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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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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1-28)

여호수아는 그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겜에 모았습니다. 그들에게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다라는 결단을 촉구하고 언약을 맺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 중 2-13절은 아브라함 때부터 출애굽, 가나안 정복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다시 되짚어보고 있습니다. 14-24절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만을 섬기겠다는 다짐을 받습니다. 그리고 24-28절은 이런 결단을 기초로 세겜에서 언약을 세우는 장면입니다.

너희가 능히 섬기지 못하리라

그런데 24장의 말씀들을 읽다보면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태양과 달이 멈추는 기적과 강고한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치는 큰 전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말씀에서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여호와 신앙에 서 있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가리켜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던 아브라함이라 묘사합니다. 강 저편은 갈대아 우르로 곧 바벨론 지역을 말합니다. 14,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결단을 촉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당연히 여호와를 섬기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19절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는 데 실패할 것이라는 의심을 표명합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23절에서는 마치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신을 섬기고 있는 듯이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로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지금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모여 있는 곳은 세겜입니다. 아마 세겜에 있는 그리심 산과 에벨 산 사이일 것입니다. 여호수아 8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과 아이 성에서 승리한 후 세겜에서 계약을 맺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할 때 아멘으로 응답하며 말씀순종을 맹세했던 곳입니다. 그때도 돌에다 말씀을 새기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시 세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였지만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은 8장의 이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창세기 34장과 35장의 야곱 사건입니다. 세겜은 야곱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밧단아람이란 곳에서 20년 동안의 생활을 마치고 야곱은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형 에서를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에서와 화해합니다. 화해는 했지만 곧장 벧델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이란 곳에 머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야곱과 그의 가족은 수치스런 일을 당합니다. 세겜 족속 추장 아들이 야곱의 딸 디나를 범한 사건입니다. 이 일로 분노한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족속을 몰살시킵니다. 이 때문에 주변 부족들이 야곱의 가족들을 없애려는 위기에 빠집니다.

이런 어려움들을 당하자 야곱이 그 원인 어디 있을까 생각해 보니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약속하고 서원했던 베델로 돌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돌베게 베고 자다 하나님을 만났고 그 하나님께 내가 무사히 이곳까지 돌아오도록 기도하고 서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벧엘로 돌아가야 완성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자식들이 세겜의 문화에 물들어 이방신을 섬긴 것 때문이었습니다. 짧은 순간에 이방문화에 동화되었습니다. 이에 야곱은 모든 이방신들을 버리고 다시 베델로 돌아가자고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35장 2절입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그러자 4절에 자녀들이 아버지의 호소에 응답합니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조상 야곱과 그의 가정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이방우상에 빠졌느냐는 것입니다. 또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놀라운 전과를 얻어냈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여호수아 24장에서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처음 하나님을 알게 된 것처럼 여호와 신앙이 철저하지 못합니다.

저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는 세상과 죄의 무서움입니다. 세상 죄는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 안으로 침투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는 죄로 오염된 공기를 마시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또 순종의 행함으로 대적하지 않으면 어느 새 우리 안방을 차지하고 맙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장사는 없습니다. 날마다 깨어 기도하며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의 자녀들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멍하니 있는 사이에 죄에 물들고 말았습니다. 악한 것은 사람의 입과 우리의 눈을 통해, TV와 언론 매체를 통해, 인터넷을 통해, 또는 학교 교육현장에서 우리 안에 쉴 새 없이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사랑,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삶과 욕망, 폭력과 분노, 장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 거짓말과 음란함, 패거리를 짓는 모습, 교만과 사람에 대한 멸시, 하나님에 대한 부인과 인간에 대한 찬양 등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치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습니다. 전진하고 힘쓰지 않으면 떠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말씀 묵상이 필요하고 매일 기도하는 삶이 요구됩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이 인격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 인격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바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고 구원은 받을 수 있지만 그에 맞는 신앙 인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치 눈 쌓이듯이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순종하다 보면 조금씩 변화되고 어느새 보면 발목만큼, 무릎만큼 쌓이게 됩니다. 부는 얻을 수는 있지만 부에 걸 맞는 인격은 쉽게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졸부라는 말이 나옵니다. 돈은 많지만 돈을 쓰는 법을 모르고 부자의 품성이 없고 교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이제 졸부 사회에서 성숙한 부자 문화를 가진 사회로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터넷 또한 그런 것 같습니다. 오가는 글들이 살벌하고 분노에 차 있습니다. 자기 절제가 없습니다. 이 역시 역사가 짧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습관 또한 한꺼번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릇을 깰 수는 없습니다. 더러운 물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깨끗한 물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물이 깨끗해져 있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는 남녀간의 만남에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만 한다면 어떤 악조건도 이겨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인간에 대해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가문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문은 곧 배우자의 인격입니다. 인격은 집안 분위기에서 오랜 동안에 걸쳐 쌓이는 것입니다. 신앙 가정도 그렇습니다. 1대 2대 3대를 거쳐야 그 뼈 속 깊이까지 신앙인격이 새겨집니다. 마치 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그때서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수고하지 아니한 땅을 주었고

