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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좌절은 없다 (요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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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좌절은 없다 (요 9:1-12)

주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가장 두려운 일이 우리 마음이 메말라버리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선교사님 한 분이 방문하셨습니다. 그 분은 선교지에서 정신지체아 학교를 세운 분이셨는데, 우리 교회에 그 학교 운영을 부탁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제 마음이 부담스러워짐을 느꼈습니다. 재정적인 압박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신지체아를 돕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힘든 사역인데, 그들까지 섬겨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역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고 헌신하신 선교사님을 보면서 제게 돈이 마른 것이 아니라 마음이 메말랐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된다 안된다 하지 않아야 함을 깨닫고 선교지 사역 현장에 교회 대표와 가 보겠다는 약속을 드렸습니다. ‘돕겠다 ’ 는 약속을 드린 것도 아니고 ‘가 보겠다’ 는 약속만 드렸는데도, 선교사님이 그렇게 감사해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메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 어느 동네를 지나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대뜸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2절)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여러분은 제자들의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정말 누구 죄 때문일까?’ 하고 답을 생각하기 전에 제자들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메마를대로 메마른 마음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시각 장애인의 고통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호기심거리일 뿐입니다. 자신들의 말을 듣는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될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묵상하면 울게 됩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사는 것일까?
우리들도 다른 사람 고통에 대하여 그저 호기심만 가지고 별 생각없이 함부로 말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의 상태가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어려운 일을 보고 불행한 일을 보면서 우리는 그 사람의 속 사정과 마음의 깊이를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쉽게 말을 해버립니다. 그 사람이 그 말을 들을 때 얼마나 마음에 더 큰 상처가 될 것 조차도 생각을 하지 않는 우리 자신을 봅니다.

  어느 부인이 눈 주위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교회를 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분의 마음을 헤아리겠습니까? 아니면 호기심이 발동하겠습니까? 옆 사람에게 “저 사람 부부 싸움 했나 봐? 남편이 때렸나 봐? 말로 하지 부인은 왜 때려?” 말은 동정을 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호기심일 뿐입니다. 그 사람이 들으면 예배도 못드리고 나가지 않겠습니까?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다르셨습니다.
  “부모의 죄도 아니고 자기의 죄도 아니고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각 장애인이 듣고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누구 죄 때문이 아니야!”
예수님은 무서운 죄책감에 눌려 있는 그 마음, 삶의 깊은 좌절에 빠져 있는 그 마음을 부드럽게 만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보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을 뿐이야?”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 이런 문제가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문제를 보는 눈이 바뀌어 성공적인 인생으로 승리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1967년 이스라엘 총리를 지낸 정치가 골다메이어(GoldaMeir; 1898~1978)는 총리로 있었던 12년 동안 백혈병을 앓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늘 “하나님, 내 생명 다할 때까지 나라를 위해 내 맡은 직분에 충성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총리의 사명을 감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나는 내 얼굴이 못생긴 것을 참으로 다행하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다른 사람보다 못생겼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했다.” 고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 이후 세계 최대의 물리학자로 불리는 영국에 스티븐 호킹(StephenHawking, 1942.1.8~) 박사는 캠브리지 대학교 대학원 1학년 때 불치병인 근육 수축 질환으로 3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는 깊은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결심을 했습니다. "좋다! 나의 삶이 시한부 인생이면 어떠냐? 어차피 모든 인생은 시한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냐? 비록 내게 남아있는 기간이 3년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내게 필요한 시간보다 더 길지도 모른다!" 그 뒤 그는 연구에만 매진했습니다. 3년이 지났습니다. 아니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근육이 수축되고 있습니다.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 물리학계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상하고 지치고 좌절한 마음을 부드럽게 만지십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왜? 왜? 하지 마!‘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는 것일까? 그것을 생각해!”
