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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른 복음은 없다 (갈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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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복음은 없다(갈1:6-10)

  사기를 당해본 적이 있나요? 상당히 예쁘고 상냥하고 친절했던 어떤 자매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랑감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 곳에서 좋은 직장에 다니는 ‘돈키호테’였다. 돈도 많고, 키도 크고, 호감이 가는 미남에다가, 테크닉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모두의 축하 속에 화촉을 밝혔다.

  그런데 결혼 후, 1주일 만에 헤어져서 귀국하였다. 그 이유는 밤에 자다가, 얼굴이 뜨뜻해서 일어나 보니, 남자가 자기 얼굴 위에다 오줌을 누고 있었다. 밤마다 계속 그랬다. 그는 ‘변태정신이상자’였다. 결국 결혼은 파국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결혼을 사기 결혼이라고 한다.

  호주의 시골에서 양떼를 키우는 독신 남자 데스몬드(57)는, 동유럽 미녀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러시아 여인 ‘나타샤’가, 시집오겠다고 하자 너무 기뻤다. 그녀를 만나려고 갔다가, 친절한 청년 2명이 대신 마중을 나와 따라갔다.

  그들의 안내로 ‘나타샤’가 머물고 있는 아파트에 들어가 보니, 권총과 칼을 든 청년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이들은 데스몬드를 집단 구타하기 시작했다. 데스몬드는 여권과 현금 그리고 신용카드 등이 들어있는 지갑을 빼앗기고, 며칠 간 계속 폭행당하며, 온 몸이 묶인 채 방에 감금됐다.

  납치범들은 그의 팔다리를 잘라버리겠다고 위협하며, 집에 연락해 몸값으로 현금 10만 불을 송금하도록 협박했다. 데스몬드 가족들은 나타샤를 만나러 갔는데, 거금을 보내라고 독촉하자 무엇인가 분명 잘못됐다고 판단해, 지난 7월 29일에 신고함으로, 결국 구출될 수 있었다. 

  이처럼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반대 결과를 가져올 때 사기라고 한다. 누구나 결혼을 하면 행복하고 낭만적이 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자다가 오줌벼락 맞는 것을, 낭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낭만으로 여기기보다는, 고통으로 여긴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사기 때문에 돈을 잃고, 사기 때문에 명예를 잃고, 사기 때문에 행복을 잃는다. 오늘 우리가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고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신앙도 사기 당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다. 신앙도 사기당할 수 있다.

1.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구원이다. ‘이렇게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는데,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사기를 당한 것이다.

  (고전15: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즉, 헛되이 믿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모세와 같이 있던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든 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32:4)라고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론의 잘못된 가르침을 따라, 거짓 신을 향해 실제로 하나님께 드렸던 화목제와 번제를 드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따랐다. 의식이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과 똑같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제사가 아니라, 사람의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만들어 낸 신이었다.

  거짓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제사 드리고 섬겼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내려, 그 날로 그들은 파멸되었다. 이처럼 그 사람이 아무리 유명하고, 덕망이 있고, 학식이 많고, 종교적으로 신실하다고 할지라도, 진리를 왜곡시키는 잘못된 인도자나 기관을 따르면, 그 결과는 파멸이다.

  자기 생각대로 이해하고 믿는다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 믿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떤 할머니가 사람들을 붙들고, 현대 아파트107-401호가 어디냐고 길을 물어 보았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집을 찾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지만, 아들은 그 곳에 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집 주인은, 할머니가 가진 주소를 확인해 보니, 현대아파트 이름과 동․호수만 같았지 아들이 사는 곳은 대전이 아니라, 서울의 현대아파트였다. 이처럼 주소를 똑바로 확인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수 없는, 파멸의 구덩이로 빠지게 된다.

  그러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복음은 무엇일까요?(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 말씀에는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이 요약되어 있다.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가장 좋은 소식,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을 뜻한다. 그러면 무엇이 가장 기쁜 소식일까? 가장 무서운 형벌에서 건짐을 받는 소식이다. 가장 무서운 일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지는 일이다.

  지옥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곳이지, 눈을 하나 빼버리더라도,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좋고, 손과 발을 찍어버리더라도, 지옥에 가지 않음이 좋다고 하였다(마5장). 지옥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기 때문이다(막9:43, 48). 그러므로 지옥 불에서 건짐을 받는 소식이, 가장 기쁜 소식이다.

