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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롬 3: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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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롬 3:21-26)

지난 2005년에 홍콩에서 WTO 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에 이를 반대하는 데모를 벌이던 우리나라 농민시위대원 600여 명이 홍콩 경찰에 의하여 연행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현실적인 원인은 '시위문화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국내에서의 시위는 우리가 흔히 보다시피, 시위대가 경찰저지선(police line)을 돌파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거의 정해진 순서와 같고 각목이나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돌을 던지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오히려 영웅시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홍콩 경찰들은 우리나라 경찰처럼 관대하지(?) 않았고 시위대가 폴리스라인을 조금만 넘어와도 그것을 저지했으며 경찰의 방패에 몸만 닿아도 폭력으로 간주하고 대응했습니다.
  그러니 국내에서는 폴리스라인 넘나들기를 우습게 여기던 시위대원들은 홍콩 경찰의 반응을 '과잉진압'이라고 여겨 흥분하게 되었고 처음에 비폭력적인 시위를 하기로 했던 의도와는 달리 끝내는 우리나라에서 하던 것과 꼭 같이 쇠파이프와 각목을 휘두르면서 홍콩 경찰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외신들은 한국 농민 시위대가 연행된 이유를 두고 "쇠파이프와 죽창을 휘두르고 홍콩 경찰의 방패와 진압봉을 빼앗았으며"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국제사회의 상식에 따르면 그런 행동은 어디까지나 '폭동'이며 엄연한 불법행위임에 무슨 왈가왈부할 여지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위 도중에 경찰에게 물리적으로 저항하고 폭력 행사하는 것을 오히려 시위대의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자들은 끝까지 홍콩 경찰이 '과잉 진압'을 했으며 '폭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시위문화의 차이'라기보다는 '법질서 의식의 차이'이며 '경찰의 진압 방식의 차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공의에 대한 상식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아직도 '공권력을 가지고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치안 행위를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은 너무나도 약하고 반면에 '내가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서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잘못된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공의에 대한 이런 선입견적인 착각과 무지는 영적 세계에서도 나타납니다.
  바로 '사람들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의'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집행하시는 의'를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현상입니다.
  그 결과 자기 딴에는 의롭다고 여기고 있지만 사실은 아주 저질적인 수준에서 벗어날 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모든 인간적인 편견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참되고 차원 높은 의'가 무엇인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함께 깨닫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의의 근간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본문 21절과 22절에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이제는"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원래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두 단어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사람이 스스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운 상태에 이르려고' 했었지만, 지금부터는 '의'에 대하여 전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새로운 의는 바로 "율법 외에" 즉 '율법과는 다르게'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율법이 제시해 주는 길은 이미 '완전타락'에 빠진 모든 인간으로서는 스스로 성취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길'이 언제나 누구든지 보고 따라갈 수 있도록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나타났으니"라는 말은 '이전에 없던 것이 새로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존재가 불분명했던 것이 확실한 상태로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는 말씀 역시 그런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이 정의하고 요구하는 것과 아주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의의 완전성과 적법성은 바로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이미 증거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 성경 전체는 이 '하나님의 의'와 상반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사실은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이제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 '새로운 하나님의 의'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믿음이라는 과정을 통하여'라는 뜻으로서 '믿음'이 사람을 구원하는 주체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매개체가 됨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 역시 구원 받게 되는 '공로'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방편'으로 사용될 뿐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하나님의 의는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듯이 어떤 '법적 행위'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마음'에만 직결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즉 '적용되는' 의이며, "차별이 없는" 즉 사회적 배경이나 과거의 행위와도 아무 상관없이 누구나 다 얻을 수 있는 의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이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것인데,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고 증거된 것이며, 사람의 출신 배경이나 인종이나 성격이나 능력에 관계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성립되는 공평한 의입니다.
  이것은 의에 대한 통상적인 개념을 통째로 바꾸어 버리는 놀라운 선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전까지 알고 행하던 의와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하나님의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의'라고 하면 일단 도덕과 윤리를 떠올립니다.