예수님께서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절) 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때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촉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논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사람을 통해서 행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이다. 어느새 어두워지고 있지 않니? 어두워지면 그 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 없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과거의 실패나 불행만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뭔가를 일을 할 수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문제 앞에서 신세 타령을 하고 후회를 하고 삽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똑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패 때문에 내게 부디쳐있는 문제 때문에 낙심해서 좌절해서 그리고 지난 날의 후회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그래 놀라서 나무 위에 올라갔는데 호랑이가 나무를 흔들어 그만 호랑이 등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무꾼은 떨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하여 힘껏 호랑이 등을 끌어안았는데 호랑이는 이 사람을 등에 얹고 힘껏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나무꾼은 호랑이를 더 꽉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농부가 무더운 여름 밭에서 일하다가 이 광경을 보고 '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서 호랑이 등만 타고 다니는데, 나는 죽도록 땅만 파고 사니 어디 살 맛이 나겠어?' 라며 탄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유독 자신만 더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목요일(2007년 8월 16일) 한 방송에서 14세에서 73세 대한 민국 남녀 1200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당신의 인생에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이냐` 는 질문에 남녀 모두 "공부 좀 열심히 할 걸" 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답니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들의 후회 중에 "그 때 그 여자 잡을 걸~" 하는 후회가 많았고, 여자들도 "공부 좀 할 걸" 다음으로 "이 남자와 결혼하지 말 걸" 이라는 후회를 가장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70대 남자가 가장 인생에서 후회하는 일로 꼽은 것이 "아내 눈에 눈물나게 한 것" 이 대답이었다는 것이고 40대가 넘어서면서 남자들이 "아내에게 못할 짓을 한 것" 을 후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신세 타령을 하고 후회만 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병 중에 계신 어느 권사님께서 “병이 나으면 아픈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기도해 주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꿈입니다. 그러나 아쉬워서 한 마디 말씀을 드렸습니다. "권사님, 그 일은 지금 여기서 하실 수 있습니다. 누워 계신 채로, 다른 아픈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시작하세요."
  여러분, 지금 이 순간이 일할 수 있는 낮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을 바꾸시는 분입니다. 단순히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고 우리 마음을 위로하시는 분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흙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시각 장애인의 눈에 바른 다음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고는 그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을 침을 뱉어서 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게 하는 이런 복잡한 방법을 쓰셨을까? 그냥 “눈이 떠질지어다!” 이려셔도 될 것을 왜 이런 복잡한 방법을 쓰셨을까요? 그 까닭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눈에 진흙을 바르시며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셨을까요?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 는 뜻입니다. 히스기야가 기원 전 700년 무렵 앗시리아가 쳐들어 오기 전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기혼 샘이라는 샘물을 지하로 터널을 파서 성안으로 끌어드리는 대 공사를 했는데 그 때 생긴 못이 바로 실로암입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그 물이 기혼 샘에서부터 보냄을 받은 물이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그 시각 장애인을 실로암에 보낸 이유는 예수님이 성경에서 예언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실로암 연못에 어떤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문제에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구주이십니다.
(8절)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불행한 일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처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11절)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너무 단순합니다. “예수께서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고 하셔서, 말씀대로 실로암 못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씻었습니다. 그랬더니 깨끗하게 나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도 고백합시다. 이제는 염려도 원망도, 좌절도 다 버리고 나의 생명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만 순종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그 때 인생을 변화시키시는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세계적인 위대한 흑인 영가 가수인 헤이즈(Roland Hayes)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미국 죠지아 산골에서 맨발로 도시에 나온 무식한 흑인 청년이었습니다. 목소리가 좋다고 해서 교회 찬양대에 섰는데 그 덕으로 어느 부자 의사 집에 점심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집에서 헤이즈는 처음으로 유성기를 보았고, 그 유성기로 당대에 명성이 높았던 '카루소'의 노래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을 헤이즈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카루소의 노래를 듣는 순간, 내 가슴에는 요란한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가슴에는 카루소로 가득차 있었다. 