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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깊이 졸더니 (행 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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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졸더니 (행 20:7~12)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문을 예배 때마다 함께 고백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중보 기도문도 바로 이 주기도문을 응용해서 드리는 기도문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그렇게 살고 있는지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그렇게 힘쓰고 있는지 아울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살고 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40여 일간 아프간에 선교 겸 봉사활동을 위해 떠났던 샘물교회 형제자매들이 납치되고 그 중 2명이 순교의 피를 것을 우리는 생생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놀랍게도 먼저 풀려난 두 분의 여성 가운데 사실은 다른 사람이 풀려날 것이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먼저 풀어주라고 하여 대신 다른 사람이 풀려난 것은 두고두고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오죽하면 납치범이 감동하여 남은 여성으로 하여금 가족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낼 수 있도록 하였겠습니까?

물론 그들이 그곳에 간 것이 잘 했느냐 잘못했느냐 보낸 것이 잘 한 일이냐 잘못한 일이냐고 온 나라가 토론하며 비난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감싸기도 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의 결과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요 바라기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고귀한 두 생명의 희생을 허락하신 것은 그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알도 아닌 두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열매를 하나님께서 기대하신다고 하는 것을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은 아프간을 위해서요 또 한 알의 밀알은 바로 이 땅을 위한 것인 줄 압니다. 이 땅의 먼저 믿은 그리스도인들과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의 화살을 돌이고 있는 모두를 위해 저들은 고귀한 피를 흘렸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가장 귀한 생명을 주신 주님을 위해 그러면서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시는 그분을 위해 그 은혜를 입은 친구로서 또한 주님을 위해 주님이 친구라고 부르기를 원하시는 모두를 위해 나 역시 생명을 바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귀한 일은 없을 줄 압니다.

이를 위해 저는 이번 주간 모 국가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을 교육하며 또 말씀을 전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겉으로는 기독교를 허락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외국인이 자국 내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일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몹시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간 대학원 총동문회 수련회에 참석하여 기도회를 하던 중 아프간에서 납치 되어 억류되어 있던 모든 형제자매들이 풀려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막 전해 듣고 감사하며 기도회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막 숙소로 들어왔는데 모 국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월요일에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입니다.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면 먼저 장로님들이 허락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시간이 촉박해서 어렵기는 하지만 비자도 무사히 받을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한 비행기 표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장로님들께서는 먼저 호쾌하게 동의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행사를 통해서 비자 신청을 했는데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비행기 표를 예약하는데 딱 아홉 자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성도 여러분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무사히 다녀올 수도 또 은혜롭게 말씀을 전할 수도 없습니다. 또 갑작스럽게 아프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사모 혼자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또한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번 주간이 교회의 기도주간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모든 시간을 맞추어 하나님께서 이 일을 계획하신 줄로 알아 더 뜨겁게 온 교회가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왜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말씀의 사역에 온 힘을 다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두로아에 먼저 도착해 있던 동역자들과 합류한 바울은 그곳에서 칠일을 머물며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그리고 안식일 다음 날, 그러니까 주일날 온 교회가 교제의 식사를 나누기 위해 모였을 때에 바울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음 날에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 한밤중까지 신자들에게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시작해서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일일 부흥회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릅니다. 아니 다시는 두로아에 오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다음날 떠나기로 한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전해 주고 싶은 모든 말씀을 다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두로아의 성도들 역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잠시 교제의 식사 시간을 빼고는 온 종일 계속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밤중이 되어 다락방에 등불을 켜 놓고 계속해서 바울은 말씀을 전하고 성도들은 그 말씀을 귀담아 듣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두로아 성도들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온 힘을 다해 말씀을 전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도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어떻게 바울이 이렇게 온 종일 말씀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 말씀을 귀담아 듣고 있는 성도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바울이 말씀을 온 힘을 다해 전한다고 해도 듣는 사람들이 시큰둥하다면 무슨 힘이 있어 말씀을 전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이렇게 전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성도들로부터 시작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전하는 사람이 시원찮아도 듣는 이들이 귀담아 들어주면 전하는 사람도 힘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말하기를 바울이 쓴 편지들을 보면 참으로 주옥과 같은 말씀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런데 글로 쓰는 것에 비해서 말은 좀 시원찮았다고들 합니다. 소위 말주변은 적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두로아 성도들은 그런 바울이 전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있습니다. 어쩌면 듣는 이들의 그 열심에 감동이 되어 바울이 이렇듯 오래 말씀을 전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이도 중요하지만 듣는 이들의 태도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듣는 이들이 귀담아 들어주게 되면 전하는 이에게 힘이 넘치게 됩니다. 그것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말씀 한 말씀은 마음에 새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들어주게 될 때 그 마음이 전하는 사람의 마음에 와 닿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감동이 되어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들을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아무리 귀담아 말씀을 들으려고 해도 사람의 능력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감동하시게 되면 전하는 사람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말씀을 전하게 되고 듣는 이들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말씀을 듣게 되니 이 말씀이 놀랍도록 전하는 이와 듣는 이 가운데서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전하고 듣기에 앞서서 성령께서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위에 큰 능력으로 역사하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작 전에 중직자들이 저에게 오셔서 함께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며 안수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 것이요 예배를 시작하면서 성령 임재를 간구하는 찬송을 부르며 함께 성령 임재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 하시게 되면 그 말씀이 큰 능력과 감동으로 전해지게 되는 것이요 듣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도 큰 은혜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을 전하는 이와 듣는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며 성령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말씀을 전하고 듣는 귀한 시간이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길어지고 이윽고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말씀이 이어지니까 성도들이모인 다락방에 등불을 많이 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성도들 가운데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이 창문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는데, 바울의 말이 너무 오래 계속되자, 잠이 들어 그만 삼층에서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쫓아가 그를 일으켜 보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아니 큰 은혜 가운데 말씀을 전하고 듣고 그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씀을 나누고 있는 가운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 얼마나 당황스럽습니까?
그렇게 졸렸다면 차라리 안전한 곳에 가서 쉬기라도 할 것이지 또 그 위험한 자리에는 왜 앉아 있었단 말입니까? 아니 은혜를 망쳐도 분수가 있지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다른 시간도 아니고 말씀을 듣다가 그것도 아주 은혜롭게 말씀을 전하고 듣다가 이런 일이 생기니 이처럼 낭패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은혜가 있는 곳에는 꼭 이렇게 우리를 시험하고 상처받게 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설사 마귀가 주는 시험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듯 시험거리를 허락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도 꼭 우리는 무언가 마음을 잡고 잘 해 보려고만 하면 꼭 시험거리가 생기고 상처 받을 일이 생기는 일은 또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언제든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는 것이요 그래서 더욱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유두고가 왜 떨어져 죽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깨어 있지 못하고 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온 종일 말씀을 듣느라 피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도 깨어 있을 수 없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되어 죽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만치 가서 간절히 기도하고 돌아와 보니 제자들이 그만 잠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너무도 피곤했을 것입니다. 힘들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도 그만 잠이 들고 말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들은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깨어서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영은 원하지만 육체가 약하구나.”
그렇다면 약한 육체를 가지고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육체가 약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 나는 너무 피곤해서 감당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포기하라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내 약한 육신으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능력으로 도와주시기를 먼저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자기의 피곤함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너무도 피곤합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우리 몸이 따라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도 기도하기를 원하지만 그 피곤한 몸 때문에 자신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말씀을 듣는 시간에조차 졸지를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주어를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해야지, 나도 기도해야지가 그런데 그 일을 하기에는 너무 힘들어, 기도하기에는 너무 피곤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로 이런 일을 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로 기도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능력으로 나와 함께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나도 그 일을 할 수 있고 나도 기도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은 더 이상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하게 하시는 일이요 내 안에서 성령께서 친히 나를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나는 단지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일하시도록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내가 너무도 피곤하고 지쳐있다 싶으면 먼저 기도하십시오. 성령께서 내 안에서 나를 지켜 피곤하기에 오히려 더욱 맑은 정신으로 귀담아 말씀을 들으며 은혜 받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이상하게 전혀 피곤하지도 졸리지도 않고 또렷하게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내게 닥쳐오게 될 때 내 입에서 결코 불평과 원망의 말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면 그 순간 나는 거기에 매여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점점 더 힘들고 짜증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얼마나 놀랍고 귀한 은혜를 내게 베풀어 주실지 기대가 됩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면 불평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 놀랍게도 감사할 일로 바뀌게 되더란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 일단은 입을 다무시기 바랍니다.