우리는 여호와만을 섬겨야 합니다. 그 이유가 2-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승리를 주시고 축복을 주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2절입니다.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이스라엘의 승리는 그들의 칼이나 활로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벌을 보내어 아모리 왕들을 몰아냈습니다. 왕벌은 땅벌입니다. 한 방 쏘이면 아프고 죽기까지 합니다. 더 힘든 것은 왕벌이 주는 공포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지만 군대와 왕벌이 싸운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왕벌 때문에 전쟁에 패하기도 합니까?  요는 승리가 이스라엘의 수고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아모리 왕들이 쫓겨간 것은 하나님이 보낸 왕벌 때문이었지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 주셨는데 마치 자기 능력으로 된 것 마냥 기고만장할 때가 있습니다. 똑 같은 노력을 들이고도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했습니다. 단지 게을러서 그렇다거나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이 있었기에 누구에게는 성공을 주시고 다른 사람은 잠시 보류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고자 하면 왕벌보다 더 희한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승리를 주실 뿐만 아니라 축복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13절입니다. “내가 또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너희가 또 자기의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 땅과 성읍과 그 과실이 모두 여호와로부터 말미암았다는 말씀입니다. 2절에서 13절까지의 주어는 ‘내가’ 곧 ‘하나님’입니다. ‘내가 이끌어 내었고, 내가 주었고, 내가 인도하였고, 내가 멸절시켰고’ 무려 ‘내가’라는 단어가 14번이나 나옵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주어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내가’가 많았는데 이제는 ‘주님께서’ 라는 단어가 많아집니다.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은혜의식입니다. 내 손으로 내가 벌어서 먹었다고 하면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이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된 것도, 나의 부자 된 것도, 내가 이름이 높아지게 된 것도 하나님 은혜라 고백할 때 우리가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우리 계획 안에 통제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축복받은 것은 내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만 섬겨야 할 것입니다.

결단코 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엉거주춤한 태도로는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우상과의 싸움이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단히 결심하도록 촉구합니다. 여호수아가 나와 내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결심을 밝히자 이스라엘 백성들도 16절에서 동일하게 결심합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오를 더 단단히 하기 위하여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기 때문에 너희는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속을 뒤집자 이스라엘 백성이 21절에 또 한 번 결심을 밝힙니다.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너희 스스로 증인이 될 수 있겠느냐고 여호수아가 재차 확인하자 22절 후반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고 맹세까지 합니다.  백성들은 24절에 다시 한 번 그들의 각오를 밝혀야만 했습니다.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여호수아는 백성들로 하여금 세 번에 걸쳐 자신들의 말로 결심하도록 하고 한 번은 맹세의 형태로 받습니다. 그리고 이 결심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하여 25-27절에서는 계약을 체결합니다.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25) 그리고는 그 증거로 큰 돌을 세워 기념비로 세웁니다.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26-27)

여호수아가 이렇게까지 심하게 이스라엘을 몰아친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처럼 단호히 결심하지 않으면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한 번의맹세나 결심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일사각오의 자세가 없으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술을 끊기 위해서는 일사각오의 자세로 나가야 합니다.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발버둥쳐야 겨우 끊을 수 있습니다. 마크 트웨인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담배를 끊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나는 지금까지 수백 번도 더 끊었다.” 적당한 결심으로 시작하면 결코 담배를 끊을 수 없습니다.

