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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언자의 선교 사역 (사 5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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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선교 사역 (사 52:7~10)

구약 성경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활동 상황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자들의 활동 성격은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아 민중에게 전달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올바른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 예언자의 활동이었고, 현 시대 상황을 영적으로 밝혀서 모든 사람이 회개하도록 하는데 그 활동 목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 예언자이며, 어떻게 예언자가 되는 것일까? 넓은 의미로 보면 성경에 나타난 모든 구원에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다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다 예언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신약에 와서 세례 요한도 예언자적 취급을 받았고, 사도 요한도 미래 예언을 계시적으로 밝혀주었으니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이 다 예언자입니다. 예수님도 선지자라고 불렀는데 선지자와 예언자는 같은 문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언자라고 말할 때는 구약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말라기, 학개, 스가랴 등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예언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백성에게 전달합니다. 그 전달 방법을 선포라고 합니다. 선포라는 말은 일방적인 뜻입니다. 협상의 여지가 없이 한쪽에서 선포하면 그냥 끝나는 것이 예언자적 선포입니다.

때로는 사회에서 이 예언자들은 영웅적인 취급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천대와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유대인들의 삶의 기초에는 이 예언자들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때로는 핍박하고 괴롭히면서도 선지자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살 수 없는 양면성이 히브리 민족사에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예언자의 활동은 곧 구약 시대 선교의 한 방법이었음이 성경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언자들의 선교활동의 특징을 살피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해야 될 선교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예언자들의 사명을 파숫군의 사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부족 간에 침략이 많았습니다. 한 동네 사는 부족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어려워질 때 다른 부족을 침략해서 노략질함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인류의 문명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동네나 침략을 당하지 않으려고 마을의 제일 높은 곳에 망대를 건축합니다. 그 망대에는 반드시 파숫군이 24시간 경계 보초를 서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파숫군은 이상한 느낌이 있을 때 위급한 상황을 온 동네에 알려줌으로서 부족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바로 사명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니까 이 일을 눈치 빠르게 잘하는 사람이 생기고 잘 못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저녁에 잠이 많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잠만 자니까 헛수고입니다.

