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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는 어떤 곳인가?(9) :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충만한 곳" (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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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어떤 곳인가? (9)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충만한 곳" (살전1:1-10)

지난 주일에는 신약에 나타난 이방인 교회들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회였던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신약에 나타난 이방인 교회들 중에서 두 번째로 가장 이상적인 교회였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가장 사모하고 가장 사랑한 교회였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두 번째로 가장 사모하고 가장 사랑한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유럽 대륙에 상륙해서 제일 처음으로 세운 교회였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유럽 대륙에 상륙해서 두 번째로 세운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빌1:8)고 고백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얼굴 보기를 열정적으로 힘쓴다고 고백했습니다.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살전2:17).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나의 사랑, 나의 사모,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빌4:1)이라고 불렀는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우리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요 영광이요 기쁨”(살전1:19) 이라고 불렀습니다.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이방인 교회의 성도들이었지만 참으로 행복한 성도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교회를 개척한 나그네 목회자였지만 참으로 행복한 목회자였습니다. 서로서로 보고 싶어하고 서로서로 사모하고 서로서로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빌립보 교회가 “교제와 봉사와 기쁨”이 충만한 교회였다고 말씀 드렸는데, 오늘 아침에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충만한 교회였다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교회와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충만한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충만한 것을 지적하면서 저들을 칭찬하고 또 칭찬했습니다. 그러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충만했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1:2-3).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충만했는데 무엇보다 먼저 믿음이 충만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1:8). 사도 바울은 이방인인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박해 중에서도 복음을 받은 후 믿음의 삶을 실천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너무 감사하고 너무 기뻐했습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기쁘고 가장 감사한 일은 복음을 받은 새 신자들이 믿음의 삶을 실천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형식적으로만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기서 “믿음의 역사”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영어로는 work of faith 입니다. 믿음에는 살아서 역사하는 산 믿음이 있고 죽어서 역사하지 않는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 있고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살아서 역사하는 산 믿음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 너무너무 기뻐하면서 애정 어린 마음으로 1장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1:4-8). 저들의 살아있는 역사하는 믿음을 보니 저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인 것을 분명하게 안다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저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말로만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과 확신으로 받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저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도를 받으므로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저들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비롯한 유럽 곳곳에 널리 들리게 되었고 저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게 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행복한 이방인 성도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극진한 사랑과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행복한 이방인 교회의 목회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2장에서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살아서 역사하는 믿음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2:13,14,17,19,20).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믿음이었고, 고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믿음이었고, 살아서 역사하는 믿음이었다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3장에서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살아서 역사하는 믿음을 묘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계속해서 믿음 안에서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었다고 까지 말하면서, 저들이 믿음 안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이제는 살 것 같다고 고백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디모데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살전3:5-10). 여기서 사도 바울은 신자들의 믿음 생활이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는 생사와 관련된 문제임을 지적했습니다. 신자들의 믿음 생활이 기쁨과 감사의 근원이 됨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마지막 관심도 신자들의 믿음 생활의 성장임을 지적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의 마지막 관심도 저들이 키우던 양무리의 믿음 생활과 기도생활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 중에서도 믿음의 역사가 지속된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신자들이 믿음을 상실하게 된다고 서글픈 마음으로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둘째,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1:2-3).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과 사랑이 불가분적임을 나타내 보여준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가 함께 공존한 교회였습니다. 사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고 믿음이 없는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닌 수고가 따르는 실천적인 사랑을 지닌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사랑의 수고’를 지녔다고 지적했습니다. 여기 사랑의 수고를 영어로는 ‘labor of love’라고 했는데, labor 라는 말 속에는 ‘수고’ ‘노동’이란 뜻과 함께 아기를 낳을 때 겪는 산모의 ‘산고’와 ‘진통’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참 사랑에는 아기를 낳고 아기를 기를 때 엄마가 지니는 ‘산고’와 ‘진통’과 ‘수고’를 포함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사랑의 수고와 사랑의 산고가 있었다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사실 그와 같은 사랑의 수고와 산고의 근원은 사도 바울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기를 낳아 키우는 유모처럼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키웠기 때문에 결국 저들도 엄마의 사랑의 수고와 산고를 지니게 되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살전2:7,8). 사랑은 사랑을 낳았고 수고는 수고를 낳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랑과 수고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저들도 사랑과 수고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저들에게 사랑의 수고가 자기들끼리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온 마게도냐 형제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4:9-11).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행복한 성도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소문과 사랑의 실천이 세상에 널리 퍼진 교회와 성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교회의 성도들이었는데 어떻게 저들의 삶 가운데 사랑의 수고가 넘치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사랑의 수고가 넘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사랑의 수고가 귀여운 어린이들에게 전해지고, 구역식구들에게 전해지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전해지고, 병든 이웃들에게 전해지고, 불행한 조선족 아이들에게 전해지고, 수고하는 선교사들에게 전해지고, 수해를 당한 북한 동포들에게 전해진다면 여러분들도 사랑의 수고가 넘치는 행복한 신자들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편지를 쓰면서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이 더욱 더 자라고 더욱 더 풍성해진 것을 칭찬하며 자랑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살후1:3,4). 여기서도 믿음과 사랑의 불가분성을 지적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이 더욱 더 자라갔고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졌다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본래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저의 가슴에도 사랑을 조금씩 심어주셔서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조금씩 지니게 되었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제가 금년 1월 3일 아침에 쓴 글의 마지막 부분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읽어드립니다.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 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2007년 1월 3일 아침 교회로 운전하며 오는 차 속에서 쓴 글”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풍성한 참으로 행복한 교회였습니다. 행복은 믿음이고 행복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의 인내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1:2-3).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불가분적임을 나타내 보여준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함께 공존한 교회였습니다. 이상적인 교회였고 행복한 교회였습니다.

