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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는 것이 복되다 (행 20: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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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이 복되다 (행 20:13~38)

도전은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죽음을 각오한 도전일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세계적인 험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남다른 것은 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그 힘든 길을 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명예도 따릅니다.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이루어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 길은 모두가 다 원한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길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도 그렇습니다. 쉽게 갈 수 있는 것 같으나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아니 그로 인해서 목숨을 내어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저 역시 지난 주간 그러한 길을 다녀왔습니다. 평온한 것 같으면서도 언제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 모르는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가 놀라웠습니다. 하루 열 시간씩 강행군하면서 말씀을 전하는데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이 한결같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은 전하는 저나 듣는 이들이 모두 하나 되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파묻힐 수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우리교회 성도들의 계속된 중보기도와 더불어 이루어진 일입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중보하며 기도했기에 참으로 평안하게 그리고 뜨겁게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모든 조건은 참으로 형편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라도 더 배우고 익히려고 하는 그 열심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기들은 두로아에서 온 종일 말씀을 듣다 그만 졸다가 땅에 떨어져 죽었던 유두고처럼은 되지 않겠다는 각오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함께 하시며 귀한 은혜의 시간으로 모든 시간을 이끌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저 역시 하루 열 시간씩 계속 강핸군하며 말씀을 전하는데도 지치지 않고 또 목도 별로 상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힘주시는 능력이 아니고서는 다는 무엇으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중보하며 기도해 주신 성도님들께 감사드리며 그리고 시간시간 함께 하시며 저를 도구로 사용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권면하는 바울의 당부를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바울은 항상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서둘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밀레도에 잠시 머뭅니다. 그것은 그가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 바삐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바빠도 바울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음을 잘 압니다. 그것은 곧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당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는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실 에베소에서처럼 열정을 다하여 말씀을 전하고 또 제자들을 가르치며 양육한 적이 또 없을 정도로 바울은 그곳에서 온 힘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에베소 교회가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쳐 갈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도에 잠시 머물며 그곳으로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을 오도록 하여 그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아시아에 온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그 동안, 나는 유대인들이 지어 낸 모함으로 몹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겸손히,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파하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공중 앞에서나 여러분의 집에서 여러분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시아에 온 첫날부터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는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지 그것도 모함으로 몹시 고통을 당했노라고 하면서 그렇지만 언제나 겸손히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섬겼노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바울이 그렇게 했습니까? 무엇을 위해서였습니까? 바로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을 전해주고자 하는 바울의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유익한 것이란 바로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 모두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과 우리 주 예수님을 믿으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왜 그렇습니까? 물론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물질로 도울 수도 있습니다. 살아가는데 유익한 지식을 전해 줌으로 도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이 세상에 머무는 데만 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정말로 그들을 위한다면 오히려 영원한 것을 그들에게 안겨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아무리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결국에는 가장 불쌍한 자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바울입니다. 자기부터가 출세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고 있습니다. 어차피 고난을 각오한 길입니다. 그랬기에 모함으로 몹시 고통을 당하면서도 언제나 겸손히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을 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것을 공중 앞에서나 지도자들의 집에서 다시 말해서 교회에서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 목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돌아봄으로 도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삶에 필요한 것도 도와야 하지만 거기서만 끝나고 만다면 그것은 내 영광을 구하는 헛된 수고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섬기는 것은 단지 그들을 이렇게 사랑으로 섬기는 데서 끝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생명을 전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모든 것으로 그들을 섬기지만 가장 큰 섬김은 예수님을 그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안에서 성도들에게 유익한 모든 것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향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목회 사역이 바로 그렇습니다. 목회 사역이라는 것이 단순히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유익한 것을 하나라도 더 전해주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것이 바로 목회 사역입니다. 전하는 이의 유익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생명들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먼저 예수님을 전하고 그리고 그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심령들에게 유익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많은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이런 저런 모함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오히려 더 겸손하게 섬길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 사역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목회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동참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 곧 에베소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지도자들을 오라고 해서 그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교회의 지도자들 그리고 지도자들에 의해서 양육되어질 모든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말씀으로 양육 받아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가 다 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가르침을 받아 좋은 하나님의 일꾼이요 좋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든든히 서가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바울의 모든 사역은 죽음을 각오한 사역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그저 내가 좋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힘 내 지식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이는 곧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아니 성령의 능력으로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바울이기에 철저히 성령의 명령에 따라 행합니다. 