저 지평선 너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이후 카루소에게 미쳐 살았다. 카루소가 나를 끌고 갔다. 카루소처럼 말하고, 카루소처럼 행동하고, 카루소처럼 노래를 불렀다. 바로 그것이 죠지아의 산골 청년이 오늘날 세계의 헤이즈가 된 원동력이다." 이런 헤이즈와 같은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나도 어렸을 적에 내 가슴 속에는 이웃 집에 사는 누나가 있었다. 예쁜 여학생 교복을 입고 나를 예뻐해 주는 누나는 별천지에서 온 천사와 같았다. 그 누나에게 잘 보이려고 나는 열심히 코를 닦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또 국민학교 5학년 때 쯤에는 내 가슴 속에  윤숙이가 살게 되었다. 윤숙이에게 잘 보이려고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는데 윤숙이 때문에 공부도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또 내 가슴 속에는 톨스토이가 살았었고, 데미안이 살았었으며 토스토옙스키가 살다 가곤 했다. 그러다가 지금 아내가 내 마음에 살았고 내 아이들도 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엔가 내 가슴 속에 헤이즈 가슴에 살던 카루소보다 더 강한 힘찬 종이 울리게 되었다. 나는 내 가슴에 새로운 주인을 맞이했다. 그는 방황하던 내 가슴에 깃발을 꽂아 주었다. 그는 목마른 내 가슴에 샘물이 되었다. 강하게 내 삶을 이끌어 갔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욕심도 그를 바라보면 눈 녹듯이 스러지고 말았다. 내 속에서 번뜩이던 미움의 비수조차도 그의 말을 듣노라면 솜방망이처럼 부드러워지고 말았다. 정욕의 불길도 그의 진실어린  눈동자 앞에서는 거룩한 감동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통하여 내 가슴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다 보게 되었다. 늑대가 내 가슴 속으로 숨어들어 온 것을 보았다. 뱀이 넘어온 것을 보았다. 내 가슴의 어느 방에는 창녀가 살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나를 나 보다도 더 사랑하는' 분, '예수'다. 나사렛 사람 예수다. 그가 내 가슴 속에 살자 나는 하던 공부를 바꾸었다. 꿈이 바꾸어 졌다. 사랑도 취미도 친구도 바꾸어졌다. 그는 그렇게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러므로 오라.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하는 사람은 오라. 그를 가슴에 살게 하라. 그러면 그가 사는 가슴에 종소리가 울리고 그대도 헤이즈처럼 되리라.”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의 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모든 인간 관계가 다 풀립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명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모든 어려움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꼭 눈이 뜨이지 않아도 눈이 뜨인 것보다 더 큰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6.25가 끝나고 너무나 살기 어려울 때, 시골에서 살던 한 소년이 서울에 와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날아온 축구공에 눈이 다쳤습니다. 그런데 점점 시력을 잃어가더니, 결국 두 눈 다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낙심하신 홀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고2인 누나가 생활을 책임지고 고생하다가 과로로 죽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이 이 소년에게 닥쳤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기에, 몸부림치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불행에 대하여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 때, 이 소년에게 빛처럼 다가온 성경 구절이 둘 있었습니다.

  (고후 12:10)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그리고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 소년은 이 말씀을 자신의 불행에 대한 하나님의 답으로 붙잡았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년이 나중에 정부 수립 50 주년을 맞아 [자랑스런 해외 동포]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선정되는데, 그가 현재 UN 세계 장애위원회 부의장이자 미국 일리노이 대학 교수로 있는 강영우박사 입니다. 한 때, 택시 기사가 승차 거부를 하고 버스 차장이 밀어내는 한국 현실을 많이도 원망했으나 지금은 오히려 실명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실명은 장애가 아니라 사명을 수행하는 도구라는 생각으로 바꾸었습니다. 눈을 다치지 않았더라면 아내도 못 만났고, 한국에서 배척받지 않았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쓰이지도 못했을 것 아닙니까?" 강영우박사는 실명하기 전에 그렇게 공부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답니다. 그런 학생이 실명하고 나면 공부를 더 잘하게 되는 것이 정상이겠습니까, 못하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까? 그런데 강영우박사는 실명을 하고 공부를 더 잘하게 된 것입니다. 연세대 문과대 전체 차석으로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3년 8개월 만에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학 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 한국 최초 맹인 박사가 되었습니다. 강영우박사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자신이 실명한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는 주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두 가지 말씀을 주셨습니다. ‘버럭 화부터 내는 성격 고쳐야 하겠다! 쉽게 낙심하는 것부터 고쳐야 하겠다!’
그렇습니다. 물려받은 유산이 없다고, 제대로 공부 못했다고, 불치 병에 걸렸다고, 자녀가 가시와 같다고 팔자를 탓해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나, 실패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하여 여기 있다는 예수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통하여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가?" 이것이 깨달아지면, 그 때 길이 보이고 뜻이 보이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말씀을 붙잡고 예수님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더 이상 몸부림치지만 않겠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니,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님의 말씀에만 순종합니다! 그렇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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