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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사헌신예배] 바라봄의 가르침 (눅 22:5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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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라봄의 가르침

1. 폴 포츠

  요즘 뜨는 성악가가 한 사람 있다. 폴 포츠다. 그는 영국의 재능 발굴 프로그램인 <브리튼즈 갓 탈렌트>에 나왔다. 이 프로그램은 일반인들이 출연해서 자신의 재능을 뽐내는 일종의 예능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에 폴 포츠가 나왔을 때 그를 바라보는 방청객과 심사위원들은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이 뭘 준비했냐고 묻자 폴 포츠는 “오페라”라고 대답했다. 심사위원들은 기가 차다는 듯이 대답했다. “준비됐으면 해보라”고. 아마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부러진 앞니에, 펑퍼짐한 몸매, 허름한 옷을 걸친 평범한 세일즈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식 성악 코스를 밟아서 노래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휴대전화 판매원으로 일하는 36살의 아저씨에 불과했다.

  폴 포츠는 여기에서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렀다. 그가 노래하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왜 그랬을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폴 포츠는 어릴 때 이상한 목소리와 튀는 외모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늘 왕따를 당했다. 아무도 자신의 그 목소리를 받아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의 목소리를 받아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음악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종양수술을 받기도 하고, 여러 번의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그 시련이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꺾지 못했다. 폴 포츠는 <브리튼즈 갓 탈렌트>에서 우승했다. 그는 그렇게 다가온 한 번의 기회를 거머쥐었다. 며칠 전 발매된 그의 첫 번째 앨범이 그의 인생을 말해주는 것 같다. <One chance>

  그가 첫 번째 앨범을 낸 다음에 인터뷰를 했는데 참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다.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그렇게 음악을 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휴대전화 외판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슴 아프지 않았나?” 폴 포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힘들거나 가슴 아프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일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잘 대해줘서 즐거웠다.” 

  저는 그를 위대하게 만든 것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른 친구들이 그의 목소리를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도 자신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이 낼 수 있는 소리를 가지고 노래와 음악을 사랑했다. 자신의 꿈이 멀어져 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그는 낙심하지 않고 지금 있는 자신의 자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외판원으로 사는 동안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때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의 능력이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은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했다.


2. 안드레아 보첼리

  제가 좋아하는 테너 가수 가운데 안드레아 보첼리가 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눈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안드레아 보첼리는 초등학교 때 공을 차다가 친구가 찬 공에 눈이 맞아 아예 시력을 잃고 시각 장애인이 되었다. 보첼리는 그의 자서전 <침묵의 음악>에서 앞을 볼 수 없는 그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내가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1시간의 눈물로 충분했다.”

  그는 자신이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한 시간 동안 눈물을 펑펑 흘리며 가슴아파했지만 그것으로 그는 충분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 이상 그는 절망도, 후회도, 원망도, 생을 포기한다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 그는 앞을 볼 수 없다는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피사대학에 들어가서 법학박사 학위를 땄고, 변호사가 되었지만 그는 곧 그만두고 오페라 가수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천상의 목소리로 오늘도 행복하게 노래하고 있다.
 
  저는 폴 포츠와 안드레아 보첼리에게 많은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자신의 모습, 자신의 현실을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받아줄 수 있었던 힘이 지금의 그들을 만들었다. 


3. 예수님의 바라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사람들에게 붙잡히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갔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멀찍이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였다. 가야바의 집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집 안의 뜰에는 많은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모닥불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그들은 방금 들어간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베드로도 살며시 그 사람들의 틈새로 끼어 앉았는데 환한 불빛에 그의 얼굴은 금 새 드러나고 말았다. 불 건너편에 앉아 있던 여종이 베드로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저 사람도 예수라는 사람과 함께 있었다. 내가 다 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베드로에게 쏟아졌다. 베드로는 순간 놀라 손을 가로 저으며 “나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 전혀. 전혀.” 베드로의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이후에도 베드로는 계속 사람들의 의심과 질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때마다 베드로는 “사람을 잘 못 봤다”고. “나는 그 사람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발뺌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저주까지 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보여주려고 했다.

  거침없이 한 마디 한 마디를 쏟아내고 있을 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닭이 울었다. 예수님은 심문을 받으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뜰로 걸어 나오셨다. 그 분은 너무나 외로워보였다. 사람들에게 붙들려 나오시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눈길을 돌리셨다. 그 순간 예수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쳤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베드로에게 엄청난 말씀과도 같았다.

  “베드로야! 네가 말하지 않았니? 너는 절대로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는다고?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떠난다고 해도 너만은 나를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고? 너는 내 곁에 머물러 있는다고, 너는 나를 지켜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니? 베드로야! 그러나 나는 너를 믿는다. 나는 너의 마음을 잘 안다. 나는 너의 연약함을 잘 안다. 너는 분명히 게바가 될 것이다. 너는 분명히 나를 따를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그 침묵과 바라보시는 눈길 속에서 가장 큰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나 같으면 자신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면서 “잠깐만! 잠깐만! 내가 한 마디 꼭 해야겠어! 뭐 나를 절대로 부인하지 않는다고? 꼴좋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너에게 뭐라고 했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철저하게 회개해라. 다시는 꼴도 보기 싫으니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라고 한 마디 하고 한숨을 지었을 것 같은데 주님은 베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시기만 한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참으로 무겁고도 정겨운 주님의 무언의 가르침이다. 주님은 이처럼 제자들을 바라보셨다. 그렇게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시고 인내해주심으로 제자들은 변화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참고 기다리는 것, 그것은 가장 깊은 영성의 모습이다. 기다림이 자신에게 내면화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침묵이라고 한다. 기다림이 다른 사람의 외연을 감싸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인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조용히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은 믿음의 다른 표현이다. 내가 누군가를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기다림과 바라봄. 그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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