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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생활의 장애 요소들 (눅 21: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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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생활의 장애 요소들 (눅 21:34-36)

              너희가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
              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요즘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처음처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또 교계에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들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옛날의 감격, 떨림, 순수함, 감동을 되찾자“라는 말입니다. 지금 많이 변하고 퇴색하고 오염되고 식어졌다는 말이고 고백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변하고 식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감동도 시간이 지나면 다 식어집니다. 그렇게 뜨겁던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밋밋해집니다. 아름다움도 시간이 지나면 변해 버립니다. 그래서 얼굴의 아름다움은 3일 가고 몸매의 아름다움은 3년 가고 마음의 아름다움은 30년 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앙도 시간이 지나면 식어집니다. 처음 신앙 체험했을 때 그 감동, 감격, 뜨거움, 신선함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새로웠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감격적이고 감동적이던 신앙도 다 식어집니다. 그리고 밋밋해집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런 현상을 고발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 때를 잊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믿음이 식어지고 비성경적인 삶에서 자꾸만 영적으로 무디어짐에서 헤어나라고 경고합니다. 뜨겁던 신앙이 식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반 성경적 삶의 요소들 때문

본문은 “방탕함과 술 취함과 염려함으로 마음이 둔하여지는 것을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오늘 너무 술 취함이 많습니다. 술 때문에 몸이 망가지고 가정이 망가지고 삶이 망가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술 문제는 오늘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술 취하지 말라고 여러 번 경고한 것을 보면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에도 이 술이 큰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술은 방탕생활과 직결됩니다. 술은 삶의 질서를 잃게 합니다. 정신을 놓게 합니다. 영적으로 해이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술에 취하지 말고 인 박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 술에서 헤어 나오질 못합니다. 이 술 때문에 신앙생활 하지 못하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업가를 만났는데 그분은 교회 다니고 싶은데 술을 끊어야 하기 때문에 결단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술이 참 좋은가 봅니다. 연속극을 보아도 늘 술 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술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이 술이 영적 생활에 상당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술은 영적생활을 파괴합니다. 정신을 혼동시키고 질서를 혼동시키고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고 술을 찾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고 먼저 술을 찾아 취하고 자신을 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는 이 술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술에 취해서 방탕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생활의 염려

본문은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진다”고 했습니다. 영적생활은 너무 평안함도 문제입니다. 사람이 너무 평안하면 문제의식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늘 졸고 긴장감이 없이 느슨하게 살아갑니다. 그것은 결코 좋은 생활이 아닙니다. 축복도 아닙니다. 어쩌면 생활의 평안함은 불행의 요소일지도 모릅니다. 또 너무 부함도 문제입니다. 너무 부한 사람은 그 부를 관리하느라 정신을 집중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묵상할 마음의 여백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와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성경은 경고했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그날그날 먹고 살아갈 정도가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요즘 이명박 씨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한쪽에서는 그 재산이 당신 것이다 하고 또 본인은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참 이상한 논쟁입니다.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마음과 정신과 영이 참 단순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복잡함이 없습니다. 풍족하지 않은 것도 때로 축복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너무 적어서 생활에 고통을 느끼며 사는 것도 영적생활 하는데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잠언을 보면 “나를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마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소서”(잠 30:8)하고 기도했습니다. 너무 넘쳐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까 두렵고 너무 부족해서 도둑질할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없어서 그날그날 살아갈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 생활도 너무 가진 것이 많아서 마음이 번뇌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묵상할 마음의 여백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없어서 그리고 너무 많아서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을 묵상할 여백이 없는 삶은 모두 영적 삶을 질식시키는 삶입니다. 너무 많으면 삶에 기쁨, 즐거움, 감사함, 기다림, 감격 같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없어도 삶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삶의 맛을 잃고 기쁨을 잃고 즐거움을 잃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근심과 걱정을 다 내게 맡기라”고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걱정은 해도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밤새워 고민해도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밤을 새워 고민을 합니다. 또 고민하지 말라는 이유는 근심이 삶에 악영향 주기 때문입니다. 근심은 삶에, 마음에, 정신에, 관계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피를 마르게 하고 뼈를 마르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없어서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우리의 통제되지 않는 욕망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 입시 때문에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참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또 오늘은 주식 파동으로 주식에 투자한 분들이 매일 신문을 보고 TV를 보며 웃었다 울었다 한다고 합니다. 이런 고민들이 마음을 짓누르고 머리를 짓누르고 생각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무슨 마음으로 묵상을 하고 영적생활을 하고 성경을 읽고 성경을 쓰는 일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은 경고합니다. “너희가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본문은 예수님이 종말에 관한 교훈을 주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시민들 누구도 장차 있을 환란 때를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을 자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눅 21:6)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언제 그런 때가 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종말에 대한 교훈을 주시며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미혹 받지 않도록 조심하라(눅 21:8), 너희를 핍박하거든 염려하지 말라,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18), 너희는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그러면 뜻밖에 그날이 덧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34).