저와 같이 10년 이상 동역했던 부목사님 한 분이 계신데 이 분은 잠이 너무 많아서 목회에 큰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습니다. 새벽기도에 자기 설교할 차례가 되면 멀쩡하게 안 나옵니다. 종종 그런 일이 생기면 아주 난처합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중요한 일을 맡아 놓고 왜 이렇게 안 나옵니까?” 이것 때문에 얼마나 문제가 많이 생기는지 하루는 그 지역에서 부활절 새벽 연합 예배로 모였는데 거기서 중요한 책임을 맡은 이 분이 또 안 나오신 겁니다. ‘아, 이거 아무래도 새벽은 안 되겠구나!’ 이 분의 군대 생활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위병소 근무를 하고 있을 때인데 사단장이 부대 시찰을 나오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단장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시찰을 하는데도 잠을 쿨쿨 자고 있는 사병을 발견하니까 지휘봉으로 옆을 쿡 찌르면서 “야! 너 뭐하는 거냐?”라고 하니까 잠결에 옆의 친구가 말하는 줄 알고 “야, 잔소리 마! 잠자고 있는데….” 그래서 자기 때문에 부대 전체가 기합을 받고 혼난 적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부목사는 그렇게 잠이 많았습니다. 만약 파숫군이 그렇게 했다가는 큰일 나겠죠? 그래서 유대 나라는 전문 직업 파숫군을 두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이 돈 거둬 주고 “너희는 이런 일을 하라!” 밤새도록 잠 안자고 낮에는 잠 잘 자는 체질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전문 파숫군으로 일하는 사람의 직업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체질적으로는 이런 일을 하기에 적합하기는 해도 이게 얼마나 고독한 생활입니까? 우리가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해도 직장 동료들과 농담도 하고 함께 밥도 먹으러 다니고 밝은 곳에서 일을 해야 그 직장이 즐겁고 재미있고 나갈 맛이 있고 그러지, 밤새도록 망대에 혼자 서서 그 캄캄한 밤에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무슨 부스럭 소리만 나도 긴장하고 그러니 이게 좋은 직업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밤잠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게 좋은 직업이 되니 홀로 망대에 서서 적막 속에서 밤새도록 긴장하며 시간을 보내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파숫군의 문화가 나오는가?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영적으로 어떤 민족의 파숫군으로 파송이 되는 것입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지역에서 외로움의 삶을 자원해서 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제가 선교지에 많이 가보면 선교사나 선교사의 부인이 끝없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다 들어주어야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분들은 그동안 말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쌓이고 쌓인 것을 다 쏟아놓고 싶어 합니다. 외롭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외로움이 지치면 우울증이 되고 나중에는 그것이 병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민자들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이 파숫군 한 사람으로 인해 온 마을 전체의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도둑 떼가 들이닥치면 무지막지하게 약탈을 합니다. 불을 지르고 죽이고 순식간에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선교사는 영적으로 어느 나라를 가던지, 어느 도시를 찾아가던지 영적 구원자로서 ‘나 하나에 이 국가, 이 도시의 운명이 달려있다!’라는 생각으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나라나 선교사 한 사람만 똑똑하게 들어가면 그 나라는 마침내 구원이 정착됩니다. 세계 어느 나라나 선교 역사는 다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 파숫군에게 위기가 올 때 하는 일이 무엇이냐?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잠자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깨워주어야 합니다. 시원치 아니한 파숫군은 자신의 신변 노출이 두려워서 나팔을 불지 못하고 혼자서 도망가 버립니다. 파숫군이 있는 망대부터 습격해야 된다고 적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빨리 나팔을 불어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나팔을 불면 나부터 죽일 테니까 도망가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제가 미얀마 갔을 때 세미나 하기 위해 성경책을 들고 강의 준비한 노트를 성경책 사이에 껴가지고 호텔에서 나가니까 미얀마에 사업상 늘 왔다 갔다 하시는 우리 교회 현광선 집사님이 재빠르게 오시더니 성경책을 탁 빼앗아서 자기 가방에 쑥 집어넣으시면서 “목사님! 비밀경찰이 쫙 깔려있습니다. 목사님 강의 시작도 못하고 쫓겨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 적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다. 지난번에 베트남에 갔을 때도 첫 번 강의하고 그 이튿날 아침에 비밀경찰이 쫙 깔렸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쫓겨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아주 흔한 일입니다. 지금 중국이 얼마나 좋아지고 편해졌는지 모르지만 제가 중국에 처음 갔을 때는 공항에서 입국해서 출국할 때까지 공안 담당이 계속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 현지의 선교사 차를 타고 다니고 공안들은 따로 차로 타고 쫓아오는데 우리는 가다가 낡은 차의 시동이 자꾸 꺼져 밀고 다니는데도 공안 차가 따라다니면서 감시를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파숫군이 부는 나팔 소리를 듣고 잠을 깨는 영혼들은 모두 구원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예언자들의 예언의 소리를 잘 듣고 순종할 때 평안과 번영이 찾아왔고 그 예언자들의 소리를 외면하고 멸시의 돌을 던질 때 심판과 절망의 역사가 찾아왔던 것을 우리가 밝힐 수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나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두 가지 사역의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적인 사역이요, 하나는 예언자적인 사역입니다. 제사장적인 사역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장례식을 집례하고 결혼 주례하고 세례식을 주관하고 축복 기도를 해주고 성찬 예식을 거행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환자를 치유하는 심방을 하고 기도회를 하고 어린이 축복을 위한 여러 가지 행사에 참여하는 등 이런 것들은 많이 할수록 감사와 존경과 열매가 따라옵니다. 그런데 예언자적인 일은 항상 위험에 노출됩니다. “사학법 국회통과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사로 있는 대학도 지금 이것 때문에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이사들이 결정해야 됩니다. 13명의 이사가 모여서 밤새도록 기도하고 “이 학교의 정신이 무엇이냐? 기독교 정신인데, 앞으로 이렇게 되면 우린 어떻게 할 것이냐?” 예언자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됩니다. 이것은 항상 위험이 따릅니다. “줄기세포가 실용화되면 기독교 입장은 무엇인가? 성서적인가? 말하라!” “유전자 공학은 성서적인가? 이런 것에서 발전하면 하나님의 거룩성과 신성은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항상 위험이 따릅니다.

