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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사람들(몬 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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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인연 혹은 연분이라는 말을 종종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맺어지는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어떻게 보면 우리의 만남은 모두 운명적일 수 있습니다.  내가 그 때 그 자리에만 없었어도, 내가 그 때 그 누군가의 제의를 받아들이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지금 부부가 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만남의 운명성 때문에 어떤 이는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고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수많은 만남의 홍수 가운데 있습니다.  비록 나이기 들수록 인생의 큰 만남들은 대부분 겪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알고 있는 사람의 새로운 면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만남이라는 것은 소중하고 운명적인 것이지만 보편적인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남이란 단지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끝을 맺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만남은 더 큰 발전도 없이 늘 그렇고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늘 만나는 아내와의 만남이 여러분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대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남편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까?  대부분의 경우 대답은 No 입니다.  이미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10년, 혹은 20년을 알고 지냈던 배우자라 할지라도 전혀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매우 긍정적인 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전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럴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원치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늘 그렇고 그런 만남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새로운 만남을 제시하는 바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만남 후 그를 자신의 가장 충실한 조력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오네시모를 원래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보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15절을 읽겠습니다.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파괴된 관계

생각해 보십시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는 원수 같은 존재였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손상 입히고, 자기를 떠난 배신자였습니다.  그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도망친 노예는 라틴어로 도망자를 뜻하는 대문자 F를 이마에 찍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노예의 탈출은 가장 악질적인 죄에 속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레몬의 속마음으로 아는지 모르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얘, 빌레몬아.  오네시모가 비록 너에게서 도망쳐 나온 노예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이란다.  하나님은 오네시모를 네 곁에 영원히 두시고자 했기 때문이야.”

아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누가 그 원수 같은 놈을 영원토록 붙여 달라고 기도나 했습니까?  그리고 오네시모가 돌아온다고 축난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돌아올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차라리 모르는데서 죽은 것이 낫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빌레몬은 고민입니다.  자기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를 받아들이라고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말을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이 누굽니까?  자기에게 새로운 영생의 길을 열어준 영원한 은인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고민이 바로 이겁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도무지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부부라는 이름의 질긴 끈이 둘을 묶어 놓기도 합니다.  때로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가 우리의 행동을 제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자식만 아니면…”  자식 때문에 싫은 남편과, 미운 아내와 사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기혼 여성의 거의 70% 가까운 숫자가 다시 태어나면 현재의 남편과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관계는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관계는 파괴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의 관계는 날마다 이렇게 파괴되어 가고 있을까요?  어쩌면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요청은 너무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자기 남편이나 아내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한데 도망간 종을 받아들이는 것이 말이 됩니까?

우리의 관계가 파괴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성을 깊이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좀 더 냉철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지극히 신학적인 부분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원초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원죄라고 부릅니다.

이 부분이 간과된다면 파괴된 관계는 결코 회복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가정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가정보다 훨씬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사 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혼율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비슷합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갈등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뭐 믿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구먼.  그럴러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야?”  저는 실제로 이런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어떤 가정에 문제가 있을 때 사람들은 쉽게 이런 판단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무엇 때문에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과 거의 비슷한 도덕적 수준을 유지할까요?  그것은 죄인됨의 자각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내 남편의 어려움이나 내 아내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인색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나도 당신이 힘들다는 걸 알아.  하지만 봐.  누구누구도 더한 상황에서 살아.  하지만 그 사람은 불평하지 않아.  당신도 힘들지만 사실은 내가 더 힘들어.”

남편은 남편대로 돈 벌어오는 것을 최고의 훈장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집안에서 살림하고 아이를 돌보는 것을 무거운 십자가라고 역설합니다.  게다가 직장 생활까지 할라치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상대방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중요한 것은 내가 이만큼 아프다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관계가 파괴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파괴된 관계는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새로운 관계

바울은 오네시모로 고민하는 빌레몬에게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세상에, 다시 종으로 받아들이라고 해도 들어줄까 말까한데 종이 아니라 종보다 훨씬 뛰어난 형제, 그것도 사랑받는 형제로써 대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아, 오네시모를 이제는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처럼 대해라.  로마에서 만나 믿음의 관계만을 가진 나도 그를 형제로 여기는데, 너는 이미 그와 세상적인 관계, 즉 주인과 노예라는 관계도 갖지 않았느냐?  그러나 나보다 네가 더 오네시모와 친해질 수 있지 않느냐?”

바울은 사실 억지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미워 죽겠는데 내가 육신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무슨 상관이고, 주 안에서 만난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빌레몬의 입장에서 보면 믿음을 운운하면서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은근히 협박하는 바울이 더 미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바울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아무런 논리도 없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누굽니까?  당대의 철학자요, 최고의 변론가입니다.  그런 그가 무작정 용서를 말할 리가 없습니다.


새로운 관계의 배후 - 빚진 자

바울은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은근히 이렇게 자기의 입장을 밝힙니다.  함께 17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하~  이건 정말 무서운 공갈입니다.  협박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말합니다.  “만일 네가 나를 정말 절친한 관계로 여긴다면 역시 나와 절친한 관계에 있는 오네시모를 용납하거라.  그러나 내가 너에게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면 나의 절친한 친구인 오네시모를 박대해도 좋다.”

그야말로 “환장하겠네!”입니다.  얼핏 보면 이 역시 억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실 바울은 이 억지 속에서 무서운 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실지로 바울은 은연중에 바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아, 나는 네가 잘 나서 너와 친구가 된 줄 아냐?  내 입장에서 보면 너도 오네시모 같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단다.  하지만 난 너에게 복음을 전했고, 너를 사랑하는 형제로 맞았지.  그런데 네가 오네시모를 용납할 수 없다고?”

바울이 자기의 신학에서 늘 강조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빚진 자의 원리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롬 13;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본문 18절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외면적으로 보면 바울은 금전적인 손실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금전적인 피해를 갚아 주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압니다.  바울에게는 돈이 없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빌레몬을 알아듣습니다.  “아, 사도 바울께서 나에게 당신에게 진 사랑의 빚을 기억하라는 것이구나.”

바울이 주를 위하여 평생을 헌신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깊이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합니다.  만삭되어 난 것 같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저 겸손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의 사랑을 뼈저리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이 그런 용서와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받은 사랑을 나누어 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 있습니까?  도저히 그 사람을 사랑하거나 용서할 수 없습니까?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도 누군가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완벽해서, 내가 철저해서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우리 주위에 주님의 사랑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배우자, 우리의 형제, 친지, 그리고 이웃들, 나의 친구들은 나의 모난 모습, 나의 이기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납하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빌레몬은 바울에게서 그런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빌레몬이 그런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할 때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영원히 함께 할 사람들입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부부의 연을 맺거나 이웃의 연을 맺어도 그 관계가 수십 년 이어집니다.  하물며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함께 누리는 우리들의 관계는 얼마나 더 깊은 것이겠습니까?  우리와 함께 영원한 길을 걷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네시모를 믿음으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빌레몬처럼, 우리에게도 지울 수 없는 빚에 대한 부담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받을 자격도 없고, 가지도 없는 나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주고 있습니까?  그들의 왜 나를 위하여 기도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빚은 자각한다면 갚아야 합니다.  빌레몬처럼 나의 감정의 골짜기를 뛰어넘어 대양같은 넉넉함으로 상대방을 보듬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우리의 가슴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만남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영원히 함께할 성도 여러분, 이런 넉넉한 가슴을 소유하십시오.

행복한교회 - 김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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