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일어나 올라가라 (창 35:1)

  • 잡초 잡초
  • 238
  • 0

첨부 1


일어나 올라가라 (창 35:1)

(창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서양에 이런 속담이 있답니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 맞는 말입니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은 팔자가 좋은 사람이고,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은 팔자가 그만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우유를 마시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유를 마시는 목적은 건강입니다. 그런데 그 건강은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좋습니다. 이것이 매우 재미있는 아이러니입니다.

  편히 사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일은 아닙니다. 무조건 편히 사는 것만 추구하다보면 우리들은 몸도 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지고, 정신도 약해지고, 신앙도 약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편히 잘 살기 위하여 돈을 많이 벌고 크게 성공하려고 합니다. 돈을 벌고 성공을 하면 삶이 편해집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어 편히 살면 행복해 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삶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건강해지지도 않습니다. 그 성공과 부요함이 가져다 준 편안함이 우리를 오히려 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대영국사"를 쓴  영국의 철학가  흄은 말년에 경제적인  풍요를 누렸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에  해독이 되었습니다.그는 너무  편한 생활을 해 "대영국사  속편"을 쓸 수 없었던 것입니다.이런 생활을 안타깝게  여긴 친구나 주변 인물들이 "제발 다시 펜을 들어 위대한 작품을 남겨 달라"고 간청했습니다.그때마다 흄은 변명했습니다.
  "내가 집필하지 않는 이유는 네가지다.첫째,너무 늙었고  둘째,너무 살이 쪘으며 셋째,너무 게을러졌고  넷째,너무 돈이 많아졌단 말일세"
  그렇다면 과연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일을 하다가 죽어도 좋을 만큼 사랑하는 일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바울은 참 성공적이고도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6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바울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죽도록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일평생 죽도록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며 그분의 제자들을 키우는 그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일을 일평생 훌륭하게 감당했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제껏 해오던 일들을 제자들에게 물려주고 원로대접을 받으며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도 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몸을 제물삼아 관제로 하나님께 드려 마지막 사랑의 꽃을 활짝 피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인간적으로 성공한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당시 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시민권자였고, 학문도 높았고 집안도 좋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편히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줄을 안 후 그는 그 모든 편안의 조건들을 정말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걸어 놓고 예수님과 교회를 죽도록 사랑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오늘날 바울처럼 예수를 사랑하여  보장된 편안을 포기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많은 사람이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추구합니다. 예전에 가난하고 불안정한 위치에 있을때는 얼마나 열심히 믿었는지 모릅니다. 신자라면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전도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교회를 내 집보다 먼저 생각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을 많이 받아서인지 안정되었습니다.  그 후로 현실이 금전적으로 쪼들리지 않고 생활을 위협하는 급박한 문제가 없으니 답답할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집도 장만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지위를 얻었으며 자녀들도 잘 자라주고 있으니 부족할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옛날처럼 주님께 나아가 날마다 기도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완전히 잊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막연하게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은 하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려고 애쓰지도 않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사명에 대하여 깊이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 이가 많습니다.

  야곱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타향살이 20년만에 야곱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고대시대에 화폐가치로 통용되던 소와 양, 낙타를 셀 수 없이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노예도 제법 많이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도 넷이나 되었고 아들이 열 둘에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짚시처럼 떠 돌아 다니다보니 항상 불안했는데 이제 정착할 땅을 발견했습니다.  세겜이라는 성읍의 문밖에 며칠 머물다보니 사람들도 순박하고 야곱에게 아주 호의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땅은 기름진 땅이었고 목축에 필요한  물과 풀이 풍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처음에 거기에 짐승들의 우릿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집을 지으려고 땅도 은을 백냥이나 주고 충분히 사 놓았습니다. 거기에 아주 주저앉을 생각이었습니다.
  굳이 가나안땅으로 돌아갈 필요가 꼭 있느냐? 돌아가봐야 형 에서가 원한을 품고 기다리는데 화를 부를것 없이 여기에 머물러 살아도 얼마든지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남은 여생을 부자가 되어 편안하게 살고 싶은 야곱을 하나님은 그냥 모른채하고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일찌기 야곱을 족장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통해 아주 중요한 한 나라를 세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브라함, 이삭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중요한 계획과 약속이 있었습니다.  평범하게 살아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만 복받고 잘 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온 인류를 복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겠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버리고 세겜성에 주저앉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다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그를 사용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야곱은 다 잊고 다 외면하고 세겜성에 주저 앉으려 했습니다. 자신의 편안함만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야곱에게 말슴하셨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  벧엘이 어떤 곳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슴하실까요? 