지금 미국에서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는 동성결혼의 문제인데 국민의 8%가 동성연애자들입니다. 기독교 입장이 무엇이냐? 그러면 동성결혼을 허용하면 내가 주례를 해주어야 하는데 두 남자를 놓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며….”라고 해줄 것인가 말입니다. 이것이 예언자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찬반이 쟁쟁합니다. 제가 있던 PCUSA도 이것 때문에 30년 동안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해결이 안 났습니다. 이것 때문에 교파가 갈라질 수도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하자! 이것은 해야 한다!” 그러면 한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얼마 안가서 남자 사모님이 생기겠다.” 이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예언자의 소리를 발하지 않았습니까? “이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리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예언자의 소리를 주십시오.” 세례 요한이 사회악에 대해 예언자의 소리를 발하지 않았습니까? “옷 두벌 입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지니라. 이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예언자의 소리입니다. 그러니 부자들이 싫어합니다. 예언자의 역할은 위험이 따라옵니다. 나누지 아니한 죄에 대한 예언자의 소리! 세리들이 와서 “그럼, 우리는 세금 걷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사회 부정의에 대해 말한 예언자였습니다. 군인들이 찾아와서 군병들이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라. 군인의 권세로 사람을 못살게 굴지 말라.” 이것이 예언자였습니다. 왜 공산국가에서 기독교를 핍박하고 없애버렸습니까? 예언자의 소리를 없애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결국 목이 잘려 죽지 않았습니까? 파숫군의 직업이 위험한 것처럼 예언자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선교사가 무엇이냐? 다시 돌아오지 못할 땅을 향해 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선교사입니다. 예언자의 소리를 발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라.” 하셨듯이 예언자의 소리에 잘 순종하면 민족이나 국가는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고난스럽지만 복을 뿌리러 다니기에 그의 발이 아름답다고 오늘 말씀에 나온 것입니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날지어다. 시온의 딸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파숫군이여 일어나 예루살렘의 황폐한 것을 기쁘게 노래하자 여호와께서 그 거룩한 발로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로다.” 이 말을 선포하는 예언자는 지금 희망에 벅찬 시온의 찬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때 유대 나라 형편을 봅시다. 그 당시의 유대 나라는 우리나라와 같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북은 이스라엘이라고 불렀고 남쪽은 유다라 불렀던 분열 왕국 시대입니다. 그 작은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져 국력이 약해지니까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게 망했습니다. 남쪽 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이 정복해버렸습니다. 두 나라 다 망했습니다. 이러한 악조건의 국가 여건 속에서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활동했는데 그때의 백성들은 “망했다. 의욕 상실, 기진맥진, 자포자기, 무기력증, 될 대로 되라!” 이렇게 되어 신앙마저도 다 잃어버리고 “하나님도 보기 싫다. 죽이려면 죽여라!” 슬픔과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맥 빠진 모습의 군중들 앞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한 이름 없는 예언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도 역시 누더기 옷을 걸친 식민지 백성 중에 하나입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지금도 잘 알 수가 없어 신학자들은 편리한 이름 하나를 붙여주었습니다. ‘제2 이사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책이 이사야가 된 것입니다. 그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 한복판에 나타나 예언자의 소리를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가 예루살렘 군중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 시작합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날지어다. 파숫군들이여, 일어나 황폐한 예루살렘을 기쁘게 노래하자. 시온이여, 깰지어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희망의 불씨를 넣어주면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예언자들의 선교 활동을 우리말로 쉽게 해석하면 노방전도입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들이 대표급 예언자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사역의 성격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1장 1절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가라사대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고하라.” 6절에 보면 “너는 이 모든 말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준행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리에서 선포하라! 예언자들의 선교 활동의 특징은 노방전도입니다.

오래전 크리스마스 전날인 24일 우리 갈보리교회 지하철 선교회 회원들이 이매역에서 산타 복장을 입고 2,000켤레의 양말을 포장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거리 선교했는데 ‘그게 무슨 효과가 있느냐? 괜히 양말 2,000켤레만 버리지 않았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합니다. 전도지와 양말 한 켤레씩 크리스마스 때 받아가지고 가는 그 사람들 중에 단 한명이라도 ‘아! 이 형제들은 이렇게 추운 거리에 서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고 있구나. 내가 누구인가? 과거에 내가 꽤 열심히 믿던 신자였는데 지금은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 형제들을 보라! 저 형제들이 할 일이 없어서 이렇게 추운 때에 나와서 아무 상관없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애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내가 해야 될 일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2,000명 중에 단 한사람이라도 나온다면 그 선교는 큰 효과를 얻은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님의 선교활동도 제가 조명해 보겠는데 예수님도 거리 전도사이십니다. 만약 우리 중에 나는 아무 할 일이 없다고 하신 분이 계신다면 거리에 나가서 오고가는 사람에게 전도지만 나눠주어도 큰일을 하시는 겁니다.