먼저 침묵하시기 바랍니다. 보십시오. 여기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지만 그 안에 있던 성도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큰 일 났다고 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요 그들은 온 종일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런 믿음이 또한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까 오히려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을 전하고 있던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두고가 창문에 걸터앉은 채 잠이 들었다가 그만 떨어져 죽었지만 조금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전하던 자리에서 내려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를 껴안고 믿음으로 선포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청년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유두고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 먹은 후에 날이 새도록 오랫동안 설교를 하고 떠나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살아난 젊은이를 집으로 데려가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보십시오. 조금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차분히 하나님의 역사를 간구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로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그들에게 죽음이 무어 두렵겠습니까? 설사 죽었다가 다시 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니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누가 죽인다고 해도 더 이상 겁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유두고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래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셔” 라고 하면서 마음을 다시 새롭게 하지를 않겠습니까? 얼마나 큰 증거가 되었습니까? 그러니까 화가 변하여 복이 된 것입니다. 천하에 죽일 놈 아니 죽은 놈이 천하에 산 증거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에 있던 모든 성도들과 그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는 모든 이들에게 큰 위로와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좀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나무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믿음으로 고백하고 축복해주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하 은혜를 받으려면 먼저 이렇게 잘못을 저지르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일이 없도록 먼저 깨어 있어 기도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니까 내 힘으로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사로잡아 주시고 주님이 항상 큰 능력과 은혜로 나를 이끌어주시기를 항상 간구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닥쳐오고 상처될 일이 있거든 이 일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가 기대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감사합니다. 하고 그렇게 믿고 고백하십시오. 왜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습니까? 물론 위험한 곳에 앉아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잠들었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항상 깨어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도록 나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어 하나님 안에 열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화도 변하여 복이 되는 귀한 삶을 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화도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되면 더 이상 내가 시험 받을 일은 없습니다. 아니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게 되면 그래서 주님이 나를 도우시고 주님이 나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고 주님이 나를 인도해 주시면 더 이상 걱정할 것도 없고 상처 받을 일도 없고 시험될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누가 나를 욕하면 기분 나쁘다고요? 하지만 그 기분 나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누가 나를 욕하면 그로 인해서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게 될 일이 넘치겠구나 하고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게 되면 우리가 그 더러운 기분이 사로잡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금방 그 기분을 털어버릴 수 있습니다. 비록 나는 육신이 약하지만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며 나를 도우시는 성령의 은혜 가운데서 내게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오늘을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불평과 원망도 감사와 찬양으로 바꾸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항상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되는 귀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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