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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행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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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사도행전 21 : 1~14)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의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사도행전 21 : 1~14)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서 ‘소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참 괜찮은 말입니다. 소신이 있다거나 소신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참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소신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만 괜찮고 좋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그보다 더한 것이 없을 정도로 위험한 것이 소신이고 소신있는 사람입니다.

2003년에 어느 스님이 공사 중단을 이유로 단식투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천성산의 도롱뇽이 죽는다면서 경부고속철도 공사를 중단시킨 일이 실제로 있었는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간이 흘러서 법원 판결에 따라 공사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진행 중에 있는데 그렇게 걱정하던 도롱뇽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지금도 여전히 잘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한 언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걱정하며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과연 그렇게 되었는가? 죽은 것은 도롱뇽이었던가? 아니다. 죽은 것은 지율 스님이 걱정했던 도롱뇽이 아니라 공사지연으로 인해서 낭비된 수천억의 국민세금이다.’ 몇 년 간 소중한 국민의 시간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118일간의 기록적인 단식이 누구에게 어떤 득을 주었나요? 국민과 나라에는 손해만 가져왔고 덕을 본 것에 대해서 그 언론은 소송을 맡았던 변호사에게 약간의 소득을 안겨주었고 몇몇 시민단체에게 일거리를 제공했고 몇몇 기자들에게 한동안 기사거리를 제공한 것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아니한 사건이었다고 말합니다. 소신이 있는 것은 좋습니다. 소신이 있는 사람도 좋습니다. 그러나 소신을 생각할 때마다 생각할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소신이며 무엇을 위한 소신인가입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신에 관련된 일들을 생각할 때 늘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생각하는 이것이 나의 소신인가 하나님의 소신인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유대교인 이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배교자로 처단하려고 벼루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벼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입니다. 이미 사도 바울 자신도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어떤 어려움이 있을 것인가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런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시니(20:22~23) 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그가 떠날 때 사람들이 많이 붙들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제 배를 타고 멀리 아시아 지역까지 왔습니다. 여기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만류하였습니다. 맨 처음 두로라는 곳에 왔습니다. 거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제발 가지 말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그냥 인간적인 생각으로 말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서 말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거기를 지나와서 가이사랴에 왔는데 거기서도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빌립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그는 예루살렘 교회가 세운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유대에서 온 아가보라는 사람이 와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의 허리끈을 받아서 자기의 몸을 칭칭 감으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는데 바울님이 지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이처럼 묶이고 갇히고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들이 하는 만류 예언들은 그냥 예언이 아니라 아가보의 예언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성령님께서 이디오피아에서 온 장관에게 복음을 전라하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뜬금없는 말이었습니다. 그 성령의 말씀이 꿈일지도 모르고 혼자 생각일지도 몰랐지만 빌립은 그 곳에서 성령의 말씀대로 이디오피아에서 온 장관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 분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일전에 의료선교 다녀온 이디오피아는 사실 얼마나 일찍이 복음이 들어갔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난 뒤 성령이 마치 휴거처럼 빌립 집사를 붙들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주게 되었는데 이는 빌립이 얼마나 성령을 체험했는가를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집에 결혼하지 않은 딸 넷이 있는데 다 예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와서 함부로 성령이니 하나님이니 말할 수 없는 집이 바로 이 집이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아니한 사람 같으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집에서 이런 예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아가보가 하는 예언은 틀림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세상 살면서 판단하고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런 경우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젊은 처녀총각 같으면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떤 분은 내가 이 사업을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이런 일들에 자주 부딪힙니다. 저는 자주 상담을 받는데 대체로 보면 이미 다 결정하고 저에게 옵니다. 어떤 사람과 동업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지 아닌지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참 많은데 여기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지만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결정해야할까요? 이럴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추천하신 그 분이 정말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분인지 아닌지를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똑똑한가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인가 아니면 자기 생각과 경험을 이야기 하는 사람인가, 그냥 인간적으로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가를 많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제 다시 사도 바울을 보겠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만류할 때 하나님께서 예언을 보여 주셨는데 그 예언의 뜻이 무엇인가 정확하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모든 일들을 내 편안한대로, 내 욕심대로 해석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인간의 존재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예언을 했는데 우리가 정확하게 봐야 할 것은 과연 그 예언의 뜻이 무엇인가 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가보의 예언입니다. 그는 수족을 묶으면서 결박당할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 즉 로마 사람들의 손에 잡혀갈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일어날 일을 보여주었는데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이것이 정말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예언인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만약 정말로 그 예언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예언이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은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끔 누구로부터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의 말이 옳은지 어떤지를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그 때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일인데,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고 순종하려고 작정하고 준비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한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저 분에게 말씀하시는가를 잘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면 되는데, 나도 들을 귀를 가지고 있는데 왜 소위 예언하는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대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직접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요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총각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독실한 크리스천 자매에게 여러 번 청혼을 하였는데 그 자매는 거절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 총각이 자매를 찾아와서 어제 밤에 하나님께서 저 아가씨를 너에게 아내로 주노라고 말씀했다고 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이 아가씨에게는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라 들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생각하다가 이 아가씨는 그 총각에게 “그렇습니까?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나도 하나님께 물어보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있다가 그 총각을 만나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물어 보았더니 나는 너를 그 총각에게 준다고 한 적이 없노라”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꼭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지 왜 그 사람에게만 말씀하시겠습니까? 그 정도로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대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직접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요청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 사람 저 사람 여러 사람을 통해서 예언으로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예언에 있는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를 봐야 합니다. 