  20년 전,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들판에서 잠들었다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형이 쫓아올까봐 불안하고,  혼자서 먼 길을 여행함으로  야곱은 고통스럽고  두려웠습니다.  추운 벌판에서 이불도 없이 돌맹이를 주워다가 베고 쪼그리고 누워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사다리가 내려오더니 그 사다리를 타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꼭대기에서 하나님이 말슴하십니다. "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은 너무 감격했습니다.  '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시다니 이게 왠 은혜인가! 게다가 나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는가?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어 주신다는 말씀 아닌가!  나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 주신다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쫓겨가는 나를 아시고  무사히 돌아오도록 지켜 주신다니 이 얼마나 든든한가!'

  야곱은 너무 감사하여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해 주시고  저를 지켜 주신다면 그리고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게 하신다면 제가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이 곳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얻은 소득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담대한 용기를 얻어서 외삼촌의 집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만났으나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인내하고 견디며 열심히 일하여서 성공하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위기마다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 벧엘을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을 잊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말씀드린 서원을 잊고 있습니다.  그로하여금  큰 부자가 되도록 복 주신 하나님을 잊고 있습니다.  오로지 안정과 편안만을 생각하다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보류하면서까지 꿈꾸던  편안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외동딸 디나가 세겜성 추장에게 끌려들어가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디나의 오라비들이 디나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세겜을 속여 성의 모든 남자를 할례받게 하고 습격하여 다 죽이고 약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야곱은 부족 동맹을 맺은 인근 성의 군사들의 공격목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주 다급해졌습니다.  20년동안 모은 재산이 다 사라질 판입니다.  가족들이 다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가 될 운명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바람앞의 등불같은 신세입니다.  도망가고 싶지만 어린 자녀들과 가축들이 많아 빨리 도망갈수도 없습니다. 
  그 때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1. 잊고 있던 은혜를 회복하라는 말슴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건은 은혜중에 은혜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면 달라집니다.  두려워 벌벌 떨던 사람이 담대해지고 용감해집니다.  낙심에 빠지고 슬픔에 잠긴 사람이 갑자기 소망이 넘치고 기븜이 충만해집니다.  인생의 길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이 삶의 목표가 분명해지고 정신을 차린 생활을 합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어느날 해변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하다가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는 변했습니다.  아주 뜨거운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엄청난 핍박을 감수하면서 무서운 고난을 당하면서도 은혜에 감격해 행복해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을 만난 그런 감격스런 은혜의 체험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사건으로 인해 거듭나고 인생의 중대한 변화를 경험하셨습니까?  그런데 어쩌다가 그 큰 감격이 식어졌습니까?  그 놀라운 은혜를 잊고 사명도 서원도 다 던져버리고 안일한 생활의 단맛에만 젖어 있습니까?  혹 야곱처럼 오로지 안정과 편안만을 꿈꾸며 현실에 안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십시오.  하나님을 만났던 감격이 생생한 여러분의 벧엘로 올라가 은혜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눈물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슴하십니다.
  특별히 이번 부흥회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말슴의 능력을 회복하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잊고 있던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슴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복의 근원으로 삼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야곱을 통하여 많은 사람에게 복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흘러가게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이 세겜성에서 하몰과 사돈이나 맺고 이방인들과 동화되어 살면 그 사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게서는 야곱을 거기서 몰아 내시는 것입니다.

  사명은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 훨신 중요합니다.  사명은 부유하게 살며 혼자서 많은 것을 누리는 것보다 훨신 중요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려면  세상과 타협하면서 평범하게 살 수 없습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다 잊고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세속에 자신을 아무렇게나 내던지지 말고 거룩함을 지키기 위하여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복의 근원이 되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복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잘되게 만들고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을 많이 받아 누리게 하기 위하여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믿음을 지키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여러분 주위에 얼마나 있습니까?  무엇을 위하여 살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셨습니까?  누구를 위하여 헌신하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까?  그 사명이 여러분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십시오 .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분명히 보이는 여러분의 벧엘로 올라 가십시오.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좇아오던 햇빛인데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나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이 십자가라고 하는 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행복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행복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닙니까? 십자가가 어떤 것입니까?  고난입니다. 수치입니다. 두려움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무서운 고통이요,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는 희생입니다.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그 십자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복이라고 확신하고 십자가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윤동주시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정확하게 이해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물론 고통스러운 일이고 비참한 일이지만, 십자가에 죽을 만큼 중요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십자가에 죽을만큼 가치있는 사명과 비전이 있다는 것은 복된 일이 아닙니까? 

  오늘 교회와 신자의 위기는 편안하게 안주하려고 하는 정신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현실에 주저 앉아 머뭇거리고 있는 여러분에게 말슴하십니다. 받은 은혜도 잊고 소중한 사명도 잊고 편안함에 취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어서 짐을 꾸리고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