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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 사랑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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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처음 사랑
본문 : 계 2:1~7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2장 1-7절)

최경주 선수의 열심은 골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했습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기독교 잡지 9월호에 실린 인터뷰에 ‘블랙탱크'라고 불리는 골프 선수 최경주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는 이미 올 시즌 2승을 올렸고, 세계 랭킹 12위까지 올랐습니다. 이번에 페덱스컵을 치루고 있는데 상금이 천만 달러입니다. AP기자가 그에게 우승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전액을 기부하여 자선사업, 장학후원 사업을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골프 선수로서 자기의 꿈과 비전을 향해서 도전하는 그의 정신력, 의지력, 집중력이 남다르게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빛과 소금》 기자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질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나 일어나 물 마시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합니다. 시합이 오후에 있을 때는 혼자서 찬송을 합니다. 선수이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든 기본적으로 저는 계단의 원리를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급성장을 하더라도 한 계단씩 올라가야 하고 안 된다고 해도 한 계단씩 내려와야 합니다. 너무 빨리 올라간 사람은 지쳐서 발을 헛딛거나 넘어지죠. 하락하는 것입니다. 올라갈 때 스피드보다 하락할 때 스피드가 더 빠릅니다. 하나하나 올라가고 하나하나 짚어 내려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되면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짚어야 합니다. 일이 잘될 때에도 반드시 하나하나 짚어야 하고요. 저는 이런 결정을 할 때 항상 기도를 합니다.”

골프를 쳐 본 적이 없어서 체력과 정신력과 집중력이 얼마나 요구되는지를 잘 모르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골프에 있어서 정신력, 체력,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는 직업과 신앙을 조화롭게 연결시키는 사람으로 골프가 좋아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무엇보다 골프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항상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기쁨과 행복이 있어야 하고 인내를 갖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이 시대의 일꾼으로 자기가 하고자 하는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즐거움, 둘째는 인내, 세 번째는 최선으로, 이 세 가지가 있으면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의 인내와 땀을 쏟는 훈련은 누구보다도 지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열심은 골프에 대한 즐거움, 사랑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이것은 운동선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인생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일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의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분야에서 전문적인 일을 하더라도 즐거움과 인내와 최선은 늘 필요합니다. 그런데 일에 대한 즐거움과 사랑이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 삶의 한계점으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때입니다. 아마추어와 프로는 둘 다 즐거움과 재미로 일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 즐거움이 한계에 도달합니다. 그때 아마추어는 금방 지루함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프로는 지루함을 안 느끼는 것일까요? 프로도 지루함과 권태를 느낍니다. 지겹게 생각되는 기간이 프로에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지겨움이 다가올 때 아마추어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또 다른 어디에 재미있는 것이 없는지 이리저리 기웃거립니다. 그러나 프로는 지겹고 지루할 때 기다리며 인내하고 준비하며 훈련합니다. 그때 자기 인생 전체를 걸 수 있는 능력이 생겨 진정한 전문가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조건 인내하고 훈련하고 참는다고 해서 진정한 프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한 번의 도약, 또 한 번의 비약에 진정으로 성숙한 프로가 되느냐 아니면 이름뿐인 전문가가 되느냐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면세계와 영혼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 깊숙한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즐거움이 있을 때 진정으로 성숙한 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계속 뒤따라가지 않으면 결코 자기 일에 전문가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직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찬양했습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으로 가슴이 감격스럽게 뛰놀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인생의 축복과 기쁨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납니다. 아니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납니다. 이런 생활이 10년 반복되면서 우리가 갖고 있던 기쁨이 무너지고 믿음이 회의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내 속에 생기는 의심이 기쁨을 좀먹어 들어갑니다. 감사를 해도 내 속에 있는 불평이 감사의 내용들을 다 흩어버립니다. 찬송하는 마음이 있어도 속에 있는 또 다른 허무가 찬송의 소리를 작아지게 만듭니다.

