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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백성과 가정 (창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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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과 가정 (창 16:1-3) 

아브람이 가나안에 거한지 10년 후인 그의 나이 85세 때에 ‘하갈’을 중심으로 큰 사건이 생깁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과 가정에 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1a)라는 말씀은 ‘하갈’ 사건의 발단을 말해줍니다. 주전 19세기 무렵의 앗수르 결혼 규약에 의하면, 결혼 후 2년 동안 자녀가 없을 경우에 아내는 자녀 얻을 노예 여자를 구해야 했습니다. 당시 풍속으로서는 이런 일이 비윤리적이지 않았지만, 아브람은 아내의 오랜 불임에도 불구하고 첩을 얻지 않았습니다. 의인 노아와 그의 자녀들이 모두 일부일처였던 것을 생각하면서 일부일처를 의인다운 태도로 여겼거나,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과 배려 때문이었겠지요. 하지만 이처럼 자녀가 없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그 시대로서는 비난거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10년의 세월은 사래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자녀 없는 상태로 세월만 보낼 수 없다는 용단을 내렸습니다. 남편에게 계시된 언약이 성취되려면 아무래도 자기 한 몸을 희생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혹자는 사래가 애굽 출신의 여종 하갈을 기근 사건 때에 바로의 궁전에서 얻었다고 추측하지만 분명한 증거는 없습니다(1b). 아무튼 그녀는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2a)고 권합니다.

사래는 자녀 출산을 여호와께서 주관하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자녀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고 짐작했습니다.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2b)라는 말은 그녀의 결정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마침 아브람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뭔가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 중에 사래가 적극적으로 제안 하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생각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하갈을 통해 출산해도 법적으로는 아브람의 자손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2c)는 표현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네 아내의 말을 듣고”(3:17)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하여, 좋지 못한 결과가 있을 것임을 암시 합니다. 사래가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준 때는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였습니다(3). 십년을 인내한 사람들에게 경솔했다고 지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혹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들은 마음에 확신이 들기까지 좀 더 인내해야 했습니다. 이전의 주신 계시를 좀 더 면밀하게 생각해보고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인내할 힘이 부족했는지, 상황과 형편을 보고서 그 시대의 풍속대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상황과 형편’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상황과 형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일이 우리의 삶 가운데 많습니다. 이를 일반계시라고 하지요. 기근 사건에서 하나님께서는 집에 재앙을 내려 바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달고 회개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무시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일반적인 상식과 도덕을 무시하고 유별나게 종교적인 방법만을 고집하는 경우에는 건전한 신앙인으로 성숙해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일반계시가 회개하도록 촉구하는 측면이 있지만 순종해 나가야 할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가르쳐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상황과 형편’과 함께 ‘언약의 말씀’을 잘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항상 계시된 말씀에 최종 권위를 두고, 상황과 형편을 말씀의 비추어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이 건전한 태도입니다.

상황과 형편이 약속의 말씀과 일치할 때는 어려움이 없습니다만, 상충될 때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혹시 하나님의 뜻일지도 몰라’라는 추측에서 출발해서, ‘아마 하나님의 뜻이 맞을 거야’라고 확정한 다음에, 자기 힘을 보태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고 했습니다. 아브람과 사라는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일반적인 생육의 법칙을 존중했습니다. 하지만 원치 않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몇 가지 정황을 보고서 하나님의 뜻을 지레짐작하는 것이 얼마나 얕은 생각이며 위험하고 죄를 짓기 쉬운 태도인지를 보여 줍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반항하는 마음으로 하갈을 취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나마 자기 노력을 보태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인간이 협력함으로써 앞당겨 지는 것이 아님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되며, 다만 인간은 하나님이 베풀어 두신 그 은혜의 자리에 값없이 참예하는 것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아브람의 실수는 하나님의 뜻을 앞당기려는 종교적 열망에 사로잡힌 누구라도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하나님과 협력하려 했던 아브람은 그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놓게 됩니다. 일차적으로는 그 가정이 깨어질 수 있는 위기를, 미래적으로는 이스마엘의 후손 문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4-6).