  돈을 많이 벌고, 건강하고, 존경받는 소식도 좋은 소식이지만, 이러한 소식들은 이 땅에서 한정된 기쁜 소식일 뿐이다. 그러나 영원한 지옥 불에서 구원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히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오셨다가 복음의 요지이다.

  그러면 구원의 방법이 무엇인가? 우리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드리셨다.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이다. 히브리어로 복음을 베소라(ה󰙜וֹשׂ󰔶)고 하는데, 명사로 변하면 바사르(ר󰙴󰔯)육체, 고기가 된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셨음이 바로 복음이다.


2.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왜 육체로 오심이 복음인가?

피를 흘리지 않으면 사함이 없다. 육체가 있어야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실 수 있다. 대신 죽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의 외침은 2가지다.

  우리가 죄인이며, 이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말이다. 많은 사람들과 신앙 상담을 하다보면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죄에서 구원하셨음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심을 믿느냐?”고 물으면, “저는 모태 신앙이고, 우리 아버지는 목사님 이예요”라며 엉뚱한 대답을 한다. 구원은 혈통이나 가문과 아무 관계가 없기에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앞 절인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혈통, 학식, 민족, 돈과 명예에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예수님의 이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붙잡고 계신다. 예수님의 이름은 능력의 이름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면 귀신들이 떠나간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자가 낫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어떤 사람도 행복할 수 없다. 예수님을 받았다는 말은, 모든 것을 받았다는 말이다. (요일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아들이 있으면 생명이요, 아들이 없으면, 다 죽음뿐이라는 말이다. 지금 이 말이 우리들의 영혼에, 영원히 울려 퍼지는 메아리가 되기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밖에 없다. 영벌에 떨어지게 된다.

  아무리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장관, 박사, 심지어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목사라 해도 다 죽는다. 그러나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면, 영원히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듣는 자를 불쾌하게 만든다. 1세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이, 독선으로 비쳐진다.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의 길이, 그것 하나뿐이냐면서 산에 오르는 예를 든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다. 어느 길이든 정상에서는 다 만나게 된다. 동쪽, 서쪽, 남쪽, 북쪽으로도 오를 수 있다. 다만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를 편다.

  그리고 십자가의 외침은, 관대함이 없는 독선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그럴듯하지만 틀렸다. 세상에는 여러 길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는 좁은 길이다(요14:6).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마7:13). 또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고발한다. 인간은 듣기 싫어한다. “왜 밤낮 죄만 말하느냐? 좀더 건설적이고, 긍정적이고, 축복된 말씀도 있지 않느냐? 우리는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듣고 싶다”고 외치면서, 십자가의 복음에 저항감을 느낀다.

  또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 이성과 부딪친다. “이런 내용보다는, 이성에 맞는 말씀이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 우리는 그런 고상한 메시지를 듣고 싶다”고 외친다. 그러나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한다.

  이렇게 십자가의 복음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이성과 부딪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을 왜곡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복음의 내용을 좀 더 관대하게, 긍정적이고 이성에 부합하는 말씀으로 변질시키려고 시도한다.

  십자가만 살길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십자가를 선택사항으로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말라고 한다. 또 죄 문제를 다루기보다, 축복의 문제를 다룬다. 회개를 선포하기보다는, 예수님을 믿으면 아파트 당첨되고, 공부를 안 해도 좋은 대학 붙는다고 말한다.

  생명은 사라지고 기복신앙만 남게 되었다. 갈라디아 교회에도 이런 복음의 왜곡이 있었다. 거짓 교사들이 살며시 들어와, 예수님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율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십자가의 완전성을 부인하고,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을 증거 했다.

  이것은 이성에 부합되는 합리적인 가르침일지는 몰라도, 사람을 죽이는 가르침이다. 이런 잘못된 의를 좇는 모습을 보고, 사도 바울은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고 하였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구원하심이 바로 은혜의 복음인데, 예수님을 버리고 자꾸 다른 복음을 좇아갔다. 자신과 다른 사람의 공덕을 내세우고, 의지하려고 하기에, 단호한 대응을 한다.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오직 십자가의 복음밖에 없다는 말이다. 십자가만이 생명이라는 말이다. (8-9)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복음을 왜곡하는 자에게, 바울이 할 수 있는 최의 저주를 하고 있다.