오늘 말씀의 중요 대목은 예언자들의 선포가 무엇이냐? 평화의 공포다. 선교는 평화의 선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통치를 만드는 작업이 곧 선교입니다.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하나님의 통치를 인한 평화 선포 그것이 예언자의 사역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서 평화의 정착을 세상에 공포하는 것이며 이것이 자연히 영생의 세계로 연결되어 구원의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 예언자들의 선교 활동입니다.

빌리 그래함 부흥 집회 간증자들 중의 일본 사람 ‘미츠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군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냐? 유명합니다. 일본의 영웅입니다. 진주만 공격에 최대 공로가 있는 일본 군인의 영웅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의 간증자가 되었느냐 말입니다. 유대인 혈통의 아인슈타인 박사가 독일 나치에 쫓겨서 미국으로 망명해왔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핵개발을 하려고 했을 때 미군은 그게 뭐냐고 하면서 말 자체도 이해를 못했습니다. 원자탄의 원리를 만들어 1945년 7월 16일에 실험에 성공했더니 트루만 대통령이 그것을 빨리 갖다가 일본에 폭격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1945년 8월 6일, 9일에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떨어뜨려서 일본을 항복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일본과 미국이 영원한 원수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우방이 일본과 미국입니다.

미국의 선교 단체가 맥아더 선언에 힘입어서 일본에 왔는데 일본에서 선교하던 제이 컵스 목사가 미츠오 중령을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천만 달러의 모금을 해서 일본에 처음으로 기독교 대학을 세웠고 “우리가 일본을 찾아온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죄 많이 지어서 회개하러 왔습니다.” 일본인의 전쟁 영웅 미츠오 중령이 ‘미국인들이 일본을 위해서 일을 하니 나는 미국을 위해서 일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에 빌리 그래함 목사를 만나 “나를 집회 간증자로 써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 집회에 간증자가 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자기가 폭격한 하와이 집회에 나타났을 때 그를 보기 위해 미국인 6천명이 몰려왔습니다. 그들 앞에서 “여러분, 12년 전 이 진주만을 쑥대밭으로 만든 최대 공로자가 저입니다. 내가 폭탄을 퍼부어서 애리조나 함의 수천 명의 장병들이 지금도 물속에 수장되어 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회개하러 왔습니다. 이 거리를 불바다로 만든 사람이 나입니다. 여러분, 용서하여 주십시오. 앞으로 내가 이 말을 세계에 다니면서 하려고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요청해서 간증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 집회에 참석했던 한 부인이 12살 된 자기 아이를 데리고 앞으로 나왔습니다. “미츠오 중령! 나는 그날 아기를 낳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날 이 아이를 낳아서 12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남편은 그날 죽었습니다. 당신이 투하한 폭탄에 의해 죽었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은 이 아이를 위해서 당신의 기도를 받고 싶습니다. 해 주시겠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여! 여기 이 아들이 성장해서 미국과 일본, 세계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평화의 사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와이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로 남았습니다.

제가 중국에 교회당 건축을 하고 헌당예배 설교를 하게 됐는데 그 지방의 유력한 인사들이 축하객으로 천여 명이나 모였습니다. 제가 농담을 하나 했는데 “혹시 여러분 가운데 1950년 한국 전쟁에 참가했던 분 계시면 손 들어보세요.” 2, 3분 정도 손을 들었습니다. “내가 오늘 중국에 온 것은 그 시절 1·4 후퇴 때 그 눈보라 속에서 중국군인 몇 명이 우리 집에서 일주일 동안 방을 빌려서 나와 같이 쓰고 같이 밥 먹고 함께 지냈는데 숙박비를 안내서 받으러 왔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모두다 같이 웃었습니다.

세계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원수도 없습니다. 선교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평화를 온 세계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주어야 합니다. 폐허의 예루살렘 거리에 등장한 한 예언자의 음성!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사역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실의에 찬 무기력한 거지 떼가 새 창조 역사에서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되었고 하나님의 역사가 그때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는 그런 예언자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예언자의 소리는 끊임없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공포자의 산을 넘는 발걸음은 아름답고 그 소리를 듣는 자는 복된 백성이 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이것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가 예언자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예언자가 무엇인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 옛날 예언자들의 활동에서 저희들이 조명해 봤으니 이 시대에는 저희들에게 맡기신 갈보리 공동체가 세계를 향해서 예언자의 소리를 선포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의 공동체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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