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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믿음(3) (빌 1: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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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빌1:19-24
제목 : 바울의 믿음(3)

  요즘 우리 사회에 학위, 학력위조사건이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처음 모 대학의 교수의 위조로 시작된 것이 사회전반에 확대되어 학계는 물론, 예술계, 연예계, 심지어는 종교계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급기야 검찰이 조사에 나섰고 벌써 여러 사람들이 처벌을 받을 위기에 있습니다. 어제 신문에는 톱기사로 국내박사학위가운데 1000여명이 외국의 미인가 대학의 학위라는 것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학벌주의의 실상이 드러나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번져나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이 학벌은 속일 수 있어도 실력은 속이지 못하는 법입니다. 제가 영국에 있을 때 공부했던 학교의 어떤 교수는 그가 가진 학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최고의 위치에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교수의 강의가 가장 인기가 높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수는 그 분야에서는 가장 최고로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학위가 문제가 아니라 실력이 문제입니다. 학위는 얼마든지 조작하고 속일 수 있지만 실력은 속일 수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믿음도 속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믿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정말 믿음이 좋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보면 환히 보이는 것이기에 믿음도 정확합니다. 특히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진짜 믿음이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입니다. 사실 바울은 당대 가장 최고의 학위를 가진 사람이고, 모두가 인정하는 뛰어난 실력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에게서 가장 돋보이면서 속일 수 없던 것이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의 뛰어난 믿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그의 믿음을 찾으려고 합니다. 본문을 통해 다시 그에게서 발견하는 놀라운 믿음은 무엇일까요? 여기 3가지의 귀한 믿음을 찾습니다.

  첫째, 부끄럽지 않는 믿음입니다. 20절에 바울은 평생 그의 꿈과 소원을 간절한 기대로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더욱 간절히 이런 삶을 살기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 언급한 것이 바로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그는 평생 늘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다짐했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뛰어난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이런 믿음, 이런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언제 부끄러워합니까? 이것을 알면 우리가 좀 더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수 있다고 봅니다. 두 가지의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죄를 지을 때’입니다. 처음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들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산 나무숲으로 자기들의 모습을 숨겼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이 모습입니다. 사람은 떳떳하다가도 죄만 지으면 고개를 숙이게 되어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가끔 보여주는 죄를 지은 사람을 보면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보자기를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자기의 죄가 온 세상 사람에게 노출되는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부끄럽게 됩니다. 죄를 짓고도 떳떳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몸부림 치고 살아야 합니다. 누구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죄입니다. 죄의 유혹에서 몸부림치면서 나를 지키고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시편저자처럼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었나이다’하는 고백을 담고 죄를 이겨 부끄럽지 않기를 원합니다.

  또 언제 우리가 부끄러워합니까? 우리의 ‘속이 드러날 때’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살았습니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치부가 드러나고, 속을 보여도 부끄럽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로 몸을 가렸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모습가운데 수치심이란 것이 있습니다. 벌거벗으면 수치심을 느끼고 부끄럽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벌거벗은 채 큰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속이 드러나면 부끄럽게 됩니다. 우리 몸만 드러나도 이렇게 부끄러운데, 우리의 속이 드러나면 더할 나위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자기를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남을 보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살피는 것부터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내 속에서 나오는 악하고 더러운 것을 보고 다스려야 부끄럽지 않게 됩니다.

  일제시대 활동했던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생각납니다. 그는 이렇게 자기의 삶을 노래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는 자기를 보는 사람이었고, 늘 부끄럽지 않기를 위해 다짐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 믿는 사람으로서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날마다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다짐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담대한 믿음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바울은 담대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걸어왔던 삶이요 믿음입니다. 그는 전에도 담대하게 살던 것처럼, 이제도 담대하기를 다짐합니다. 온전히 담대하기를 결단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참으로 필요한 믿음입니다.

