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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 13: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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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 여유롭고 풍족하게 살던 제왕 솔로몬도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전1:8)라고 고백했습니다. 만물이 얼마나 피곤한가를 말하면서 그는 한술 더 떠 온 우주 만물이 다 피곤하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달과 별도 피곤하고, 물과 나무도 피곤하고, 동물도 피곤하고, 물고기도 피곤하고, 피곤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인간은 유달리 피곤함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피곤은 어느 피조물의 피곤보다 더 노골적이고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 옛날에도 그렇게 피곤한 인생을 살았다니, 정신없이 복잡하고 너무 빨라서 도무지 숨 쉴 틈도 없는 현대 문명을 살아가는 우리가 왜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피곤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피곤한 것이 당연하다고 해서 이 피곤을 그대로 쌓아 놓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무기력증에 걸리게 되고, 마음에 낙심이 찾아옵니다. 마치 험난한 파도와 싸우던 선원이 쉴 새 없이 계속 되는 파도에 지쳐 배를 포기하고 바다로 뛰어드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삶에 대해 그렇게 행할 수 있습니다. 오만 가지가 다 하기 싫어집니다. 백기를 들고 항복하고 싶습니다. 도망가고 싶습니다. 급기야 자살을 선택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12:3)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피곤할 수 있지만, 피곤 때문에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 동문서답을 하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피곤하면 환경을 개선하라고 한다든지,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다든지 구체적인 처방전을 알려 줘야 할 것 같은데, “예수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예수를 생각함으로 피곤이 물러가고 새 힘을 얻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곡식 가운데 있는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여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라지를 뽑아서 태우라는 내용입니다. ‘가라지’의 헬라어 ‘지자니온’은 독보리의 일종으로 ‘가짜 밀’이라고 불립니다. 예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로서 사람들을 의의 자리에서 넘어지게 하는 자이며 불법과 부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가라지 비유를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에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참된 성도들로 구성된 비가시적(非可視的) 무형(無形) 교회와는 달리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시적(可視的) 유형(有形) 교회 내에는 거짓 선지자들도 섞여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거짓 선지자들 중에는 참된 신앙을 결여한 채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구원의 대열에 함께 선 것으로 착각하는 소극적 부류가 있는가 하면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교회의 분열과 파탄을 조장하기 위해 은밀히 활동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가라지에 비유된 이 거짓 선지자들의 존재 및 활동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라지의 특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라지는 다른 사람일 경우도 있지만 내 안에 가라지적인 요소로 인해서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거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제 가라지의 삶을 다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곡식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위장성 

  본문 27절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가라지의 모습이 밀이나 보리와 아주 흡사하여 실제로 이삭이 패기까지는 쉽게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겉으로는 진실되고 의로운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 온갖 좋은 것들을 약속하지만 실상은 어떻게 해서든 복음의 광채를 흐리게 만들기 위해 전력합니다. 예수께서도 거짓 선지자들을 ‘양의 옷을 입은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규정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웃음 속에 비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속이고 넘어뜨리고 죽이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는 가식적이고 잔인한 실상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살인강도와 사단으로 변하여 사람을 죽이고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겉포장은 장미꽃으로 엮어졌으나 속에는 독사들로 가득한 것입니다. 영양제라고 쓴 사약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속기 쉽고 속아서 불행하게 되고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였습니다. 17세였던 타가스테 유학 시절부터 시작된 한 여인과의 육체적 사랑, 19~29세까지 무려 10년 넘게 빠져들었던 마니교, 그 후에 이어진 플라톤 사상에 대한 심취는 어거스틴을 끝없는 방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기도의 어머니로 아들을 위한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방탕하며 출세 지향적이고 믿지 않던 남편과의 갈등 속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니카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AD 384년에 30세가 되어 밀란으로 이주한 어거스틴은 수사학적 관심 때문에 암브로우스의 설교를 들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세상적 동기를 거룩한 목적을 위해 선용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그의 영혼이 치료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마 후 그는 밀란의 한 정원에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죄의 노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참함 가운데 계속 부르짖었다. ‘왜 나의 추한 죄들을 끝나게 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이렇게 자문했고 마음속에 가장 쓰라린 슬픔을 품고 줄곧 울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가까운 집에서 나는 어린아이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나는 홍수처럼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며 서 있었고, 이것이 성경을 펼쳐 나의 눈길이 닿는 첫 구절을 읽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성경을 펼쳤다. 그리고 시선이 닿는 첫 구절을 읽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 나는 더 읽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의 끝에 이르자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나의 마음 안에 넘쳐 들어오는 신앙의 빛 같았고 의심의 모든 어둠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그의 오랜 신앙적, 육체적 방황의 종식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인격적 변화를 경험했고 세상적 야망을 포기했습니다. AD 387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고 395년에 감독으로 선출된 후 430년에 임종할 때까지 그가 남긴 족적은 경이적이었습니다. 과장인지 몰라도 그 후 기독교 사상은 그에 대한 주석에 불과했습니다. 회심이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회심은 어거스틴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회심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마니교나 세상 향락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처럼 보일 뿐 결코 참된 행복과 자유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위선적인 옷을 벗어 버리고 회개할 때 용서와 평안을 회복하게 됩니다. 위선적인 사단의 세력을 물리칩시다. 위선적인 삶에서 벗어납시다. 그리하여 가라지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곡식으로서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잠복성 