그렇기에 성령께서 이끄는 그 길이 아무리 험하고 설사 그 길이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해도 오히려 기쁨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임하신 성령께서도 그러한 것을 바울에게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울로 하여금 오히려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분명 성령께서 이끄시는 길을 바울이 따라 갑니다. 그런데 그 길에는 어느 도시에 가든지 감옥과 환난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길에 성령께서 힘과 능력으로 함께 하시겠다고 하는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말고 그 길을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도 그것을 잘 압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기의 목숨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 마칠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그 어떤 환난이 있다고 해도 설사 그로인해서 죽게 된다고 해도 오히려 우리는 기쁨으로 가서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이끄시는 길이요 바로 그 사명을 주님을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신 주님의 명령과 약속을 우리 모두가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땅히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고 하더라도 성령께서 명령하시면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아니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비단 위험한 선교지뿐이던가요?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안전하다고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길이 바로 순교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의 시간들이 어찌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겪게 되는 어려움도 당연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해도 그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아니 그것은 내가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힘을 주십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어차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냄은 어린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힘만으로는 이기고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목자 되신 주님이 함께 하시며 돌보아주심으로만 살아갈 수 있고 이겨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이겨내지 못할 핍박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을 의지해서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는 것이요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죽음의 골짜기라도 기쁨으로 따라가는 우리 모두요 그래서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 마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제 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능히 세울 수 있고 모든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기업을 받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라고 당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만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를 능히 세울 수 있고 모든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기업을 받을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도 없고 하늘나라의 기업을 함께 받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핍박과 고난을 견디고 이길 수가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배우고 익히며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이요 날마다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힘을 의지해서 우리는 날마다 살아가되 결코 그 누구의 금이나 은이나 옷을 탐내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힘써 직접 일을 해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마련해 나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건강과 밝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힘써 수고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큰 은혜요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내가 잘 살고 또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만 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약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도 복이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심는 그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는 자가 될 때 더욱 많은 것을 거둘 수 있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약한 사람이라고 해도 열심히 일해서 다른 약한 사람을 도와 나가는 동안 나도 강한 자요 풍성한 자가 되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움을 주고받는 동안 함께 강한 자요 풍성한 자로 세워져가는 것이요 거기서 얻는 기쁨은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단지 물질만이 아닙니다. 그저 물질만을 준다면 그 사람은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받는 것에만 익숙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물질과 함께 사랑을 주어야 하는 것이요 거기에 더하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이 말씀 안에서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 말씀과 사랑을 힘입어서 또한 든든히 서 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생명입니다. 능력입니다. 그 생명의 말씀이 함께 할 때 우리는 자랄 수 있습니다. 든든히 서 갈 수 있습니다. 생명이 없고서야 어찌 자랄 수가 있고 어찌 든든히 서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이렇게 나눌 수 있고 도울 수 있다는 그것으로 인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하고 계속해서 사랑의 눈으로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런 사람을 성령께서 알려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기회를 따라 힘써 약한 자를 돕는 일에 온 힘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이런 기회를 계속해서 마련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와 우리 모두를 복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기회를 우리는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전보다도 더욱 많은 것으로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이요 이렇게 주기 위해서는 또한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는 곧 사랑의 주고받음입니다. 결국 우리는 물질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생명이 풍성해 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기쁨으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주기만 하고 받기는 싫다든지 나는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겠다고 하지 말고 누구라도 주는 것에 힘쓰고 또 주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더욱 풍성한 것으로 우리 모두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에 함께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들과 모든 맡겨진 양떼를 잘 살피고 그들을 잘 돌보십시오.”라고 바울은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돌아보아야 할 양떼는 누군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는 우리 마음에 주셔서 기도케 하시는 태신자들이 바로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양떼인 줄로 그렇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구역에 나의 보살핌이 필요한 자가 누군지를 또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을 잘 돌보고 이끌어주는 그런 삶을 우리 모두는 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감독자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때가 갈수록 악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사나운 이리처럼 교회에 들어와서 양떼를 해치려 하는 일이 계속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 가운데서도 진리를 왜곡되게 말하고, 제자들을 유혹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는 사람들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실족하는 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다 말씀에 든든히 서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기쁨으로 은혜와 사랑을 주고받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왕이면 주는 자가 되기를 더욱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어진 주는 기회를 잘 활용해서 더욱 하나님 앞에서 복된 성도로 우뚝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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