  담대함의 반대는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두려워합니까? 역시 이것도 두 가지의 경우에서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하나는 ‘죽음의 공포,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입니다. 사람이 본질적으로 갖는 두려움 중에 가장 큰 두려움이 죽음입니다. 어쩌면 모든 두려움의 현상은 죽음의 공포가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불신자만이 아니라,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죽음의 위기가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닥칠 때, 태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911 테러가 날 때, 그래서 비행기가 무섭게 점점 빌딩으로 가까이 갈 때, 당시 비행기에 있던 사람들이 가졌던 공포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휴대폰으로 가족과 교신에서 밝혀진 것처럼, 그들은 죽음 자체보다 죽음으로 가는 그 순간이 더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결국 믿음으로만이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랬고 앞서간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두려움을 이기며 승리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런 모든 두려움의 때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삶에 누구나 찾아오는 두려움의 때를 평안으로 맞이하기 위해 믿음은 쌓아져야 합니다.

  아프간 피랍사건을 보면서 많은 깨닫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이미 두 명은 살해되었고, 또한 두 명은 극적으로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풀려난 두 명이 지난주에 아랍의 한 방송사와 가진 인터뷰가 공개가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놀라운 소식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원래 탈레반은 몸이 안 좋은 이지영씨를 석방대상으로 지목했으나 그녀는 오히려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고, 탈레반이 이를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언론은 이것을 아름다운 양보로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그녀의 믿음이라는 것에 의심치 않습니다. 죽음과 삶이 오가는 숨 가쁜 현장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떠나지 않는 그곳에서 정말 우리를 감동시키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담대함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용기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 언제 두려움이 생깁니까? 언제 담대함이 흔들립니까? 그것은 삶에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입니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늘 좋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고난이 올 수도 있습니다. 질병의 골짜기, 눈물의 계곡을 통과할 때도 있습니다. 평온하게 지내다가도 이런 일이 닥칠 때 우리는 흔들리고, 떨며, 두려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바로 이런 고난의 때에 진가를 발휘합니다. 아무리 우리 앞에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는 역경이 찾아와도 믿음이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는 힘이 됩니다. 믿는 자의 고난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파할 때 성령님도 함께 탄식합니다. 내가 힘들어할 때 주님은 언제나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내가 고통당할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이제 우리 모두 이런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두려움이 없는 용기와 담대한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며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바울의 믿음입니다. 특히 ‘살든지, 죽든지’ 라는 말을 통해 그의 비장한 각오를 엿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본문은 바울이 이런 믿음을 위한 그의 결단과 헌신을 확고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자기의 몸에서, 자기의 삶에서 그리스도만이 나타나고,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모습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바울은 이 편지를 감옥에서 쓰고 있습니다. 이미 그는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의 삶이 끝난다고 해도 후회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놀라운 그의 신앙과 고백이 바울을 기독교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오직 내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 위해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주님의 존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할 수 있습니까? 역시 두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참되고 바르게 살 때’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삶의 현장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환히 비추는 사람이 되고, 소금처럼 부패한 세상에서 썩지 않게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님의 사람으로 바르고 참되게 살면,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내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둡고, 부패하면 결코 주님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국 삶에서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평가되고 측정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이 중요합니다.

  세상이 너무도 어둡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런 세상으로 나갑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작은 촛불이 된다면 우리 주변을 조금이라도 환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도 부패했습니다. 만약 이런 세상에서 작은 소금이 된다면 부패한 세상을 썩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은 존귀하게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헌신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향하여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그의 능력으로 하실 일을 다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동참시켜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돌들도 사용하시고, 마른 막대기도 사용하시고, 동물도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천사도 흠모할 아름다운 일을 맡기셨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결코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사용하시려고 이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으면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헌신으로 주님은 결국 존귀하게 되고, 높아지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하나님이 나를 통해 뭔가 역사를 일으킬 때, 뒷짐 지고 구경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제로 뛰어들기를 원합니다. 교회를 위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세계와 열방을 위해 하나님은 나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헌신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름 앞에 헌신하며 고백했던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고 다짐이 되고,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주시고, 나를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바울의 귀한 믿음을 생각했습니다. 부끄럽지 않는 믿음, 담대한 믿음, 그리고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믿음입니다. 오늘도 이 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믿음의 길을 향해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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