  '공의' 하면 '국가나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공통규범에 합치하는 행동을 스스로 취하는 것'을 연상하면서 곧 법률과 직결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의'도 '의'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수준과 사회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그 출발부터가 사람의 철학이 정의하는 의나 인간사회가 추구하는 의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최고의 의, 가장 본질적이고도 중요한 의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옳고 그름 사이에서 옳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정의 구현'에 있는 것도 아니며 '사람의 양심작용'에 기인한 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본질과 인격과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제일 의로운 일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수구에서 제 아무리 제일 깨끗한 것을 찾으려 한다 해도 결국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다 더러운 것이며 오염 물질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로 인하여 완전타락한 인간이 제 아무리 도덕이나 윤리니 법이니 하면서 스스로 의를 추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염된 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말 깨끗하고 순수한 것은 오직 깨끗한 물이 있는 곳에서부터만 나올 수 있으며, 더러운 것을 씻어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는 그런 깨끗한 물부터 먼저 구해야 합니다.
  꼭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불의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오직 '완전히 순결하시고 100퍼센트 의로우신 그리스도'께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도덕과 윤리를 따라 정의하는 의는 그 출발부터 이미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그런 '율법 외에 나타난' 이 새로운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참된 의를 찾을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의를 얻는 방법은 '사람의 노력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따라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23절부터 24절까지 기록하기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은 그런 불의한 죄에 대하여 사람 스스로는 해결할 길도, 힘도 없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원죄는 '모든 사람'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악하게 만들었으며, 거기에다가 각각 '범하는' 자범죄까지 합쳐짐으로써 그 어떤 사람도 '죄인의 범주'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가벼운 죄'니 '중한 죄'니 하고 따지는 것은 사람끼리 비교할 때의 이야기이지, 하나님의 눈에는 그저 오십보백보의 차이에 불과하며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사람이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과 부분적으로 공유했던 속성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제는 죄로 인하여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과 선으로는 결코 그런 영광스러운 상태로 회복될 길이 없어졌으며, 모든 사람, 즉 남보다 조금 더 착한 사람까지 포함해서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만한 의의 기준에 아무도 도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타락하여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나면, 이제는 '어떻게 그 저주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그 질문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이 바로 본문의 "의롭다 하심" 곧 '칭의'의 선언입니다.
  이 '칭의'라는 말은 원래 헬라어의 법정용어로서 '저주' 혹은 '선고'에 반대되는 말이며 쉽게 말해서 바로 '무죄선언'입니다.
  판사가 일단 무죄선언을 하면 그 당사자에 대한 모든 고소 기록까지도 삭제되어 버리고 법적으로 말할 때에는 마치 고소당하지 않은 사람처럼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칭의를 받은 죄인 역시 마치 아예 정죄당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결백한 사람'이 됩니다.
  즉 '칭의'란 '사면'이란 뜻이 아니라, 원래 분명히 불의하고 죄인이었던 사람을 한 순간에 그냥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의 상식으로 볼 때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판사라면 분명히 죄 있는 사람에게는 무죄방면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천주교에서 '칭의'를 '성화'의 결과라고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인간적인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는 것이 바로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그런 하나님께서 불의한 죄인을 무조건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사람 생각으로서는 도무지 풀 수 없는 이 딜레마를 하나님께서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하게 해결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입니다.
  "구속"이란 '값을 지불함으로써 해방시키다'라는 뜻으로서, 노예의 주인에게 값을 주고 그 노예를 사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죄의 노예 상태에 있던 죄인을 우리 예수님께서 당신의 보혈로 대신 값을 다 지불해 주심으로써 단번에 해방시켜 주신 것, 이것이 바로 '구속'이며, 바로 이 '구속' 때문에 분명히 죄인인 자에 대한 '무죄선언' 곧 '칭의'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며 동시에 '죄의 삯은 사망'일 뿐이라는 하나님의 공의 또한 아무 모순 없이 만족시키신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고마운 '무죄선언'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본문은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것입니다.
