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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박되지 않는 사람들 (행 5: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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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박되지 않는 사람들 (행 5:33-42)

요즘 우리 성도들이 너무도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사건이 있다면 아프칸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선교를 하다 지금 피랍 되어 목사님 한 분과 청년 한분이 순교를 당하고 지금 2명이 풀려나고 나머지 19명이 오늘로 39일째를 맞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곧 석방이 될 것이라는 외신 보도를 접하고 있읍니다만, 우리의 젊은이들이 주님의 사랑을 안고 길을 떠날 때만해도 누구하나 이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리라고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막상 당하고 보니까 엄청난 아픔들이 우리 속을 파고드는 것, 사실입니다.

오늘 여기 계신 여러분 가운데 예수를 왜 믿고 살아갑니까? 물어본다면 아마 누구나 오늘 보다 내일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예수 때문에 고난이 온다면 야 어느 누가 선뜻 예수를 위해 살아가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가 힘들어하고 또 싫어하는 고난과 환란을 주십니까? 여러분! 인생의 폭풍우, 삶의 역경 속에서 때로 우리가 고통하고 울고 탄식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왜 허용하셨습니까?

찰스 코우만 여사의 글 중에서 재미있는 체험담을 기록한 글이 있습니다. 그녀는 1년 동안 애벌레가 나방이 되어 나오는 것을 관찰한 일이 있었습니다. 번데기에서 나방이 기어 나오는 구멍은 너무 작았습니다. 그 작은 구멍으로부터 큰 몸집이 빠져 나오려고 오랫동안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서 급히 가위를 가져와 그 구멍을 옆으로 조금 따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나방이 고맙다는 듯이 퉁퉁불은 몸집을 기우뚱거리면서 쉽게 꼬치를 빠져 나왔습니다. 그녀는 큰 선심이나 쓴 것 같은 만족감에 젖어 이제 그 나방이 오색 찬란한 날개를 펴고 창공을 날 순간을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안 가서 자기가 나비의 신세를 망쳐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큰 구멍으로 쉽게 빠져나온 나방은 날개를 질질 끌고 방구석을 기어다니는 달싹둥이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는 긴 시간의 몸부림 이것은 나방이 꽃을 찾아 이산 저 산으로 날아다닐 행복한 나비로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에스 루이스는 고난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예비하시는 변장된 축복이요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고난을 통해 과거를 떠나게 하고 안락한 환경을 떠나게 합니다. 고난을 통해 품게 된 꿈은 우리로 하여금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게 만듭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게 만들고, 낯선 땅에서 아침을 맞이하게 만듭니다. 그런 면에서 고난은 거대한 에너지입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고난은 변화의 고통을 환영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때로는 죽음마저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지금 부흥하는 초대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초대 교회가 부흥을 경험하게 되자 세상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핍박이 들이닥칩니다. 이 핍박이란 사건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감옥에 잡아 가둡니다. 18절에 보면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27절에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또 33절에도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이런 핍박이 온다면 여러분, 그래도 예수를 의지하고 따르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예수를 믿으면 잘살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지 예수 믿어서 이렇게 된다면야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저 예루살렘 초대교인들은 복 받는 것은 두고라도 예수 믿자마자 이렇게 엄청난 핍박을 맞게 됩니다. 예수 믿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겼습니다. 이처럼 위협과 핍박이 저들 앞에 놓여 있는 불안함이 그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쭉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한 마디, 한 마디 살펴보면 예수님은 대단히 솔직하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믿으면 너희들도 핍박받을 것이다.' 하는 말을 듣고 예수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너희들이 생명을 내 놓고 죽을 각오를 하지 아니하면 나를 좇아 올 수 없다. 너희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 와야 된다. 이 길은 좁은 길이다. 이 길은 고난의 길이다.' 이런 말을 듣고서도 예수 믿고 주님 따라 갈 사람이 있겠어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도 예수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십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 십자가를 져라. 나의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자기 목숨을 아끼려고 하는 사람은 나를 따를 수 없느니라.' 대놓고 주님께서는 예수를 믿으면 핍박당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얼마나 솔직하신지 모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 가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물러갈까 싶어 겁이 나서 하나님의 진리를 적당하게 포장해서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15:19,20절에 나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다시 말하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으면 세상이 너희를 절대 핍박하지 않는다. 제 새끼 미워하는 부모가 없듯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것이지만'.