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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의 신앙 (창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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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신앙 (창 4:1-7) -1

오늘날 신앙인에게 있어서 예배의 신앙이 결여가 되어 있음은 적지않은 문제가 된다. 예배의 신앙은 예전과 삶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지는데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게 되면 이런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오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惰性(타성)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하게됨으로 예배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알수가 없고 소리만 있고 보이는 형식만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있을 곳에(예배를 드리는 곳에)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다. 예배드리는 이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모습도. 뜻도 계시지 않고 다만 습관 + 자기만족을 위한 示顯만이 보일 때가 적지 않음이다. 그래서 예배의 주인공이 없는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많은데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다음은 예배란 공예배의 시간만이 예배라는 견해가 가져다 주는 폐해 입니다. 그래서 예배만을 잘 드리면 삶이야 어떠하든지 상관이 없다 하여 초월을 합니다.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예배가 아닙니다. 삶을 통한 구현이 없는 것이 어찌 예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런 사람들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자주 다루는 본문입니다. 따라서 적지않이 들어본 바 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도 들어보았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곡식으로 드린 제사이다. 아벨은 짐승이 피로 드렸다 . 그러니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바친 제사를 곡식으로 드린 제사보다 더 좋아하셨다. (출12: 등에서 인용) 그러나 이것은 생각해 보십시요. 이후에 나올 법이 이전의 이미 행한 행위를 죄로 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본문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가지 중요한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1. 실패한 예배      2. 실패한 예배의 필연적 결과

오늘은 실패한 예배와 그 원인에 대해서만 살펴보겠습니다. 내일은 그 결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예정입니다.

A. 실패한 예배  그 원인

1. 가인은 자기의 정성만 생각했지 받으시는 분의 품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정성과 자기의 노력은 드렸으나 믿음이 없이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와같은 것입니다. 받으시는 분이 어떠한 예배를 받으시는지 예배에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정성만 드립니다. 해서 θ 께서 계시든지 아니 계시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자기만족만이 있으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오래된 신자일 수록 경건미가 떨어지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함정입니다.

2. 가인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7절에 말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느냐? ”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열납되지 않은 제사는 선을 행함이 없는 제사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의 행위가 없는 제사였던 것 입니다. 까닭에 하나님으로 부터 외면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그릇된 견해는 바로 이것입니다.//    선을 행함이 없는 예배요. 아무런 결단이 없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산 제사가 될 수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롬12:1 “너희 몸으로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라”)

우리가 삶으로 예배를 드리려면 그리스도의 선으로 무장을 하고 그대로 살고 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예배와 삶은 다르지 않고 하나입니다. 삶을 통하여 예배드리고 예배를 드림으로 삶이 영위되고 하는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습니까?

  7절 하반절에 “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가 문에 엎드리는 것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문턱을 밟던지 넘든지 하는 것 처럼 드나들 때 마다 하는 범죄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음이다. 그러니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들어오고 나가고 할 때마다 죄를 짓는다면 우리의 결국이 어떠하겠습니까? 결국 그의 심판이요, 정죄의 결국 곧 멸망의 두려움에 처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 죄를 두려워하게 되면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문에 엎드리는 죄의 속성을 알고 죄를 두려워하고 이길 방법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방법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

가인이 실패한 예배는 그가 선을 행하기 보다는 죄의 소원을 따른 결과가 이런 열매를 냈습니다. 우리 앞에 날마다 죄에의 유혹이 던져져 있습니다. 그것은 문에 엎드린다는 표현처럼 모든 행동과 모든 일에 묻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그 소원에 이끌리어 결국 죄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죄에의 유혹을 아주 멀리하고 또 그것을 이기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최초의 인간들 중의 하나인 가인은 이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까닭에 비참중에 다시 더 큰 비참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는 적극적인 방법 곧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선을 행함으로 믿음의 삶에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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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신앙 (창 4:1-7) -2

가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실패했습니다. 그의 실패한 제사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파생되었는데 그것은 필연적 귀추입니다.