아브람이 놓쳤던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사명은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문화 명령’을 주셨을 때, 그 말씀은 아담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와에게도 해당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은 밥 짓고 빨래하는 등의 일이 필요 없던 시절이므로, 하와는 처음부터 ‘살림을 돕는 배필’이 아니라 ‘사명을 돕는 배필’로 지음 받았습니다. 부부는 창조 때로부터 서로 도와서 사명을 성취해야 할 최소 단위인 ‘한 몸’ 공동체였습니다.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 3:7)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언약과 복을 부부 각각에게 동일하게 적용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아브람에게도 넌지시 계시되었습니다. 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양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를 통해서 언약을 성취하실 것임을 계시하셨습니다. 부부가 ‘한 몸’이라는 사실만 고려했더라도 이 말씀이 단지 아브람의 몸을 통해서라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2장의 기근 사건을 통해서는 아내라는 존재가 남편의 사명을 위해 희생되어도 좋을 대상이 아님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브람에게 임한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 사래는 배제되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만약 아브람과 하갈을 통해 언약이 성취된다면 사라는 언약과 무관한 존재가 됩니다. 관습을 좇아 사래가 명목상 어머니이지만 실제로 복의 근원은 아브람과 하갈이 됩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고 미흡했던 것은 아직 그들이 성숙해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뼈아픈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하신 뜻을 점차 명료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해 가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큰 원칙 중 한 가지가 이 사건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남편 혼자만 사명인이고 아내는 생활 보조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사명을 감당할 ‘한 몸’이라는 점입니다. ‘가정’을 기본 사명 단위로 하고 있음은 노아의 방주에 있었던 네 쌍의 부부나,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의 가정, 신약의 사가랴 가정이나 요셉과 마리아 가정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에 있어서 한 사람만 하나님의 계시에 관심이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무관심한 상태라면 곤란해집니다. 남편은 계시를 좇아 살려고 하는데, 아내가 그 시대 풍속을 좇아 살려고 한다면 서로 도와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각각 사명인으로서의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사래는 ‘사명인의 아내’라기 보다 그런 사명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생활 공동체’라는 가정의 의미는 불신자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있어서 가정은 그것보다 더 고귀한 의미가 있는데 문화 명령을 수행할 ‘사명 공동체’라는 점입니다. 아내는 부엌데기 취급당할 때,  남편은 돈 버는 기계 취급당할 때 화가 납니다. 대체로 그런 감정은 배우자가 그렇게 취급해서라기보다는, 사명감을 잃어버림으로서 스스로를 부엌데기나 돈 버는 기계처럼 전락시켰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사명 공동체의 최소 단위인 ‘한 몸’ 관계를 파괴하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생각은 참으로 이상한 논리입니다.

하갈을 첩으로 두는 일은 아브람과 사래가 동의한 일이었지만, 가정의 기본 단위인 ‘한 몸’을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정’과 ‘사회’로 점차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면서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사래와의 ‘한 몸’ 관계 속에서 그리고 이삭의 출생 이후에는 그의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함과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인도해 가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 때문에 가정의 두 번째 구성원인 자녀도 재능 개발보다는 사명의 계승자로 양육하는 것에 초점이 두어집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자녀가 세속 정신에 물들지 않고 언약의 계승자로 자라가도록 양육하기 위해서라도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뜻을 좀 더 정확하게 배우고 깨달고 가르치려는 책임감을 굳건하게 가져야 합니다.

잠언 14: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했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뒤에 하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좋은 뜻이지만 성경은 달리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해야 할 일을 독립적으로 알고 행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보조받는 존재가 아니라, 철저하게 계시 의존적인 사람이라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혹시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따라 조급히 자기 생각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임을 확증하기까지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내일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고 오늘 하나님의 뜻을 깨뜨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성숙시켜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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