사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불가분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선언한 믿음의 예찬자였지만,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면서 사랑을 예찬했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바울의 수고도 전도도 목회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먹고 마시다가 죽어도 된다고 고백하면서 소망을 예찬하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은 믿음과 사랑도 충만했지만 무엇보다 재림과 부활과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현세적인 문제에 거의 모든 관심을 쏟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사는 ‘마라나타’ 즉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였는데, 오늘 일부 한국교회 신자들의 인사는 ‘부자 되세요’ ‘복 받으세요’ ‘건강하세요’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은 평생 요한 계시록을 강해하면서 조선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천국을 바라보게 했는데 오늘 한국교회 일부 목회자들은 정치와 경제와 축복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한국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정치 경제 축복에 집착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재림과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1:3). 재림과 천국에 대한 소망은 추상적인 망상이 아닙니다. 고난과 환난을 참고 견디는 인내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5:3,4). 얼마나 귀하고 귀한 사도 바울의 고백인지 모릅니다. 참된 소망은 환난을 통해서 그리고 인내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고난]을 받았느니라”(살전2:14).

결국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재림의 주님께서 조만간 강림하실 것을 분명히 믿고 있었고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5:1,2).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참으로 축복받은 성도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조만간 구름 타고 재림하실 것을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저들이 재림의 소망가운데서 빛 가운데서 살고 있었음을 확인해주었고 변호해주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살전5:4,5).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참으로 축복받은 성도들이었습니다. 재림의 소망 가운데서 살고 있었고 사도 바울의 확인과 변증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저들이 세속에 물들지 말고 영적인 잠을 자지 말고 깨어서 재림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지니고 살아가라고 권면했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소망의 투구를 쓰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6-10).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을 바라보면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을 살아가라고 권면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너무나 아름다운 감동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충만했던 데살로니가 교회가 너무나 아름다운 교회였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충만한 이방인 신자들을 바라보는 사도 바울이 너무나 행복한 목회자였고 그리고 사도 바울의 애정 어린 사랑의 권면이 너무나 아름다운 권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도 아름다운 교회였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도 너무너무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소망의 인내 가운데서 살아가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하신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권면의 말씀 한 마디를 더 소개하려고 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라는 아름다운 권면의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철원이 묘에 갈 때 마다 읽곤 합니다. 앞서 간 성도들과 천국에서 모두 반갑고 기쁘게 만나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면서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라는 아름다운 권면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3-18). 믿음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들만이 가슴으로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권면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하신 보석과 같은 권면의 말씀 한 마디만 더 소개하고 설교를 마칩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너무너무 좋아하시던 말씀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사랑하며 암송하는 말씀입니다. 유아부 유치부 어린이들도 모두 암송하는 말씀입니다. 이 보석 같이 아름다운 말씀을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만 전했습니다. 살전5:16,17,18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암송하겠습니다. 사실 믿음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암송할 수 있는 보석 같은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강변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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