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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백성과 은혜 (창 16: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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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과 은혜 (창 16:4-16) 

하나님의 뜻을 지레 짐작하여 하갈을 첩으로 취한 아브람과 사라의 결정은 그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었고 예상치 못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몸종이었던 하갈이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이 된 것은 주인이었던 사래가 베푼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하갈이 잉태 전까지는 그 은혜를 잊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자기 인생은 탄탄대로요 확실히 보장받게 된 것 같아서 집안의 모든 사람이 자기 아래로 보였습니다. 교만한 마음이 제어되지 않고 점점 표출되면서, 결국은 “그 여주인을 멸시”하는 오만방자한 상태까지 되었습니다(4).

이 갈등은 사래와 아브람 사이로 확대되었습니다.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 마음이 상한 사래는 모든 책임이 아브람에게만 있는 것처럼 따집니다. ‘내가 그만큼 당신을 위해 희생하고 배려해줬으면 당신도 뒷감당을 잘 해주었어야지, 예쁘다고 감싸 돌기만 하니까 아주 버릇이 나빠졌지 않느냐’는 심정이지요. 사래는 아브람이 가장으로서 분명하게 질서를 세우지 못한 책임을 매섭게 따졌습니다.

아브람은 한 마디 변명도 못합니다. 찔리는 점이 있었거나 부지중에라도 사래를 무시하고 하갈을 집안의 여주인처럼 대했음을 자인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람은 가정의 질서를 되잡을 필요를 느끼고 하갈이 둘째 부인이 아닌 ‘사래의 여종’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지만 차마 하갈을 직접 꾸짖지는 못하고 아내의 처분에 맞깁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그러자 사래의 눈에 불꽃이 튀었습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했고 학대를 견디다 못한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했습니다(6). ‘집구석 꼬라지’ 희한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정이 순식간에 도미노처럼 무너졌습니다. 뒤늦게 수습해보려 했지만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하갈의 모습 속에서 교만하여 마음이 높아진 제 모습을 봅니다. 사래에게서는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인해 용서하지 못하는 적개심과 책임전가의 모습을, 아브람에게서는 과단성 없고 유약한 책임자의 모습을 또한 봅니다. 그것이 줄곧 내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천박한 인격이 분명하게 확인 되는 순간이면 깊은 슬픔과 아픔을 느낍니다. 스스로 수습해보려고 해도 빤히 보이는 인격과 능력의 한계를 느끼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표를 떼버리고 멀리 달아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한 가지가 저를 붙잡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는 밀양(密陽)의 의미가 ‘비밀한 볕’이라고 풀이한 후에, ‘그곳이 어떤 곳이냐?’고 묻고 ‘다른 곳과 똑같다’고 답합니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동일한 문답이 오가고 그 중간은 비밀한 볕의 영역인 기독교계도 다른 사회와 다를 바 없는 현실을 폭로합니다. 신자들의 위선, 뻔뻔함, 거짓 등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듯이 사람 사는 게 다 그 모양 그 꼴이지, 밀양이라고 해서 별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예리한 지적에 변명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각으로 보면 사실 본문의 아브람의 가정도 다른 곳과 똑같습니다. 믿음의 조상 가정이라고 해서 도덕적 존경심을 보일만한 탁월한 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 차이가 좀 있다고 해도 오십보백보지요. 이 영화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이해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인간의 죄악과 허물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은혜를 거두시지 않고 각자에게 합당하게 역사하심을 보게 됩니다. 어찌 보면 하갈은 참으로 기구한 여인입니다. 고향을 떠나 낮선 나라에서 종이 되었고 늙은 노인의 첩이 되었습니다. 아이를 잉태하면서 인생역전의 순간을 맞이했다가 하루아침에 추락했습니다. 분수를 모르고 주인의 은혜를 배반한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아브람에게 주어진 언약이 자기와 자기 아이의 것이 되리라 여겼던 부푼 희망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홀몸도 아닌 여인이 광야를 헤매야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소연할 곳 하나 없는 처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하갈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7-8절을 보면 먼저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에서” 하갈을 만나주셨습니다. 13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는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8a)는 질문으로 ‘아브람의 둘째 부인’이 아니라 ‘사래의 여종’이라는 그녀의 정체성과 그녀가 있어야 할 ‘삶의 자리’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9) 하셨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억울한 운명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 죄짓는 일이 아닌 이상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하갈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도 은혜지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있어야 할 ‘삶의 자리’가 어딘지, 그리고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것 역시 놀라운 은혜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하갈은 노예제도의 희생자요,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린당한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감추어진 은혜가 많습니다. 