신앙의 위기 앞에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때는 신앙의 위기로 내가 갖고 있는 신앙이 참된 신앙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인지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최근 신문마다 다음달 5일에 테레사 수녀 10주기를 맞으면서, 그녀가 이웃을 위해서 40여 년간 섬김의 길을 걸어간 신앙의 친구, 신앙의 반려자였던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아서 책으로 냈다는 보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서신 속에 테레사 수녀가 어둡다, 고통스럽다, 외롭다, 답답하다는 비신앙적인 이야기들을 쏟아 놓았다는 것에 대해서 테레사 수녀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다, 신앙이 흔들리고 있다는 기사를 썼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1979년 12월 오슬로에서 노벨평화상을 받기 석 달 전에 한 신부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제 경우는 침묵과 공허가 너무 커서 예수님을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을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기도하려고 혀를 움직여도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녀는 흔들리는 신앙처럼 보이는 말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카톨릭 수녀들이 수고하고 애쓰는 봉사와 섬김의 일에 굉장히 열심을 내는데 이것과 함께 말씀이 동반되지 않을 때 공허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수고와 애씀이 함께 가지 않으면 애쓰면서도 마음이 공허해집니다. 남을 도우면서도 그것이 끝나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기쁘고 감사한 것 같은데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면 외로워지고 슬퍼집니다. 아마도 이런 경험 때문에 이렇게 썼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긍정적으로 본다면 진정으로 거룩함을 추구할 때마다 완벽한 거룩함이신 하나님이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하나님의 신비 속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나님의 신비는 너무 크게 여겨집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소외됨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믿음의 거장들이 그런 외로움과 아픔과 답답함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3개월 후에 노벨평화상 수락연설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설파하면서 말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곳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고받는 미소 속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을 갖는 것은 결코 의심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을 갖는 것은 미래의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큰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내 상황이 흔들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한 약속임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흔들리는 터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용기, 새로운 능력, 새로운 힘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오히려 자기의 약점을 발견하지 못할 때, 자기가 흔들린다고 생각하지 못할 때가 위험합니다. 그런 신앙인, 그런 교회가 되면 위기에 봉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뻔뻔스러워지고 교만해지며 자기가 모든 것을 독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위기의 모습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며 목회했던 소중한 교회로 수고하고 땀 흘려 칭찬받는 교회였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고통 속에서 견디었던 담대한 교회로 게으르지 않았고 부지런했습니다. 악한 자들을 쳐 부수었고 거짓된 것과 옳은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로 게으름의 유혹을 물리친 교회였습니다. 의심과 의혹의 유혹도 극복했던 놀라운 교회였습니다. 사실 이런 경지에 드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열심과 헌신과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열정을 가지고 달려간다면 분명히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탁월한 신앙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있다. 네게 문제가 있다. 네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이 대단한 것이다. 모든 수고, 헌신, 노력을 내가 다 알고 너를 칭찬한다. 어느 누구도 너를 따를 수 없이 너는 충성스러운 종이다. 그런데 책망할 것이 하나가 있는데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 네가 하나님에 대한 처음 사랑, 예수님에 대한 처음 사랑, 감격과 헌신, 기쁨을 다 잃어버렸구나.”

이것은 수고와 노력과 헌신에 처음 사랑을 더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결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놓은 것을 알지만 핵심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겉모양은 있는데 동기가 뒤틀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욕심으로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과 수고와 헌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해 줍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회개를 하지 않으면 가짜 신앙, 거짓 신앙, 소용이 없는 신앙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네 촛대를 옮길 수밖에 없고, 구원의 자리에 들어갈 수 없게 되는 왜곡된 신앙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모습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

여러분은 처음 사랑을 갖고 계십니까? 어떤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계속 갖고 있는 처음 사랑일까요?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냥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것,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해서 내 마음이 설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사랑, 내가 누렸던 것, 내가 자랑스러워했던 모든 것은 다 초개와 같고,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주인이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내 인생에 우선이며 자랑이라고 생각했던 사랑,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기억하고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고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감격의 기도를 했던 그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신앙의 형식, 신앙의 습관도 있는데 그 내용을 잊어버렸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조건 없이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생각했고 사랑하면 할수록 더 사랑스럽다고 말했던 사랑이 사라지고 이제는 조건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안 들어주면 하나님을 안 믿을 거예요, 이것을 안 들어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수없이 많은 조건을 붙여서 하나님 앞에서 거래하려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조차 두려움이 사라지고 자기 자랑을 하는 교만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드려도 아깝지 않은 사랑에서, 시간을 내면 아깝고 헌금 드리는 것이 아까워 드리면서도 메마른 모습으로 바뀐 것이 바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내 인생의 우선순위였는데 어느 날 슬그머니 그것이 뒤로 물러가고 다른 것이 우선권으로 생겨지는 삶이 그런 것은 아닐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처음 사랑을 강조하실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Doing'을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Doing'이 아니라 ‘Being'입니다.

예수님이 내 존재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업적을 먼저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는지 지켜보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는 나를 사랑하라, 사랑하는 존재로 가까이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거대한 일을 해서 하나님 앞에서 공적을 쌓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 고백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처음 사랑을 갖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타락을 막고 열정을 식지 않게 만듭니다. 매일 감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청합니다. 기쁘게 살아가고 설레는 가슴을 갖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기대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사랑하고 풍성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받기를 열망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면서도 사랑에 굶주려 계십니다. “난 너를 사랑하는데 너도 나를 좀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 내가 네 이름을 불렀는데 너도 내 이름을 불렀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위해서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네게 주었는데 너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가까이 왔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는 분입니다. 창세기서부터 계시록까지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이란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해요,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어요, 하나님과 인생을 나누고 싶어요.”라고 고백하는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처음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이런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그때 그 사랑과 기쁨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잊어버리면 우리가 수고하고 애쓰고 땀 흘린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자기의 출발점을 잊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처음 사랑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기억해 봐라.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는지 회개해라. 그리고 처음 행위를 가져라. 그 열정, 그 사랑, 그 기쁨 때문에 예배드리기 좋아했던 것을 다시 가져라. 네가 새벽마다 나와서 기도하기 좋아했던 것을 다시 한번 가져봐라. 네가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찬송 부르기 좋아했던 마음을 다시 회복해라.”

다시 우리의 신앙에 활력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다시 살아있는 신앙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 때문에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신다는 놀라운 말씀에 감사하면서 다시 주님을 사랑하기로 결심합니다. 처음 주님 앞에 섰던 사랑, 하나님 사랑하는 것 때문에 기뻤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적 연륜과 지금까지 수고한 것들을 자랑하기 전에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가를 다시 확인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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