들레헴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무엇을 예표하고 있습니까?


5.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무엇을 예표하고 있습니까?(22절)

비록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잘 살려고 하다가 실패했을지라도
회복할 길이 있고 소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소망 그 길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떡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낭패를 달할 때 창35:1-3절에 보면
[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 함께 하신
  벧엘의 하나님 만나러 벧엘로 올라가자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
야곱에게 벧엘의 하나님이라면
나오미와 룻에게는 베들레헴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와 룻은
    베들레헴의 하나님을 만나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것도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이 회복되려고 하면
이와 같이 교회의 말씀의 은혜의 소식을 듣고 돌아온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을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
      바로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오늘 왜 설교 제목을 베들레헴의 하나님이라 했는가 하면
룻기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나오미와 룻의 신앙의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하나님이시만
나오미와 룻의 삶의 현장인 베들레헴이란 장소를 통해
      다윗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기구한 삶도 하나님의 구속사에 포함되어질 때
바로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심이 되어 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베들레헴의 하나님
오늘 우리도 그 품에서 우리의 삶의 하나님의 구속사에 중심이 될 수 있는
    진정한 기업의 안식을 누리는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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