결단으로 승리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다니엘이 있습니다. 다니엘 1장 8절에서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결심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니엘은 뜻을 정하였습니다. 단호한 결심을 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왕의 진미와 포도주는 대부분 우상의 제물이었습니다.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남은 음식들을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먹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다니엘은 분명히 뜻을 정합니다. 그런 우상의 제물을 먹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정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과 소년들을 맡은 환관장이 이렇게 우려를 표명합니다. 만일 고기를 먹지 않으면 다른 소년들과 비교하여 얼굴이 초췌해질 텐데 그러면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우려였습니다. 이에 대해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열흘 동안 채식을 먹을 테니 그 결과를 보고 판단해 달라고 제안을 합니다. 열흘 후의 결과를 보니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얼굴이 더 아름다웠습니다. 다니엘 1장 15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이것이 바로 뜻을 정할 때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뜻을 정하고 결심하고 나아가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강고해 보이는 악한 습관도 능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죽고자 하는 각오로 나아가면 화살도 피해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결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악한 습관을 즐깁니다. 문제 앞에 단호히 결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하지 못합니다.

군대에서 술 먹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단호히 결심하고 먹지 않겠다고 하면 처음에 고생하지만 나중엔 인정하고 술 문제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숨기고 엉거주춤한 태도를 유지하면 적도 만만이 보고 우리를 공격하고 그러면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결단하고도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결심하지 않는 사람은 두고 볼 것도 없습니다. 삼일도 못 가고 무너질 것입니다.

결단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막쪄낸 찐빵』이란 책을 썼던 이만재 씨가 있습니다. 이분의 직업은 광고 카피라이터였습니다. 광고 문구나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줄창 담배를 물고 있을 수밖에 없는 직업이었습니다. 최소한 하루 두 갑씩을 피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세례를 받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고 보니 담배를 피는 것이 죄송스러워졌습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전(聖殿)인 고로 술이나 담배 따위로 그것을 더럽히는 것은 옳지 않다.” 고 결심하고는 니코틴 마귀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담배 생각이 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혼자의 싸움이면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담배 맛이 싹 달아나고 쓰게 해주시며 술 먹으면 배탈이 나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면 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악한 습관을 끊었다는 많은 간증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결단을 해야 합니다. 악한 습관을 끊겠다고 각오해야 성령님께서도 도우실 수 있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이런 결단으로 몰아갈 수 있었던 것은 여호수아 한 사람의 결단이었습니다. 15절입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너희가 다른 신들을 섬긴다할지라도 나와 내 집만은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결심입니다. 어떤 상황이 생길지라도, 어떤 손해가 있을지라도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는 각오입니다.

한 사람의 단호한 행동은 수만 마디 말보다 힘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이 단호한 결심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모범이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여호수아처럼 결단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각오를 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이 많아야 세상이 밝아집니다.

주님은 단 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생활원칙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던 바 있습니다.  “내 자신에게는 강철같은 심장을, 동료에게는 사랑의 가슴을, 하나님에게는 불타는 마음을!” 결단과 결심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직 사랑할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타는 사랑을 자기에게만 적용하십시오. 강철 같은 심장으로 악과 싸우며 대적하십시오.

나 한 사람이 이렇게 결심하며 살아갈 때 이것이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반대로 세상은 이처럼 빛이 된 한 사람이 없어서 부패와 멸망에 이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의인 한 사람만 있어도 예루살렘을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렘5:1). 어둠보다는 한 자루 촛불이 없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여호수아가 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결단하자 이 결단의 파장이 온 이스라엘에 미쳤습니다. 우리와 우리 가정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여호와만 섬기기로 결심하며 나아갈 때 이것이 세상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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