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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뉘우침이 있는 신앙 (마 2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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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우침이 있는 신앙 (마 21:28-32)

옛날 어떤 서당에 훈장님이 글공부를 가르치다 말고 매일 다락에서 뭘 꺼내 먹습니다.
아이들이 물었습니다.
“훈장님, 그게 뭡니까?”,
“이놈들아! 이건 곶감이라는 거다.”,
“곶감이 뭡니까?”,
“그건 아이들이 먹으면 죽는 거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훈장님이 어디에 가고 아이들만 모여서‘도대체 곶감이 어떤 것이기에 어른은 먹어도 괜찮고 아이는 먹으면 죽는 걸까? 설마 죽으려고? 먹어보자.'는 생각에 한 아이가 조금 먹어봤습니다. 그런데 죽기는커녕 맛이 참 좋거든요. 하나를 다 먹어버렸습니다. 안 죽거든요. 그래서 다른 아이들도 함께 훈장님의 곶감을 다 먹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먹긴 먹었는데 종아리 맞을 걸 생각하니 겁이 납니다.‘이제는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그 중에 꾀 많은 놈이 말했습니다. 훈장님이 아끼시는 벼루를 깨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전부 엎드리게 합니다.

그때 훈장님이 이제 돌아오셨습니다. 들어오시니까 아이들이 아랫목에 전부 엎드려 있었습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 뭣 하느냐?”
그러니까 그 중 똑똑한 놈이
“훈장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다름이 아니라, 저희들이 경솔하게 놀다가 훈장님 벼루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이런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너무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죽어 버리려고 훈장님이 먹으면 죽는다는 약을 먹고 죽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런데 먹었으니 죽어야 되는데 죽지 않아서 지금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좀 덜 먹어서 그런 모양인데 더 먹었으면 좋겠지만 곶감이 바닥나서….” 그러더랍니다.

아이들의 재치 있는 뉘우침에 훈장님이 어이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끝까지 그 잘못을 정당화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회개입니다. 깨달음이 오면 뉘우치고 뉘우침이 오면 돌이켜 올바른 길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출발이요, 구원 받는 삶의 첫걸음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이의 끊임없는 성숙의 과정이 뉘우침입니다.

오늘 본문은 잘 아시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하기를"너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했습니다. "예, 가겠습니다."하고 정중하게 대답하고는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아들에게도"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했더니 무슨 해야 할 일이 있었던지"못가겠습니다."하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에 생각하니 잘못된 것 같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들을 키워 본 분들의 말이 아들 둘은 많다 합니다만 이 본문에서 아들이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아들입니까? 처음부터"네 가겠습니다."하고 즉시 나서는 아들이 하나 더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의 마음에 정말로 합한 그런 아들은 안 나옵니다.

왜 이런 유의 세 번째의 아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에도 그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사실은 인간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이고 실패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의지적으로 완벽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결국은 뉘우침이라고 하는 인간 존재의 발견 즉, 회개를 중요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연약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요, 욱하는 감정으로 실수를 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깨닫고 뉘우칠 줄 알거나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 더 귀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현대인들을 향한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내 모습이 이 두 아들 중에 하나로 발견 됩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나마 나은 쪽이 둘째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둘째 아들처럼 살라는 이야기로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무엇이든지 생각도 없이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출발에서 시작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하는 말씀의 의중을 잘 알아야합니다. 무엇입니까? 둘째 아들에게서 발견되는 결정적인 긍정적인 부분은 뉘우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회개라고 하는 중요한 요소가 있어야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맏아들은 다분히 처세적인 사람의 모형입니다. 허상으로 맹세하고 체면과 위선에 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할 때에 맏아들이 되어가지고 아버지의 심기를 어지럽혀서야 되겠냐는 체면으로 대답합니다. 그것은 위선입니다. 지극히 처세 적입니다. 순종하는 것 같지만 순종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순종하는 좋은 맏아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지식으로는 순종하고 말로써는 순종하였습니다. 형식적으로, 예절로써는 순종하였습니다. 오늘도 보면 한다고 하면서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거룩하다고 하면서 거룩한 것이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것이 없습니다. 봉사한다고 하지만 말뿐입니다. 준다고 했지만 무엇을 준 적이 없습니다. 아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한 것도 없는데 다 된 것처럼 적당히, 적당히 넘어가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신앙으로 보자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항상 맹세하고 결심만 했지 무엇을 한 것이 없습니다.

자, 그럼 오늘 둘째아들은 어떻습니까? 이 둘째아들은 아주 정직하고 솔직하고 정당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려고 계획했던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니까 정직하게"못 갑니다. 제가 먼저 계획된 일이 있어서요."그랬습니다. 정직하지 않습니까? 또 정당하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안가겠다고 말하고 안간 것에 대해서는 정당하다고 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것이 둘째아들이라고 하는 인간성의 있는 그대로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긍정적인 시각에서의 중요한 문제가 이제 나옵니다. 이 둘째아들은 뒤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일을 하러 갔다는 사실입니다. 뉘우친다는 말은 헬라말로<메타노이아>라는 단어를 씁니다. 회개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총주제요 핵심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뉘우침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뉘우친다는 말이 무엇인가를 보면 생각의 발상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생각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내가 할 일은 내가 하고 아버지가 할 일은 아버지가 해야 합니다. 나는 내 할일을 합니다." 좀 냉정한 것 같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정당했습니다. 그러므로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못 가겠다고 하고 안 갔어도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까지를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뉘우쳤습니다. 이 뉘우쳤다고 하는 사실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옳다고 했던 일이고 나는 정당하다고 했지만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생각이고 지나치게 나만 생각 한 것이고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려고 하지를 못했습니다.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생각해야 되는데 오직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다는 사실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달리 잘 생각해보면 생각을 못 바꾸면 달라진 세상에 못살아간다는 재밌는 말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로 회개하지 않는 한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세 차원의 회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지성적인 회개>가 있습니다. 이것은 깨달음을 말합니다. 깨닫게 되는데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 다음에는<도덕적인 회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던 것이 이제는 다른 것이 소중한 줄을 알았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즐길 수 있는 것과 즐겨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한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는 도덕적 회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중요한<종교적인 회심>이 그것입니다. 늘 나를 중심으로 하던 생각에서 이제는 중심이 하나님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이 현재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의 최종단계이며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회개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을 깨끗이 하게 하실 때에 제사장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논박하면서 도전적으로 한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주신 비유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목숨을 건 당당한 말씀입니다. 당시 어떻게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책잡으려는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고, 그리고 제사장 앞에서"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다.","너희는 뉘우침이 없고 위선에 빠져있지만 비록 세리와 창녀이지만 뉘우침이 있다. 그러므로 끝까지 뉘우칠 줄을 모르는 너희들보다 창녀와 세리가 먼저 구원 받는다." 얼마나 굉장한 말씀입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살아가면서 얼마나 뉘우칩니까? 계속적으로 뉘우치고 생각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평생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더라도 오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야합니다. 거기에 복이 있습니다. 창기냐 세리냐를 묻지 않았습니다. 뉘우침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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