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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좋은 군사 (딤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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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좋은 군사 (딤후 2:1~4)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구세군을 만들었다. Salvation Army로 불리워지는 구세군이야말로 크리스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여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세 가지를 부탁한다.

①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
② 바울에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③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으라.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은혜로 무장해야 하고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겪는 것을 피하거나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예수를 믿는 자가 되면 고난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믿는 문제 때문에 갈등과 어려움이 더 있을 수 있기에 고난 받을 때 흔들려서는 안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보라. 금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거절하고 신앙을 지키려는 뜻을 위해 고난의 불구덩이에 던져진다. 극렬히 타는 불, 7배나 강한 풀무불에 들어가게 된다. 다니엘도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고발을 당하고 사자굴에 던져진다. 다니엘은 죽음의 밤을 맞는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동행하심으로 모두 살아나게 되지만 은혜를 받은 믿음의 사람에게는 고난이 다가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만나는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이 어려운 고난을 정상이라고 외쳐야 한다. 그리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정면 돌파해야 한다.

롬8:17下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난은 아프고 괴롭고 무서운 것이지만 영광을 위해 견뎌야 하는 것이다. 고난은 결코 영광보다 클 수 없다. 장래 나타날 영광은 너무도 큰 것이기에 고난 때문에 신앙과 사명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① 고난은 성도를 성숙하게 만든다.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이 어떤 면에서는 유익을 주는 것이다.

② 고난은 큰 상을 약속한다.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게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

상이 약속되어 있다.

③ 고난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체험하게 한다.

사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라고 하였다.
 
그렇다. 물의 환난, 불의 환난 등 성도는 물과 불을 지나야 하는 고난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물도, 불도 자기 백성을 침몰치 않게, 태우지도 못하게 하신다. 철저히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손길을 고난 속에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결국 고난은 나를 영광으로 이끄는 과정일 뿐이다.

야곱의 20년 동안의 처가살이 고난, 요셉의 13년 동안의 옥살이 및 노예 생활의 고난, 모세의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의 목동의 고난, 쫓기는 다윗으로서 망명 생활을 보내야 했던 도망자로서의 고난. 그 고난을 견디고 통과하고 이겼을 때 더욱 큰 영광의 사람이 되었다. 고난을 겁내지 말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고난보다 크시고 그 하나님은 삶의 고난을 선으로 바꾸시는 온전한 섭리자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고난을 향해 담대히 선포하자. 고난을 일부러 환영할 것이 아니라 “오려면 오너라!” 고난을 피하려고 도망치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하자.

군대 간 사병이 3년간의 군 복무를 견디지 못하여 탈영한다. 그런 군인은 아무데도 쓸 수가 없다. 병영 생활도 못하는 너무도 약한 군인이 어떻게 전쟁을 치르겠는가? 역사 속에서 로마 군인은 최강의 군인이었다. 단검을 들고 전쟁터에서 싸우는 저들은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었다. 그 이유는 자부심의 긍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군인들은 12년을 복무했고 후에는 16년씩 복무했다. 그것은 고난의 시간이지만 자부심은 인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내가 죽고 사는 전쟁을 경험한 자들이 되어 좋은 군사의 자질을 쌓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좋은 군사들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의 이름에 대한 긍지를 갖고 인내해야 한다. 그리고 인내로 연단을 받아 다음과 같은 군사가 되어야 한다.

첫째, 지도자와 함께 하는 군사 (딤후2:3)

좋은 군인은 상관을 따른다. 상관의 작전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어떤 어려운 임무를 부여해도 상관의 오른팔, 왼팔의 역할을 한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서려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함께하는 자가 되기를 요청한다. 바울에게 디모데는 믿음의 아들이요, 또 디모데에게 바울은 영적 아버지였다. 멘토와 멘티로 이루어진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고난에도 함께하는 것을 스스럼없이 요청한다. 예수의 좋은 군사는 함께할 줄 아는 사람이다. 좋은 일도 함께하지만 어려운 일도 함께하는 것이다.

히13: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는 순종과 복종으로 함께해야 하겠다. 군대에서 지휘관이 “앞으로”라고 명령을 내리면 험한 산이라도 뛰어 올라가야 하듯 좋은 군사된 성도는 지도자의 요구에 함께해야 한다. 함께하는 자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오직 지도자와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한다.

사람들이 장세동 씨가 나쁜 줄 알면서도 좋아하는 이유는 전두환 씨를 위해 옥에 갔다 와서는 “휴가 잘 갔다 왔습니다.”하고 언제나 함께 했기 때문이다. 함께 하는 것은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함께 하는 것에 관해 얼마나 찾기 어려우면 장세동 씨에게 감동을 할까? 목회자와 함께하는 성도, 즐거움에도 함께 하지만 고난당할 때에도 함께 하는 자가 되라.