  은혜란 말을 아주 쉽게 표현하자면 '무조건적인 호의'입니다.
  사람 편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하여 먼저 어떤 시도나 노력을 해서가 아니라, 죄인 구원에 대한 모든 주도권과 시발점은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에만 전적으로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어 마땅했던 죄인을 살려주는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했던 일을 성취시켜 주었으며 사람 쪽에서는 사실 아무 노력도 없이 공짜로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판사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은 아무리 감옥 안에서 모범수로 산다 해도 그것이 공로가 되어서 구원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특사를 베풀어 주기만 하면 아주 간단하게 풀려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라는 이 말씀 속에 바로 그처럼 죽어 마땅한 죄인을 무조건 살려 주신, 극단적인 '신적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것을 두고 '무로부터의 유의 창조'라고 불렀습니다.
  무로부터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나, 아무 구원해 줄만한 이유도 조건도 환경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이나 꼭 같다는 의미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이란 사람의 공로라는 기존의 재료를 사용한 '가공행위'가 아니라 무조건이라는 무의 상태에서 구원이라는 유를 완전히 새로 만들어내신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가리켜 '재창조 사역'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대속적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며 오직 기독교만이 전파하고 있는 구원관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 23절과 24절을 두고서 '로마서의 핵심'이며 '성경 전체의 핵심'이라고까지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구원 받기 위한 의는 선행이라는 노력을 해서 얻게 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고, '나의 공로로써 획득하는 의' 곧 어떤 인위적인 '득의(得義)'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의' 곧 신적인 '칭의(稱義)'를 입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의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을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함'입니다.

  25절과 26절 말씀에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대속의 구원을 베풀어 주신 목적을 가리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수차례 반복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일이 되었습니까?

  우선 그런 화목제물을 제공하신 쪽이 바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피로 인하여"라는 말씀은 이 화목제의 제물이 무엇이었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자 하나님의 피'라는 아주 값비싼 제물이었습니다.
  사람 쪽에서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막혀 버렸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람 쪽의 어떤 대가 대신에 오히려 성자의 보혈을 사용하셨으니, 이 얼마나 '의로우신' 일이었습니까?

  또한 그 하나님의 의는 "길이 참으시는 중에" 나타내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을 향하여 그 무엇보다도 진노와 심판으로 나타나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진노를 참으시고 심판을 연기하시면서까지 기회를 더 주셨습니다.
  본문에 "간과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모르고 지나치다'는 뜻이 아니라 '관대하게 보아주다, 너그럽게 넘겨보다'라는 뜻입니다.
  즉 다시 번역하자면 "사람이 전에 지은 죄를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사 벌하지 아니하시고 기다려 주신다"라는 말씀입니다.
  완전히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신 까닭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라는 '화목제물'을 세워 놓으시고 그 죄값을 대신 치르게 하심으로써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놓으시고 죄인의 심판을 연기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26절 끝에 보면 "자기도 의로우신" 것처럼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신자의 의로움이라는 것도 자기 자신의 성화과정에서 나오게 된 부산물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는 것' 다시 말해서 '원래 창조 받을 때의 영광스러운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의로우심은 갈수록 더 사람의 상식과 기대까지도 완전히 초월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의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볼 때 그 어느 구석에도 '사람의 의'가 설 자리는 전무합니다.
  죄인 대속을 위한 화목제물도 하나님 편에서 제공해 주셨고 그 회개의 기회도 하나님 편에서 기다려 주셨고 그 의의 모범 역시 오직 하나님의 의로우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시기 위함"일 뿐이라는 사실은 무슨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사람의 의'를 칭찬하고 높이는 일에만 열심을 냅니다.
  조금 착하게 살고 선행을 했다 하면 성자니 성녀니 하면서 떠받들면서 그들의 유물에 입 맞추고 그들의 동상 앞에 기도까지 올리는 것입니다.

  그 성자나 성녀들이라는 자들이 사람의 대속을 위해서 자기네 몸을 '화목제물'로 바쳐 주었습니까?