B. 실패한 예배의 필연적 결과

요즈음 때로 형제간에 부모 자식간에 다툼이 나는 원인 중에 재산문제 때문에 다툼이 있는 경우가 종종 신문에 소개가 되고 또 우리는 이런 문제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만큼 귀에 익숙한 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재산이 없는 가정이 형제간에 우애가 좋습니다. ... 나누어 가질 것이 없으니 분배의 문제 때문에 다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진정한 형제간의 우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논리도 펼 수 있습니다. 최초로 형제간이 존재했던 현장이었던 가인과 아벨 시대에도 최초의 살인 사건이 형제간에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이런 죄의 현상으로 생긴 일들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린아이를 죄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천국에 가장 가까이 간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주님은 아주 긍정적으로 보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없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무엇인지 소유를 느끼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적용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잘 노는 데 가서 먹을 것을 하나 던져 주어 보십시요. 당장에 잘 놀던 아이도 싸움이 납니다. 혼자 먹거나 더 먹으려고 말입니다.

본문에서 믿음없는 가인이 제사 문제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왜 ? 자기의 제사는 열납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열납되지 않은 제사의 이유는 어제 설명드렸듯이 “믿음이 없는 제사”라는 판명..  그러면 가인이 믿음이 있는 자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이 없다면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다만 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그리한 것이 아니라 다만 Θ 께서 자기의 제사를 받으신다고 하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 없다는 것이 증명될 만큼 허술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의 제물은 불성실한 제사요. 인격과 함께 드리는 제사가 아니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동생을 향하여 분노한 것은 동생의 제물도 자기와 같이 열납되지 않았다면 전혀 분노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제물이 열납되었다는 사실은 자기의 제사가 헛것이요. 자기의 불성실과 불신앙이 아벨의 제사로 인하여 드러났다는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하고 아벨을 그 수치를 얻게 한 장본인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은 받고 싶지만 이에 따른 노력은 하기 싫었습니다. 그 행위의 결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예배가 실패한 까닭에  그의 실수 위에 또 다른 악을 구성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아껴야 할 대상인 동생에게 죽음을 안겨 준 실패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첩경인데 예배에 실패하게 되면 자신을 하나님의 계명으로 지킬 절제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죄를 하고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의 일을 함에 있어서 나는 잘하지도 못하면서 일을 꿰어차고 있어서 나도 안하고 남도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하기 싫고 남이 나서서 하는 것은 못 보겠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안하면서 남이 해서 인정받는 것은 못 보겠다고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가인의 심보입니다. (이것은 본인의 말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입니다. = 우리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모든 일을 다시 한번 점검하여 주님 앞에서 하듯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의 능력과 자세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이고 안되는 것은 남을 통해서라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유의할 점은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벨같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하다가 죽음같은 고통을 맛보더라도 감당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릇된 시기심은 남도 죽이고 자신도 죽였습니다.

그가 동생을 죽였지만 사실은 자기를 죽인 것입니다. 아벨은 지금도 죽었지만 성경에서 두고두고 ‘의인 아벨의 피부터’ 라는 주님의 인용을 들어도 그렇고.. 히브리서에도 의인의 열납되는 제사라는 평을 듣습니다. 그래서 육신은 죽었으나 그 믿음은 살아서 오늘도 증거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당시에도 그의 죄벌이 중하여 견딜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당시에도 죽고 지금도 계속 죽은 사람입니다. 아마 그는 하나님의 관심이 자기 농사에 필연적인 도움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성실이 결여된 제사를 드렸습니다. 농사를 위한 관점으로 열납되는 제사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를 드린다는 것 보다 이기적 욕망이 작용한 것을 심령을 감찰하시는 이가 그 제사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에서 드립니까? 사심이 없는 순수한 예배를 드립니까? 이문을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이를 찾아 당신의 입으로 영원히 부르시는 이름이 되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이 아침에 하나님을 섬기되 사심없는 섬김을 통해서 마치 의인 아벨의 이름처럼 그 이름이 주님께 불리우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 시간에 이렇게 각오를 합시다. 한 주간의 삶이 주님 앞에 열납되어야 하겠다. 한 주간 내내 예배를 드리자 . 이렇게 하면 전도!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해결! 그것도 생각보다 쉬운 것입니다.
생각하십시요 “믿음으로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렸느니라”...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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