하갈은 애굽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여호와를 만났을 때 하갈은 전혀 놀라지 않는데, 이는 그녀가 사래의 수하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에 대해서 이미 익숙할 만한 신앙을 갖추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연단된 신앙은 인생의 가장 힘겨운 고비에서 자기 삶에 두신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소생되게 했습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10-11). 여종에 불과했던 하갈은 아랍 민족의 시조가 된 것은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이스마엘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라는 뜻입니다(11). 하갈은 하나님을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엘-로이)이라 불렀으며,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나를 감찰하시는 살아계시는 분의 우물)이라 했습니다. 그녀가 만난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가련한 형편을 보셨습니다. 그녀가 은혜를 망각하고 교만해져서 우쭐할 때에도, 학대받을 때에도,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도, 늘 지켜보시며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습니다. 하갈이 언약의 중심인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의 인간적인 방법도 보셨습니다. 그 가정의 불화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도 보셨습니다. 모든 언약을 취소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 또한 외면하지 않으셨고 언약을 취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브람의 가정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아이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지었다는 15절의 기록은, 아브람과 사래가 하갈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하고 하갈 또한 온전히 용서했음을 보여줍니다. 하갈에게 베풀어진 은혜는 그녀 개인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아브람의 가정을 회복시키는 의미도 동시에 있었습니다. 실상은 아브람 때문에 하갈도 은혜를 누린 셈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계획하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신성한 빛 가운데로 선택받은 사람도 죄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믿음의 조상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교회는 도덕적으로 좀 더 탁월해야 마땅하지만 실상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은혜를 배반하고 교만해진 하갈처럼, 어리석은 태도를 취한 아브람처럼, 용서하지 못하고 학대하는 사래처럼 비난 받을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개인으로서 그러할 때도 있고 공동체 전체가 찌지고 볶고 싸우는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탁월한 도덕성 때문에 거룩하게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구별됩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지고 회복되고 연합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허물과 죄가 폭로될 때 취할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변명하지 않고 허물과 약점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부복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백성이라고 해서 약점과 허물을 숨겨주거나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백성조차도 자주 은혜를 배반하는 죄인들일 뿐임을 폭로합니다. 아닌 척 해봐도 우리 역시 별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하갈이나 사래이나 아브람의 처지가 되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허물이 폭로될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분’과 ‘삶의 위치’와 ‘사명’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며 돌이키는 일이 필요합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임을 시인하고 억울한 피해자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는 마음을 버리고, 주께서 있게 하신 삶의 자리에서 각자가 하나님 백성답게 순복하기를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 잠잠히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벧전 5:5).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십니다(눅 6:35). 하나님은 모든 것을 들으시고 보십니다. 자기 백성들의 허물과 약점뿐만 아니라 도덕적 성품과 능력의 한계도 보십니다. 그분은 내가 완전할 수 없음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음과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없음도 아십니다. 그래서 각자에게 합당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용서하고 더불어 살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인간의 죄와 허물 속에서도 당신께서 말씀하신 언약을 실수 없이 성취하십니다.

용서와 회복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애쓸수록 분열과 상처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죄인들은 그저 그분의 용서의 은혜로 깨닫고 모든 것을 주께 맡길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알고 그 가운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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