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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오는 자 (렘 18:1-12, 몬 1:8-21, 눅 14: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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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오는 자 (렘 18:1-12, 몬 1:8-21, 눅 14:25-35)

1.  현대인을 유목민(nomad)에 비깁니다. 현대인의 특징이 이동에 있으며 또 여행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행할 때 유의해야할 일 가운데 하나는 가급적 짐을 줄이는 일입니다. 내가 성지 순례할 때 아주 작은 캠코더를 가지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일행 가운데 한 분은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간다고 엄청 큰 것을 준비해서 갔습니다. 그러니 그 바쁘고 힘든 여정에 캠코더 둘러매고 다니는 일이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닌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다 여행가방도 내가 가진 것보다 더 큰 것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이동 할 적마다 땀을 뻘뻘 흘리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신 말씀을 보십시오.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버리지 아니하면 떠날 수 없고, 떠나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 보면 아브라함은 “혈혈단신”으로 고향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야기 가운데 버리지 못해서 결국 망한 사람이 있습니다. 롯의 처입니다. 소돔 고모라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결국 그는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광경을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매우 강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향하여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이 버려둔 “배와 그물”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전 재산이요 삶의 터전입니다. 그 베드로와 안드레가 우리 주님의 맨 처음 제자가 되었습니다. 과감하게 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어떻게 했습니까? 배와 그물은 물론 부친까지 배에 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들이라고 해서 너무 당연하게 읽고 받아들이지만 어떻게 이렇게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들이 이렇게 했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세리 마태 같은 사람은 그 직업이 당시로서는 참 구하기 어려운 직장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까 그 돈 되는 직장을 툴툴 털고 일어나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주변에 모여 제자단을 형성하게 된 그 사람들을 볼 때 적어도 엄청난 결단을 하고서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당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럴 테면 “어실미실” 하게 따르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딱 부러지게 결단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분명하게) ‘아니요’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단 주님을 따라나섰으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례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진해서 따르겠다고 하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적어도 고난에 대한 각오 없이 어설프게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 환상을 깨라고 촉구하셨습니다.


2. 주님의 제자 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주문을 보십시다. 

(1)  먼저 오늘 누가복음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 주님의 제자들이요 또 참 제자 되기 원하는데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부모도, 처자도, 형제와 자매도, 아니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시니 그렇다면 우리 주님의 사랑의 계명은 다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에베소서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요.”, 디모데서에는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는 사람은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했는데 성경의 이런 말씀들을 어떻게 조화할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 신앙과 삶의 우선순위를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세상의 어떤 윤리규정이나 사회관습이나 법보다도 오히려 주님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국법을 어기면서도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다 순교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 의하여 인질 되었던 그 일행을 두고 말들이 많았지만 만일 기독교가 세상 나라 법에 꼬박 순종했다면 이 땅에 기독교는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복음은 저와 여러분에게 전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영원히 버림받았을 것입니다.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주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귀하게 여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고 한 우리 찬송가의 가사가 바로 여러분의 진실한 신앙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누가복음서 본문 27절에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배당 첨탑은 안동에서 제일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길이 10m의 거대한 십자가가 있고 밤에도 볼 수 있도록 불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십자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주님이 달리셨던 사형 틀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수치와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주님은 거기 달리셔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늘 지고 가리라.”고 찬송합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흔히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십자가”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비록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어려움이 다 십자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주님 말씀대로 내가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이나 어려움이 나의 십자가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고통과 수욕의 상징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새 같은 세상에 누가 손해보고, 고난을 자청하고, 실패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을 보고 지혜롭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것이 주님 때문이라면 오히려 영광이요, 자랑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바울이 “나에게는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할 때 다른 사람들은 바울을 보고 미쳤다고도 했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바울에게는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목숨까지라도 아까울 것이 없었으며, 그래서 즐겨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다르지 아니하면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3)  누가복음 본문 33절에는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 나오는 우리 주님의 말씀은 그야말로 갈수록 태산입니다. 부모, 처자, 형제자매를 미워하라고 하신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시더니 이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최근에 우리 기업들이 소위 “구조조정”이라고 하여 이제까지 한 그룹에서 소위 “문어발식”으로 운영해 오던 것을 분야별로 독립시킨 것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어떤 제품을 생산하게 되면 그 분야만을 소위 세계 제일로 개발하도록 하는 등 한 가지 특수한 분야에 집중하도록 한 것입니다. 신앙의 구조조정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들도 먼저 본질에 집중해야합니다. 최근에는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으로 하다보니 본질에서도 이탈하게 되고 능률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다 보니까 수많은 사역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적어도 세상이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사업이 아니라 교회 본연의 모습이요 본질적인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이나 교회가 세속적 가치관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무소유를 예찬한다기 보다 소유에 앞서 올바른 존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면 결국 물질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겨야지 물질의 종이 되어 물질을 주인으로 섬겨서는 결코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땅에 물질 만능의 풍조 속에 온갖 잘못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워낙 명품을 선호하다 보니 “짝퉁”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일부러 짝퉁인 줄 알면서도 과시용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명품인 줄 알고 샀는데 속아 짝퉁을 산 사람들도 숱하게 많습니다. 둘 다 같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도 소유에 집착하는 짝퉁 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병 고침 받기 위하여, 단지 부자 되기 위하여, 단지 소원 성취를 위하여, 아니면 사회적으로 어떤 유리한 입장을 만들기 위하여 교회를 선택하는 것은 다 사이비 신앙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아낌없이 주십니다.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되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보다 넘치는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병을 고쳐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을 주십니다. 우리로 세상에서 형통하게 해주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입으로 “주여, 주여”한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에 온통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람은 불질의 노예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왜 사이비 이단이 판을 치고 있습니까? 이런 짝퉁 신앙인들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몸에 좋다면 가리지지 않고 다 잡아 먹듯이 복 받는다면 아무데나 찾아가고 누구 앞에서나 머리를 들이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이 될 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나 한 사람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때 주님은 나 한사람을 통해서 우리 교회와 이 땅에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십니다. 예레미야에게 보여 주신대로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대로 만들 듯이” 진흙 같은 우리를 들어 놀라운 하나님의 그릇이 되게 하 주십니다. 오늘 서신에 무익하던 오네시모를 들어 바울의 선교사역에 절대로 필요한 유익한 사람으로 만들 듯이 우리를 통해 주님의 큰 일, 새로운 일,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을 제 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즐겨 내 십자가를 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우리 주님만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앙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어떤 것이 아니라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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