3.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를 왜 저주하였나?

돈을 사기를 당하면, 돈만 잃는다. 명예 사기를 당하면, 명예만을 잃는다. 강도에게 살인을 당해도, 육신의 생명만을 잃으면 된다.

  그러나 복음의 사기를 당하면, 우리의 영생을 잃는다. 더 이상 회복될 기회가 없는 영벌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영적 살인자이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인 중에 최고의 악인이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 중에, 천주교를 이단적 요소는 있지만, 이단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천주교회를 너무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천주교는 성경말씀과 너무나도 다른, 저들의 전통을 전하는 가장 큰 이단이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자이다. 예수님께서 침묵하시면, 우리도 침묵하고, 말씀하신 것은 순종해야 한다. 따라서 가르치는 자는 성경으로 말하고,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좋아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이단이 된다.

  그들은 성경을 더 이상, 더하거나 뺄 수 없다고 했는데(계22:18-19), 외경 7권을 포함시켜 73권을 정경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이 더 많으니까, 성경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여서 우리가 더 옳다고 한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외경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성경대로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를 존경하지만,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예배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가 존경하는 어른께 예의를 갖추고, 겸손한 언행을 취하지만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들은 마리아에게, 저들의 원을 잊지 말고 들어달라고 기도한다. 기도와 예배를 받으시는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 밖에 없다. 천사도, 성인도, 그 누구도 될 수 없다. 사도 시대나 속사도 시대 이후에도 마리아는, 가장 축복받은 여인이었지만, 기도의 대상도 경배의 대상도 아니었다.

  천주교는 사제는 신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특별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사제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고 한다. 거룩한 사제는 독신으로 지내야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다 결혼했던 사람들이다. 구약의 제사장과 선지자들도, 모두 결혼한 사람들이다.

  독신은 4세기 초에, 금욕주의 생활을 하던 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결혼을 하지 않으면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천주교회를 보면, 더 많은 타락이 있었다. 미국 이야기지만, 성직자의 30%가 동성연애자로 추정한다(문화일보, 2002.4.24, 국제면 기사).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해야지, 신부인 사람 앞에서 할 수 없다. 신부가 죄를 용서해 준다고 말을 하므로,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사라지고, 면죄부가 나타나게 되었다. 일제 탄압 때, 로마 교회의 조선교구장 프랑스 뮈텔신부는, 그 고해자를 조선 총독부 경시청에 밀고한 실제의 사건이 있었다.

  뮈텔은 밀고의 대가로, 지금의 명동성당의 앞길을 내는데 공헌했다. 안명근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인데, 함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동참했던 사람이다. 그때 고해했던 일이, 악용되어 잡히고 말았다.

  죽은 자의 대죄를 용서하는 기도는, 인도종교에나 있지 성경에는 어디에도 없다. 천주교는 가톨릭 성경에도 있는,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며 섬기지 말라”고 한 2계명을, 그들의 계명에서 삭제하고, 계명을 하나씩 앞으로 하고, 마지막 계명에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자기 멋대로 넣었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우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연옥은 성경에는 없고, 이방 종교인 인도의 힌두교의 한 종파인 자니 교와, 페르시아에서 탄생한 배화교로도 알려진 조로아스터교에는 있다. 결국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해 헌금을 많이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함이다.


  결론이다. 다른 복음을 따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10절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복음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지, 듣기 좋은 말씀이 아니다. 생명을 주는 말씀이지, 내 귀를 즐겁게 하는 만담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따르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옳다고 주장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정말 그런가 살펴보자.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세는, 결국 잘못에 빠질 우려가 짙다. 경계해야 될 이단사상에도 물들기가 쉽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세는, 하나님 중심주의자요 신앙을 옳게 분별하는 자요, 참된 성도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고 하며, 그리스도의 종으로, 절대 그 말씀에 복종하는 자세에서, 신앙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다.

  (잠14:12)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그리스도를 나의 죄를 구속하시는 분으로 영접하시고, 내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기 바란다. 그러면 주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신다. 십자가로 용서해 주신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생명의 말씀을 세상 끝 날까지 증거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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