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 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주님은 숨기지 않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핍박당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모두가 예수 믿고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참으로 신비스러운 말씀이 있습니다. 보세요.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두렵게 하고 핍박하는 그 가운데 29절을 보면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표현은 죽기로 작정한 비장한 선언입니다. 세상은 저들의 입을 막으려했지만, 그들을 매질하고, 위협했지만, 이 세상 앞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순종(휘파코에)' 이란 단어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네 번밖에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순종이란 단어가 수백 번 쓰여졌지만, 이 단어는 네 번밖에 없어요. 이 순종, '휘파코에'라는 단어는 절대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세상이 그들을 못 말리는 것입니다. 목숨을 내 건 것입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지금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 줄 아십니까? 여기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는 표현은 보통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한 마음이 되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메달아 죽였습니다. 바로 그 분이 너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은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나 죄를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외쳤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촉구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준다는 약속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란 결코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놓고 무릎을 꿇으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일을 누가 감히 강조할 수 있습니까? C. S. 루이스의 말처럼 '회개하라'는 말은 그 사람을 향해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즉 일종의 죽음을 각오하라는 말인데, 누가 감히 가서 사람들에게 '너 칼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죽으라.'고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33절에 저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여기서 '없이하고자'라는 말은 미완료 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도들을 죽이려고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두려움 앞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켜가며 이처럼 담대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것을 푸는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32절에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성령도 그러하니라' 바로 성령께서 내 안에 함께 계셔서 두려움에서, 핍박에서, 고통에서, 넉넉히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우리는 강해집니다. 얼마만큼 강해집니까? 예수님만큼 강해집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어두워도 우리 앞에 대적하지 못하는, 적수가 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성령이 key입니다.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까지의 기간을 보통 약 30년으로 잡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제일 처음 등장한 교회의 교인 수는 몇 명입니까? 120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약 30년이 지난 후, 사도행전의 기간동안 예수 믿고 돌아온 모든 성도들의 숫자를 학자들은 10만 명으로 어림잡습니다. 30년 사이에 120명의 갈릴리 촌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는데,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사마리아를 넘어 헬라권에 이르기까지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누구의 역사입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입증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그 능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입증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이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교회 사람들이 마신 우물물을 똑같이 마셔야 됩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의 원천인 성령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성령은 이미 교회에 임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성령은 우리 모두에게 임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향해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못 말리는 이 사람들 속에 역사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들에게 일어난 몇 가지 변화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담대해졌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겁쟁이 베드로가 성령충만하자 얼마나 담대해졌는지 사도행전을 열기만 하면 금방 나옵니다. 세상이 짓눌러도 결코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핍박당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예수 믿고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족을 잃었습니다. 직업을 잃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핍박받아 나중에는 산 속에서 유리하고 사막에서 방황하다가 굶어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은 형장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외로운 그 자리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순교했습니다. 알면서 다 따라갔습니다.

