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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빌 1: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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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교회는 또 한번 웃지 못할 촌극(寸劇)을 벌리고 있습니다. 금번 아프가니스탄 일로 인하여 모 교단 100여명의 목사들이 공격적인 선교방법을 회개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유식자는 기독교가 종교적 인프라가 구축된 종교에 대해서 존중하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가 반성해야 될 일은 분명히 있습니다. 인질을 구해내기 위해 테러집단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기므로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 위상에 적지 않은 손상을 입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행 4:12). 예수님의 고별사는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였습니다(행 1:18). 수단에서 17년 동안 사역한 앤드류 김 선교사는 "무슬림 개종을 위해 일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약속하는 서원서와 죽음을 앞에 두고 마지막 할 말을 쓰는 유서를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피의 복음입니다. 최선의 전파는 순교정신으로 등식화됩니다.

여기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케 된다면 자신이 살고 죽는 것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로마의 감옥에 있는 현재 자신의 처지를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석방이 되면 자유로운 몸으로 복음을 증거하겠고 만약 사형이 선고된다면 순교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전파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일에 그의 삶의 가치를 찾기를 원했습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그의 삶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삶은 결코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표현은 참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을 소망하는 그의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살아서 복음전파의 열매를 가져온다는 점에서는 사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석방이 될 때는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 자신으로 인하여 현재보다 한층 더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그는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여기『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롬 1:17; 합 2:4).『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요 3:16).『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요 14:1).

믿음은 곧 생명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31절에『…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헬라어 동사 '피스튜오'는 반드시 in(∼안에), on to(∼에게로), for(∼를 위하여, ∼때문에)등의 전치사를 동반합니다. 예컨대 belive in Jeses Christ, belive on him, belive for Christ등입니다.
이 말은 '예수 안에서', '예수에게로', '예수를 위하여' 혹은 '예수 때문에' 라는 말인데 예수를 빼놓고는 믿음을 논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主)이십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했습니다.
신학자 메이어(meyer)는 "믿음의 주라고 할 때 주(主)는 믿음의 창설자"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을 온전케(built) 하시는 이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우리 믿음의 근원자요 창설자인 동시에 우리 믿음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자의 객관성 있는 행위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전보와 기쁨을 위해서

Ⅰ. 목자와 성도가 함께 해야 합니다.

본문 1장 25-26절에『…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은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시 빌립보 교인들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때 빌립보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울로부터 배우게 될 것입니다.
바울을 통하여 그들이 믿음의 진보를 할 수 있고 말씀으로 충만해 질 것입니다. 이와 병행해서 그 말씀을 행함으로 그들의 삶 가운데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여기『자랑』(카우케마, )이란 말은 곧 기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자랑(기쁨)은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있을 때만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들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풍성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목자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을 얻게 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 믿음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는데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성경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했습니다(요 1:14).
요한복음 5장 39절에『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반드시 타계에서 오는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타율주의 종교 혹은 계시 종교라고 합니다. 자율주의 종교와는 대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율주의 종교는 자기 스스로 진리를 찾아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육체 중에 들을 수만 있다면 오체 불만족이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데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2) 기적의 축복을 체험할 때 믿음을 얻게 됩니다.
시편 106편 12절에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라고 했습니다.
홍해 앞에서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누가복음 5장 4절에『…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실 때 하신 일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나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가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그물을 내린 결과 고기가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물이 잡힌 고기로 인하여 포화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간에 깊은 데로 고기를 모아 놓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를 향한 신뢰의 극치를 고백하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6절에『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져 보지 아니한 곳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간에 배 오른 편으로 고기를 모아 놓으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제자들이 던졌더니 결과는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축복 체험은 믿음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① 예수님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보고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고 했습니다(요 2:11). ② 예수님께서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선지자라고 했습니다(요 6:14). ③ 예수께서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리실 때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요 11:42). 나사로 까닭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요 12:11).

Ⅱ.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본문 1장 27절에『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고 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은 복음을 받은 사람답게 생활하라는 말입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아가는 기준이 바로 복음입니다.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라는 말은 '한 마음으로' 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해 수고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복음(Gospel)은 기독교의 다른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복음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구약적 배경은 아이의 출생을 알리는 기쁨의 소식에 사용되었습니다.
예레미야 20장 15절에『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이라고 했습니다.
전쟁 승리의 쾌보를 알리는 기쁨의 소식에 사용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사울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사울의 머리를 베어 그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백성에게 전파했다(삼상 31: 9)는 경우입니다.
또 이 말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구원하는 능력의 행사를 말할 때 쓰였습니다(시 40:9; 사 40:9).

1) 복음의 요구에 부응하는 삶입니다.

(1) 복음은 회개를 요구합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라고 했습니다.
(2) 복음은 믿으라고 요구합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3) 복음은 용서하라고 요구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에『…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4절에『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2) 복음이 주는 사죄의 은총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1)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이 사죄의 근거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2절에『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3장 12절에『…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2) 사죄의 내용입니다.
① 우리 죄를 멀리해 버렸습니다.
시편 103편 12절에『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했습니다.
② 주의 등 뒤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사야 38장 17절에『…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③ 도말하였습니다.
이사야 44장 22절에『…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④ 기억도 아니하십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에『…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⑤ 덮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시편 85편 2절에『…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⑥ 죄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해 주십니다.
시편 32편 1절에『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⑦ 그날 그때의 죄를 못 찾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50장 20절에『…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라고 했습니다.
⑧ 죄를 죄로 인정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4장 8절에『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했습니다.
⑨ 붉은 죄를 희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⑩ 허물을 넘기시고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미가서 7장 18절에『…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3) 구원의 복음에 대한 보은의 삶입니다.

(1)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2) 복음전파의 영역은 땅 끝까지 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8절에『…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3) 복음 전파의 대상은 만민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라고 했습니다.
(4) 전파의 내용은 복음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Ⅲ.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본문 1장 29절에『…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1) 신앙공동체의 일체화 운동에서 오는 수고입니다.
본문 1장 27절에『…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고 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마치 임전태세를 갖추는 것과 같이 하라는 말입니다. 분리와 방종이 아니고 협력이라고 했습니다.

2) 대적들과 싸움에서 오는 수고입니다.
본문 1장 28절에『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운동을 방해하는 이방인들의 횡포와 그들의 믿음생활에 도전하는 유형무형의 대적들 앞에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게 싸운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빌립보 교회 안에 율법주의와 유대주의와 교회 밖에 있는 이방인들과의 영적 전투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에 대한 신뢰성을 굳게 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에 대한 책임과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을 취하고 고난을 절대로 소외시키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와의 일체와 신뢰를 전제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빌 3:10; 살후 1:5; 골 1:24).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곧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주와 연합하여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이와 병행하여 그의 영광에도 동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8:17).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히 11:24-26).
믿음으로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습니다(히 11:35-38).
선지자들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고난의 현장을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히 11:32).
골로새서 1장 24절에『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추상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믿음의 시작과 진행과 마침입니다.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목사의 설교를 듣고 행해야 합니다.
믿음의 진보와 기쁨은 축복을 체험할 때 가능합니다. 믿음의 진보와 기쁨은 복음의 합당한 생활과 그의 고난에 참예하는 교회 운동에서 그 절정을 체험하게 됩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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