너무 평안한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면 영이 잠자게 됩니다. 너무 부한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면 영이 고갈됩니다. 너무 가난해도 문제입니다. 가난은 영적생활을 유지할 힘조차 사라지게 만듭니다. 또 너무 부질없는 것들로 근심 걱정에 휩싸여 사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 근심 걱정들이 마음과 생각과 정신과 삶과 영을 짓누릅니다. 이 요소들이 영적생활에 아주 지장을 초래하는 요소들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너무 좋은 시대를 살면서도 영적생활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너무 생각하는 것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분주한 생활 

본문은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종말의 날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근심 걱정이 많아서 삶의 본질을 잊고 사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리고 너무 부해서 안일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종말의 날을 맞아서 낭패를 당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또 삶이 너무 분주해서 삶의 본질을 잊고 사는 것도 문제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너무 바쁜 것이 문제입니다. 매일 같이 분주하고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메말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동도 감격도 묵상도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고 음미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여유와 침착함과 마음이 한가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나를 찾고 본분을 찾고 할 일을 찾고 하나님을 찾고 내 영혼을 매일 새롭게 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괴테는 “네 영혼이 피곤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니체는 “네 영혼이 피곤하거든 퀴니히스부르크의 조용한 호수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생각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삶이 너무 분주하고 바쁩니다. 생각할 여유가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 내 영혼이 피곤하고 영성이 결핍되고 생각의 능력을 상실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살아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남는 것은 육신의 껍데기와 모양만 남게 됩니다. 

여러분, 분주함이 얼마나 영적인 요소를 죽이는지 아십니까. 기도 많이 하던 사람이 아이 낳고 바빠지면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 생활에서 빨리 추수르지 않으면 신앙의 열정이 식어져버립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가게로 식당으로 일터로 나가 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 버립니다.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서 잠자기 바쁩니다. 그렇게 몇 년을 살면 다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살며 주일날 예배에 와도 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종말의 때가 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아찔하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에서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말의 날은 반드시 주님의 재림만은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도 분명 종말의 날입니다. 그런데 그 날보다 더 빨리 나 개인의 종말의 날이 올 것입니다. 사람이 분주하게 살다 보면 내 운명의 날이 오는 것도 모르고 무감각하게 갈아갈 수 있습니다.

엊그제 어느 재벌 되시는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이제는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고 했습니다. 종말의 때가 가까우니까 아무래도 믿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참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처가 부모들은 잘 믿고 친가 부모님들은 안 믿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가 부모님들이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니까 그렇게 운명하는 모습이 평안하고 돌아가신 후에 가족들이 장례를 치루는 모습이 장례가 아니고 축제 같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친부모님들은 운명하실 때 얼마나 고생하며 돌아가시는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더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고 애를 쓰던 모습이 자꾸만 비교되고 애처롭게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자기도 때가 되니 예수를 믿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자신도 종말 때 평안히 부름 받고 자손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남겨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분입니까. 오늘 사람들은 너무 분주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 영혼 관리를 잘 못합니다. 분주하게 일에 몰두하다가 자기 인생, 영혼, 종말을 관리하지 못해서 어느 날 그날이 갑자기 오면 속수무책으로 맞아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무관심