로마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익나티우스가 안디옥에서 로마로 호송을 당하여 원형 경기장에 끌려 왔습니다. 이제 맹수의 밥이 되는 순간입니다. 집행관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말 한 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익나티우스는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보고 말하기를 "만약 기독교의 이 모든 것이 허무맹랑한 일이라면 내가 무슨 까닭으로 여기 고통을 당하고 있겠는가? 이 진리가 거짓이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겠는가? 또 이것이 거짓이라면 무슨 까닭에 내 몸을 사자밥이 되도록 맡기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사자 앞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냥 눈 한번 감고 부인하면 살수 있지 않습니까? 말 한 마디로만 예수 안 믿겠다고 하면 풀려나서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회복이 되는데 이 한 마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한 마디 말을 못해서 세상이 볼 때는 가장 바보 같은 인생의 종말을 고한 사람들이 초대 교회 안에 수십만이 있었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고,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고아 신세가 되어 어떻게 됐는지 알 수도 없는, 부모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당하면서도 예수 모른다는 말 한 마디를 할 수가 없어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간 성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런 고난의 현장에 있는 자에게 마5:12절에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어떻게 굶으면서 예수 사랑하겠습니까? 그런 은혜가 없이 어떻게 고문당하면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버티겠습니까? 그런 은혜가 없이 어떻게 처자식 다 내버리고 주님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핍박당하는 자를 위해서 특별히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계시록 2장에 보면 '너희 앞에 다가오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난이 올 때 너희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너희에게 주리라.'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이 세상에서 복음 전하고 말씀 전하다가 목 베임을 당한 사람들, 사탄의 앞잡이가 되었던 짐승과 우상 앞에 절하지 않다가 핍박당해 희생당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 노릇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은혜가 있기에 그들은 세상 한 복판에서도 결코 믿음의 흔들림이 없이 한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치유의 역사가 뜨겁게 일어납니다. 여기 12절에서 16절까지 보면 굉장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특별히 15-16절을 보면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사도들에게 큰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베드로를 한 번 만나기가 너무나 어려우니까, 베드로만 만나면 모든 병이 다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니까, 병자를 메고 와서 길가에 눕혀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손은 고사하고 그림자라도 한 번 닿으면 낫겠다고 줄을 선 사람이 많았다고 얘기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10:1절에 12제자를 부르시며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좆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의 3분의 2를 병 고치는데 보내셨으며12제자, 70인의 제자 및 최후의 명령에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병을 고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 능력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지금 보세요. 얼마나 많은 질병이 있습니까? 현대 의학에 따르면 병의 종류가 만 가지가 넘고 또 그 병을 치료하는 방법 역시 만 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의사의 진료로 치료할 수 있는 환자의 수는 20%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질병의 70% 이상이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마귀에게 눌린 결과입니다. 따라서 많은 병이 기도와 믿음과 회개로써 나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병 고치는 능력은 단지 고침 받았다는 그것보다 그 고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초대 교회에 일어난 것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그들의 사역을 반대하며 핍박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믿음의 사람들을 도와 줄 사람을 예비해 둔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34절에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당시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였고, 바울 역시 이 사람의 문하생이었을 만큼 가말리엘은 신약에서 가장 특출한 인물중의 하나로 꼽힌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나서서 예수 믿는 자를 죽이려할 때 무엇이라 합니까? 분노한 사람들을 향하여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지난날에 있었던 드다의 사건과 갈릴리 유다의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이 예를 든 두 가지 사건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인간의 경영으로서 모두다 무의미하게 끝난 사건입니다.

이 두 사례를 들며 38절에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일은 가만 두어도 저절로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들을 무작정 핍박할게 아니라 가만 나두면, 이것이 진리가 아니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유대인의 최고 지성들이 모인 산헤드린 회의에서 정신적으로 그들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의 주장을 펴면서 사도들을 보호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위기에 처한 사도들의 목숨을 구해 내면서 하나님의 일에 기여한 것입니다. 이 가말리엘 말을 당시의 핍박자들이 합당하게 여기고 채찍질을 하고 석방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세상은 저들을 결박하였지만, 결국 저들의 불타는 열정을 묶지는 못했습니다. 41-42절에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이들은 한마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도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 앞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는" 삶으로 한 시대를 당당하게 걸어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연약함이 있습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인해 염려가 있습니다. 불안한 우리의 미래를 앞에 놓고 두려움에 갇혀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나는 내 생명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 없이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 각자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죄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 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 다가오셔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그 성령님께 붙잡혀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줄로 확신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위에 항상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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