  본질적으로 꼭 같은 사람이며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오십보백보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교황을 가리켜 '거룩하신 분(Your Holiness)'라는 존칭으로 부르면서 그 앞에 절합니다.
  교황이 '오래 참아 주어서' 죄인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습니까?
  '예수를 믿어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이 '교황이 무흠하고 의로우셔서' 이루어진 일입니까?
  정말 곁에 있기만 해도 함께 천벌 받을 것이 두려워지지 않을 수 없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의로움', 원래부터 '하나님의 의'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그런 하나님을 인하여 '사람이 얻게 된 의로움'까지도 그 모든 칭찬과 감사는 오직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런 기이하고도 은혜로우신 의를 베풀어 주신 목적이며 성경이 명령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매사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특히 죄인 구원에 대하여서는 더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을 똑 바로 믿는 신자,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아니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도 결코 높이거나 숭상하지 아니합니다.
  목사이든지 평신도이든지,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의는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베풀어 주신 의' 이것 한 가지만 공통적으로 있을 뿐이지, 아무도 스스로 자랑하거나 서로 칭찬해 줄만한 '자기 자신의 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고 서로의 의로움에 면류관을 씌워주는 이 '자화자찬의 종교'에 빠지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를 믿는 각 사람을 다 의롭다 해 주신 하나님의 의'만을 찬양하고 그 합당한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세상의 그 누구도 예수 십자가가 우리에게 선포해 준 이런 진리를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근원은 바로 사람 자신 속에 있다고 가르치면서, 무슨 명상이나 수도를 통해서 어떤 깨달음을 통하여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참된 의는 무슨 깊은 도덕률을 깨닫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찾을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우상 종교는 사람 편에서 적당한 제물을 드리거나 선행의 공로를 쌓으면 신의 노여움을 달래고 자기 구원 여부를 흥정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사역으로 인하여 신자의 칭의는 다른 아무 조건 없이 그저 은혜로 주어진다는 놀라운 복음을 선포합니다.
  인본주의 종교는 사람 편에서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게 될 만큼 의로워져야 하며 그런 지고한 수준에 도달한 사람을 본받고 노력해야 한다고만 가르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 십자가를 믿고 무죄선언을 받은 성도는 각자가 이미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었으며 모든 감사와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마땅하다고 선포합니다.

  실로 '의'에 대한 사고방식에 있어서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릴만한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의 의'은 그 정의와 방법과 목적에 있어서 이처럼 '사람이 생각하는 의'와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이 만들거나 사람이 인정해 주거나 사람이 공감해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말미암고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자기의 의'가 더 좋은 의라고 억지를 부립니까?
  왜 자기가 생각하는 의의 정의와 방법과 목적이 옳다고, 진짜라고 생떼를 쓰면서, 성경에서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를 왜곡하고 무시하고 변경하려 하는 것입니까?
  그처럼 자신의 수준 낮은 의, 저질적인 의를 끝까지 내세우고 고집을 부리는 자들은 결국 저 차원 높은 의, 저 참된 의가 그 공권력을 발휘하게 될 때에는 당연히 체포되고 법 앞에 서게 될 뿐입니다.
  아직까지는 '길이 참아 주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그 공의대로 심판하실 때에는, 로마서 10장 3절 말씀대로, 그처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은 여지없이 수치를 당하고 영원한 저주의 판결을 받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아주 쉬우면서도 모든 도덕과 윤리와 법을 초월하는 '최고의 의'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람이 노력해서 성취하는 의는 아무리 해 보았자 여전히 '죄로 오염된 상태'를 벗어날 길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칭의는 우리를 단번에 '무죄 결백'한 존재로 바꾸어 줍니다.
  세상 종교가 가르치는 의는 결국 사람 자신을 높이는 인본주의적 자화자찬으로 끝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게 된 참된 의인은 모든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시작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게 된 의' 바로 이 십자가 대속을 통한 칭의를 값없이 받음으로써 다시는 아무도 정죄할 자가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로운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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