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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실하는 성도 (마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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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실하는 성도(마태복음13:1-8)

  몇 해 전 김정현씨의 『아버지』라고 하는 소설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서, 서점마다 아버지 코너가 따로 마련될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 내용은 참 소박합니다. 서기관으로 공무원 생활을 화려하게 시작한 어느 남자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끌어 가면서 생기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열심히 살아 보려고 하는데 뜻대로 진급이 되지 않고, 일에서 좌절을 맛보고, 치열한 경쟁사회 구조 속에서 조금씩 뒤처지면서 남자 주인공이 겪게 되는 내적 갈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중병이 들어 인생을 마친다는 간단한 구성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런 평범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릴까요? 또 어떤 사람들은 통곡까지 했다고 할까요? 왜 부인들은 이 소설을 읽고 남편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할까요? 왜 자녀들은 아빠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할까요? 주인공인 아버지는 참 피곤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려고, 또 자기가 가진 꿈을 조금이나마 이루어 보려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피곤이 쌓이고, 그것에 짓눌려 허덕이다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인생을 초라하게 마치게 되는 한 남자, 피곤한 남편, 피곤한 아빠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 남편만 피곤하겠습니까? 부인도 피곤하고 자녀도 피곤합니다. 우리 모두 피곤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보다도 이 ‘피곤’이라는 단어는 지금 우리에게 거인처럼 다가옵니다. 우리의 하루 일과는 마치 전쟁과도 같습니다. 몇 시냐를 따지지 않고 몇 분 아니 몇 초냐를 따질 정도로 시간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많은 약속들이 있고, 스케줄이 줄을 잇고, 업무량은 갈수록 많아집니다.

  스트레스라는 융단폭격을 하루 종일 당하다 보면 무기력증이 생기고, 결국에는 의욕이 상실됩니다. ‘이러다가 실패하는 것 아닌가?’하는 불안감은 우리의 마음에 떠나지 않는 고통으로 자리합니다. 이 모든 것이 피곤이 쌓이고 쌓여서 일어나게 되는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피곤이 쌓이면 예민해집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예민해지고, 긴장한 탓에 서로 상처를 쉽게 주고받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런 피곤에 대해서 “육체적인 피곤이냐?”고 물어온다면 꼭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육체적 피곤뿐이라면 푹 쉬고 나면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피곤은 잠을 자도, 쉴 만큼 쉬어도 잘 해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피곤이 정신적인 부분과 연관이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영적 피곤’이라는 것이지요.

  하드 필드라는 심리학자가 이 부분을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피로의 대부분은 정신적인 데서 비롯한다. 순수하게 육체적인 원인에서 오는 피로는 오늘날 극히 드물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던 간에 오늘날 현대인이 느끼는 피곤의 특징은 대부분 영적인 것이고, 정신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 종일 논밭을 매는 중노동을 하지 않습니다. 선조들처럼 하루 종일 지게를 지고 땔감을 구하느라 높은 산을 오르내리는 심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제는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 다니는 고생스러운 일을 매일같이 하는 사람들도 보이질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노동에서 이미 해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피곤해 할까요?