빌 하이벨스 목사가 세계적 지도자가 된 것은 위기를 맞이했을 때 그를 도우며 함게 한 10명의 성도들 때문이었다. 부목사 스캔들, 악의에 찬 담임자 비방, 아내의 유산 등 그 소용돌이 속에서 10명의 성도들이 100만 달러를 가지고 왔다. 교회 건축을 이러한 위기 때문에 멈출 수 없다고 말하면서 건축을 시작하도록 함께 하였다. 그것이 윌리엄 크릭 교회를 이루었다. 사역에 함께하는 자가 좋은 군사다.

둘째,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아니하는 군사 (딤후2:4上)

군대에 징집된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유보해야 한다. 잘 거 다 자고, 먹을 거 다 먹고, 놀 거 다 놀며 지내는 생활을 버리고 절도 있게 바뀌어야 한다. 어느 군인이 병영에서 집에 가고 싶다고, 애인보고 싶다고 자기 마음대로 퇴근할 수 있는가? 군사로 다니는 자는 누구나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 김법중 권사님을 보니까 휴가를 보내는 날인데도 부대에서 멀리 갈 수 없다. 비상이 걸리면 2시간 안에 복귀해야 하는 곳에 대기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 군인은 병영 중심이다. 그렇다면 성도들도 좋은 군사로서 살아가려면 교회 중심이어야 한다. 영적 전쟁을 위한 비상 기도회가 열리든지, 새벽 집회가 열리면 그 모임과 집회에 와야 한다. 나의 사생활을 내려놓고 달려와야 한다. 예비군처럼, 보충병처럼, 근무하는 군기 빠진 성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들도 주목하라는 말 한마디에 시선이 고정되는 특공대처럼 되어야 한다.

오늘부터 열리는 연합 성회는 좋은 군사가 되게 하는 특별 비상 집회다. 사생활을 내려놓고 다 나와야 한다. 그래야 정병같은 크리스챤이 된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아니하는 군사, 힘들고 쉬고 싶을 때 이 말이 나의 기울어지는 신앙을 바로 잡아 준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잘 떠올리는 구절이다. 안일의 유혹이 있을 때 물리치는 말씀이다.

셋째, 모집한 이를 기쁘게 하는 군사. (딤후2:4下)

군인을 부르고 징집해 가는 곳은 나라다. 나라에게 연장이 나오면 청년은 국방의 의무를 위해 훈련소로 가야 한다. 나라의 부르심이 아니라면 누가 기쁘게 가겠는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구원에로 부르신 하나님은 두 번째 사망에로 부르셨다. 영적 전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도록 어두움의 세력을 패퇴시키고 승리하는 예수의 군사가 되도록 부르셨다. 우리는 이 분을 기쁘게 해야 한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한다.

다윗의 세 용사를 보라. 베들레헴 우물가에서 길러 온 생수로 목을 축이려 하는 다윗의 갈망을 아는 세 용사는 적진으로 뛰어들어갔다. 죽음을 무릅쓰고 물을 길러와 다윗 왕에게 드린다. 왜 그랬을까? 자신을 용사로 부른 다윗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교회의 일군으로 영적인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드리고 마침내 목숨까지도 드릴 수 있는 각오가 되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왜, 젊은이들이 아프간에 가서 피랍되었냐”며 손가락질을 하고 비방을 하는데, 그것은 그들을 보내시고 그들을 모집한 이가 누구인지를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인 전쟁의 자리로 보내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모집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제대로 된 정병이다.

나는 교회를 건축하면서 한 성도의 헌금을 잊을 수 없다. 몇 년간 적금을 부어서 타낸 현금 1,000만원을 들고 고민을 한다. 이 돈을 가지면 자신의 삶을 만족케 하고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을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 옷도 사고, 가방도 사고, 여행도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어떡할까?’하는 망설임 속에서도 교회를 위해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건축 헌금으로 드렸다. 이 고민의 과정을 건축 헌금 봉투 위에 깨알같이 써서 예물을 드렸던 것이다. “나를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그때 결정의 손길이야말로 모집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정병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실행에 옮기는 자, 병영으로서 교회 안에 이런 좋은 군사들이 있다면 어두움의 권세는 더 이상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웨슬리는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100명을 주신다면 세계를 바꿀 수 있노라고 하였다. 오합지졸이 아닌 성도, 좋은 군사의 삶이 무엇인지 아는 훈련된 성도, 정병같은 성도, 이 시대 우리 교회에도 100명이 있다면 강한 교회, 위대한 교회가 이루어질 것이다.

“당신이 그 정병이 되시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시오”

이는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속회 리더로서, 교회학교 교사로서, 성가대원으로서 이 명령을 붙잡고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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