이 무관심이 참 좋지 않은 것입니다. 우이독경이란 말이 있듯이 말해 주어도 관심이 없어서 듣지 않습니다. 이 마음이 저주의 마음입니다. 화인 맞은 마음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천사들이 소돔 성을 방문하여 롯에게 이 성에서 빨리 피신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롯이 자꾸만 지체했습니다. 사위들에게 이 성에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사위들이 농담하는 줄 알았습니다. 롯의 부인은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노아 때 “배를 만들라, 장차 큰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노아가 배 만드는 것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이 무관심이 문제입니다. 오늘도 “전도하라”하면 무관심으로 남의 말로 들립니다. “오후 예배 참석하라”고 하면 무관심합니다. 밖에서 놀면서도 예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예수 재림하신다” 해도 무관심합니다. 어떤 이는 웃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재림을 말하는가” 무관심한 자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관심이 불행인 것입니다.

1941년 12월 7일 그날은 평화로운 주일이었습니다. 일본군 비행기 353대가 진주만을 향해 벌떼처럼 돌진해 갔습니다. 진주만이 공격받기 1시간 전 2명의 미군 병사가 레이더에서 파리 떼 같은 많은 물체가 움직이고 있다고 당직 장교에 보고했습니다. 그 장교의 마음은 오늘 저녁에 열리는 파티준비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보고를 받고 “걱정마라, 저것은 우리 비행기야”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습니다. 그리고 1시간 후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미군 3천명 177대의 전투기가 파괴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불행은 무관심에서 발생합니다. 사탄은 항상 무관심의 바이러스를 이 세상에 퍼트립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무관심의 바이러스를 전염시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책이 손에 들려지지 않고 책꽂이에 꽂아 두게 합니다. 기도는 순간적으로 후닥닥 해 치워 버리거나 잠이 쏟아지게 만듭니다. 묵상의 생활이나 경건생활에 대한 노력을 소홀히 하게 해서 영적 침체를 가져오게 합니다. 연료가 떨어지면 불이 꺼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과 기도와 영적교제가 고갈되면 연료가 떨어져 믿음이 식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엄청난 업적을 남기고 신앙의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러기 이전에 묵상하고 기도하는 생활을 통해서 마음의 문이 열리고 생각의 문도 열리고 영감도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신앙의 본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주함, 무관심이 내 안에서 작용하실 성령의 은사도, 영감도, 깊은 생각도 고갈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속에서, 세상을 보면서, 감격도, 생각도, 행복함도, 기쁨도, 상상의 날개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책을 보십시오. 무한한 꿈 이야기, 상상의 근원, 영감의 말씀, 지혜의 샘물이 얼마나 많이 흐르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감이 결핍되고 메말라져서 그렇습니다.

엊그제 임정진이라는 동화 작가가 쓴 책에 보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얀 응급차와 검은 봉고차가 사랑에 빠져서 마침내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이 응급차와 봉고차가 아이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첫 아이는 지프차, 둘째 아이는 봉고차, 셋째 아이 5톤 트럭이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들이 아주 건실하게 자랐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마침내 분가해서 전국을 누비며 살아갑니다. 마침내 이 부모가 생명을 다해서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 부인 봉고차가 말했습니다. “여보, 차에도 영혼이 있나요”. 남편 응급차가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열심히 산 것은 다 영혼이 있지“ 그리고 이 두 내외는 폐차장으로 가서 압축기 밑에 들어가 폐차가 되어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가슴에 그리고 마음에 이런 동화가 없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시가, 가곡이, 클래식이, 문학이 없습니다. 그 마음에 탄식이, 눈물이, 아픔이 없습니다. 오늘 사람들의 마음은 온통 자갈밭으로 변해버려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그토록 사납고 거칠고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친구도 관리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정기적으로 전화하고 가끔씩 만나서 서로 교류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까운 친구라도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정도 식어집니다. 오랜만에 만나도 서먹해집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깊은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깊은 묵상을 통해서 영적 교류를 이루어야 합니다. 거기서 주어진 지혜와 영감과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이 세상에 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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