오늘날 우리의 피곤은 정신적인 뿌리에서, 영적인 뿌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곤은 전적으로 나쁘다. 피곤은 비정상적인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피곤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한정된 힘을 가진 육신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유한한 육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분량의 일들을 하다보면 과부하가 걸리고 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남겨 놓으신 자연적인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피곤하다고 해서 그 피곤이 나쁜 것이나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참 피곤한 일입니다. 피곤은 인생의 운명이자, 숙명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피곤을 씻어 주시고 새 힘을 주십니다. 뜨거운 날씨 가운데 살다보니 벌써 어느덧 9월이 되었고 가을의 문턱에 와 있습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합니다. 오늘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풍성한 결실을 위해 기도하고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기경합시다
  본문 4절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길가’를 직역하면 ‘길을 따라’가 됩니다. 이는 밭고랑 사이를 따라 만들어진 길을 가리키는데 이 길은 뭇사람들의 발길에 의해서 단단하고 반질반질하게 다져집니다. 본문에서는 이 길이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사람을 의미합니다. ‘길가’의 결정적 특징은 마음이 굳어져 새로운 씨가 자신의 내부에 뿌려질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영혼이 진리에 대하여 철저히 거부하고 배격하는 비극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만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만을 고집하는 교만과 독선입니다. 복음의 중대성과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여 복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경솔한 무지와 부주의한 태만을 의미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새들이 와서 먹어버립니다. 팔레스틴에서 약 300여종의 새가 있습니다. 여기서 새는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을 의미합니다. 사단의 다양한 모양과 역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은 복음의 씨앗은 그대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단에 의해서 신속히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길가밭과 같은 사람은 씨앗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거부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선과 악, 하나님과 사단, 천국과 지옥의 길이 판가름 나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사단은 지금도 기회만 있으면 거부된 씨앗을 앗아가기 위해 혈안이 된 채 두루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가장 심오한 철학이고, 최첨단의 과학이며, 가장 탁월한 문학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영예로운 의무는 바로 하나님과의 사랑을 키워 나가는 일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광대한 분이기에 인간의 모든 생각과 사상은 그분의 광대하심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깊이를 제대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야를 파고들어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나면 대개 자신의 성과에 자부심을 갖게 마련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깊이를 측량할 탐지기도, 하나님의 넓이를 가늠할 망원경도, 하나님의 내면을 꿰뚫을 현미경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더라도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그저 숙연해질 뿐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기로 진지하게 마음먹은 사람들은 지구 한구석에서 의미 없이 살아가는 삶에 절대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시도는 인간의 생각뿐 아니라 마음까지 겸손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영혼에 위안을 가져다줍니다. 갈등에 휩싸인 영혼을 평강으로 이끌고, 슬픔에 눌려 있는 영혼을 위로하며, 복잡한 생각을 명쾌하게 정리해 주는 돌파구는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길가와 같이 완고하고 철벽과 같습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길가와 같은 마음을 파고 뒤엎어야 합니다. 기경해야 합니다. 좋은 밭이란 굳은 땅을 갈아 일구어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바로와 같은 강팍한 마음을 기경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기경해야 옥토가 되고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만하고 악한 마음을 기경하여 풍성한 결실을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돌을 파냅시다
  본문 5-6절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팔레스틴에서 돌밭은 매우 흔한 지형입니다. 석회석 지층 위에 얇은 지표가 형성되어 있어서 자연히 바위의 온기에 의해 뿌리가 쉽게 나오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뿌리가 계속 성장할 수 없는 곳을 가리킵니다. 길가와 같은 사람들은 진리를 전혀 인식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돌밭의 경우와 같은 사람들은 진리를 즉흥적이고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을 대표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신앙 인격의 천박성 또는 경박성을 뜻합니다. 이런 자들은 행동과 말은 빠르나 지속적이거나 정확성이 없습니다. 언제나 허공을 치고 실수하고 문제를 만듭니다. 도움은 커녕 피해만 줍니다. 돌밭은 겉은 부드럽지만 그 속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은 완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직도 부서지지 않고 자기 아집과 주장으로 가득찬 상태의 사람입니다. 복음의 뿌리가 내려지지 않아서 결실을 할 수 없습니다. 일관성과 성실성 그리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분이나 감정에 치우치거나 모든 것을 맡기는 불안한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은 말의 중요성과 그 엄청난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에게는 물론 물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였는데, 물 한 잔을 앞에 놓고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면 물은 가장 아름다운 결정, 즉 완전한 육각수를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게 되면 우리 몸에 무한한 면연력이 생겨 더욱 건강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물 한 잔을 놓고 짜증을 부리고 욕설을 퍼부으면 물의 결정은 산산이 부서져 버려 인체에 해를 주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탄이라는 말을 각 나라 말로 물 컵 위에 붙여 놓았더니 물의 육각수가 다 깨지고 물의 결정에 구멍이 나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사랑한다’, ‘감사한다’라는 말을 붙여 놓았더니 물은 완전한 육각수로 바뀌어졌습니다. 사랑과 감사를 표현했을 때 물은 고상한 품위를 더했고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한 빛을 발했습니다.

  돌밭 같은 마음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듣고서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말씀의 뿌리가 없어서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곧 시들어 버리는 상태입니다. 누구에게나 감정이 있으나 말씀의 지배와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감정이 격하면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모든 것을 다 파괴합니다. 자살과 살인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늘 조심해야 하고 멀리 해야 합니다. 반드시 손해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돌밭은 돌을 파내면 됩니다. 미움과 감정과 악한 돌들을 파내야 합니다. 깊이 뿌리박은 돌들을 힘써서 파내야 합니다. 돌을 파내면 옥토가 됩니다. 우리 마음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불신앙적이고 비신앙적인 돌들을 다 파냅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옥토와 같은 성도가 되어 이 가을에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풍성한 결실을 하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가시를 뽑읍시다
  본문 7-8절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가시떨기’의 헬라어 ‘아칸다’는 열매가 없어서 쓸모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팔레스틴에서는 가시떨기를 사계절에 볼 수 있으며 그 종류도 약 200여 가지가 된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가시는 주로 악을 행하는 자, 이스라엘의 적, 저주, 황폐함 등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의 가시떨기는 천국복음에 대한 신앙적 장애요소로서 복음의 씨앗 기운을 꺾어 버리게 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팔레스틴 땅에서는 개간된 밭 옆에 흔한 가시떨기가 자라는데 이곳에 밀이나 보리씨가 떨어져 같이 자라는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때 곡식 낟알의 푸른 껍질까지는 생기지만 내용물은 전혀 없다고 합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왕인데 그녀는 경건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습니다. 여왕의 아버지인 켄트 공작도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의사가 공작을 위로하기 위해 그의 위대한 정치상의 공적과 여러 가지로 베푼 선덕 등을 열거하며 공작이 죽은 다음에 틀림없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하자, 공작은 그 의사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공작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귀한 명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수양이나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런 것으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죽으실 이유는 더욱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진리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분은 전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을 만큼 구원의 공로, 속죄의 공덕을 우리를 대신해 이루셨습니다. 그분을 믿는 것이 어렵거나 힘든 일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마음으로 그분을 믿고 입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면 됩니다.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마음에 받아들이며 그분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단의 세력입니다. 사단은 사람의 마음을 가시떨기로 만듭니다. 가시밭 같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에 대한 염려와 재리에 대한 유혹으로 인하여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고 마는 경우입니다. 가시가 있으면 다른 식물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결실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거름을 주고 정성을 드려도 소용없습니다. 가시를 과감하게 뽑아야 합니다. 가시를 뽑다보면 잘 뽑히지 않아 힘도 들고 가시에 찔려 피도 날 것입니다. 어떤 희생과 대가라도 지불해야 합니다. 반드시 옥토가 되고 결실하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염려와 재리에 대한 유혹을 뽑아 버립시다. 신앙과 결실에 방해되는 모든 가시를 뽑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새 사람이 되고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지금까지 어떤 결실을 하였습니까? 우리 모두 이 가을에 기경하고 돌을 파내고 가시를 뽑음으로 옥토가 되어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풍성한 결실을 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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