그 예언은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는 예언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큰 고생을 하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고난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고 붙들려서 감옥에 가게 되고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언입니다. 그들이 예언한 그 예언은 틀린 예언이 아니라 맞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들어가지 말라는 예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여러 사람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도 바울이 소신이 대단한 사람이어서 그렇게 여러 사람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소신을 꺾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알았고 거기에 순종한 것입니다. 바울의 소신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 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갈 사람은 바울 밖에 없으므로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또 “얘야. 들어가게 되면 고생이 많을 것이다. 힘들고 잡혀가서 죽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 통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고통을 받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고 정말로 고생할 것이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여러 차례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나는 너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틀림없이 고생을 한다. 고통을 당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이제 결정해라. 내 말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고생하지 않는 길, 여러 사람을 통하여 말하는 그 고통과 환난을 피하는 길을 갈 것인가’ 바울이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럼에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바로 이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 힘들고 어렵고 손해보는 일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하든 어떤 핑계를 대든 피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약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본능입니다. 인간은 손해와 고통을 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위험을 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피할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갖다 댈 핑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가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정말로 기뻐하시는 뜻이 어디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위대함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항상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얼마나 쫓아다녔습니까? 여러 번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건져 주셔서 겨우겨우 생명을 지키게 되었는데 어느 날 다윗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벌판에서 사울이 다윗을 쫓고 있을 때였습니다. 팔레스틴에는 아주 큰 굴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몇 천 명, 몇 만 명 들어갈 만한 굴도 있습니다. 변이 급한 사울이 굴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변을 볼 때는 경호원을 데리고 가지 못하지 않습니까? 가장 편하게 변을 보고 있는데 마침 그 굴속에 다윗과 그 일행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부하가 나가서 손만 내밀면 원수를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윗도 아마 틀림없이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손을 펴서 칼을 빼서 찌르기만 하면 이제 끝입니다. 더 이상 쫓길 일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의 왕 자리가 자기에게 돌아올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때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인가 아닌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는 또 하나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나에게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둘을 생각하였습니다. 큰 고민이고 고뇌였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하나님의 법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기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가 아닌가는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가 생긴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를 생각하게 되는데 하나는 좋은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 기회를 포기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그런 기회가 생겼습니다. 또 다시 사울이 다윗을 쫓고 있을 때 광야에서 경호원과 다른 병사들 모두가 다 잠들었을 때, 다윗이 바로 옆까지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부하들은 이렇게 두 번이나 이런 기회가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별별 소리를 다 했을 것입니다. 만약 다윗님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까지 이야기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두 번이나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회일지도 모르지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 더 분명한 것은 원수 갚은 것은 우리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또다시 고뇌를 하게 됩니다. 결국 다윗이 선택한 것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을 위대하게 해주셨습니다. 다윗 자체가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좋은 성품이 있었습니다만 누구에게나 좋은 성품은 어느 정도 다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것은 이 기회를 나의 기회로 볼 것인가 하나님의 기회로 볼 것인가? 순종할 것인가 나에게 좋은 것을 선택할 것인가 입니다.

한미 FTA에 반대하면서 단식투쟁했던 국회의원 몇 분을 기억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지금 그 분들 어떻게 되었습니까? 단식하다가 수염도 기르고 얼굴도 까칠하게 됐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 뒤 한 언론인은 또 다시 단식을 해야 할 상황이면 제발 소란스럽지 않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왜 길거리에서 단식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얼굴만 조금 까칠할 정도가 아니고 몸이 상할 때 까지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아주 옳은 말입니다. 기왕 단식을 하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잠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치지 않으니 그만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그 언론인은 그렇게 하는 것이 길거리 단식에 식상한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말에 이런 제목을 달았습니다. ‘단식을 모욕하지 말라.’ 그러면서 만약 단식을 하고 있는 이 분들이 일기를 쓰는 사람들이라면 그 분들은 훗날 자기 일기장을 볼 때마다 스스로 지워버리고 싶어 할 부끄러운 기록들을 추가할 뿐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이 결정적으로 실패한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순간 순간 때마다 나의 기회를 먼저 생각하였고 국민과 나라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한 기회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할 때는 먼저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배는 하나님의 종이 집전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예배를 집전하고 싶은데 사무엘이라는 하나님의 종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하나님의 종이 도착하지 않자 조금 기다리다 왕인 사울이 일어나서 자기가 집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기회만 오면 자기도 한번 해보겠다고 기다린 것 같았습니다. 여기에 실패가 있었습니다. 나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아말렉과 전쟁을 하라고 하시면서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하라고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사울은 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다 없애라고 한 가축을 없애지 않았고 좋은 것을 골라 그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좋게 보이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죽이라고 한 적장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냈습니다. 자기는 전쟁을 하다가 잡혀온 적장을 죽일만큼 잔인한 사람이 아니고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자기를 드러내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순종에는 이유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다 들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순종에는 순종이외에는 다른 것은 없으며 순종이 요구하는 것은 순종 그것 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렇게 위대한 사람으로, 바울을 그렇게 위대한 사람으로 세우게 된 까닭은 그 분들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소신을 먼저 선택했고 그것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대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간에 자기 소신이 아니라, 자기의 기회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소신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귀히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서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만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 그것만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위대하게 만드십니다. 바울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윗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설 수 있습니다. 영영히 여러분의 이름이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사람들에게도 기록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나의 기회가 아니고 나의 이름과 나의 자랑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소신에 순종할 때 여러분을 그렇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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