  본문 28절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라지는 이삭이 나오기까지 평상시에는 곡식과 마찬가지의 외형과 성장 과정을 보이는데 일단 이삭이 패면서부터 알곡과 확연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즉 가라지들이 평소에는 잠복해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그 감춰진 본색을 드러내 놓고 알곡에게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유괴하는 유괴범들이 그러하고 여러 이단들이 그러합니다. 교회에 등록해서 천사처럼 잠복해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교회를 어지럽히고 싸우고 분열하게 합니다. 결정적인 때까지 천사의 모습으로 기다리다가 악마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정없이 물고 뜯고 죽이는 것입니다. 간첩이 잠복해 있다가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알곡과 가라지는 처음에는 분간되지 않다가 곡식이 패기 시작할 무렵에야 비로소 식별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사단의 세력도 평소에는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날뛰게 됩니다. 두 얼굴 이상의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그때 다릅니다.

  전영호 개그작가가 쓴 『웃음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학교 가는 길은 소풍가는 길같이 즐거워야 합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듯이 한번 교회학교에 발을 들여 놓았던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시 그리스도인으로 돌아오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엄마 : 늦겠다! 빨리 교회학교에 가야지!
  아이 : 차 태워 주면 갈게요!
  엄마 : 무슨 얘기야? 걸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두 발을 주셨겠어?
  아이 : 두 발을 주신 이유요? 한쪽 발은 자동차 액셀레이터를 밟고 또 한쪽 발은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라고 주셨을걸요.
  엄마 : 뭣이야? 넌 골로새서 3장 20절,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도 모르니? 앙! 이 녀석아!
  아이 : 엄마! 에베소서 6장 4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된 거에요?
  엄마는 졸지에 할 말 없어지는 겁니다. 암튼 엄마는 아이의 손목을 붙잡고 강제로 걸어서 교회로 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아이는 심술이 났는지 몸을 비틀고 걸음을 멈추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을 치고 난리를 치고 있으니 엄마가 한 마디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엄마 : (이를 악물고 노려보며) 그만 (?)랄하고 빨리 걸어!
  겁먹은 아이, 열심히 걸을 수밖에… 드디어 교회 앞, 목사님의 반가운 인사.
  목사님 : 어이구, 걸어오나 보구나? 집에서 교회까지 얼마나 걸리지?
  아이 : 그냥 걸어오면 30분! (?)랄하면서 걸어오면 1시간 걸려요!
  목사님 : ……?!?!?!?!

  오늘도 내 안에 잠복하고 있는 가라지들이 있습니다. 교만, 비판, 정죄, 욕심, 분노, 악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절제되고 거룩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분노하고 욕심을 따라서 악하게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가라지들을 뽑아내어 불태워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곡식과 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해독성 

  본문 29-30절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파라레스틴 근방의 밀이나 보리밭에 나는 가라지를 잘못 먹게 되면 급한 설사병을 유발시키며 때에 따라서는 목숨까지 위협할 정도로 인체에 큰 손상을 입힌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사단의 시험과 도전에 늘 경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심각한 상처와 곤경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도와 지상 교회는 항상 불완전하여 늘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사단의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내외적으로 끊임없이 성장되고 확장되어야 합니다. 가라지가 무서워서 농사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노력하고 땀을 흘려 곡식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지상 교회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모습을 제거하시고 온전한 알곡을 추수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참고 기도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가라지와 끝까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반드시 칭찬하십니다. 가라지는 불같은 지옥으로 가지만 곡식은 하나님의 곳간 천국에서 영생하게 됩니다. 교회와 성도는 핍박을 받으나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이자 문학가인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아주 멋진 말을 했습니다.
  “제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제 믿음은 이성에 근거해 있습니다. 정작 제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저의 상상력과 감정입니다. 믿음과 이성이 한 편이 되고, 감정과 상상력이 다른 편이 되어 싸움을 벌이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이성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또 그분이 나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위기를 만나면, 이 이성에 근거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버리는 장애물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감정입니다. 위기 앞에 동요되는 것입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만들어서 공상을 하고 스스로 불안을 조성합니다. 기도한다고 엎드리지만, 기도는 커녕 거침없이 달려드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걷잡을 수 없는 부정적인 공상과 엉뚱한 생각들은 우리를 더욱 불안과 두려움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게 감정입니다. 이 근거 없는 감정이 이성에 근거한 믿음을 흔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루이스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믿음은 아무리 기분이 바뀌어도 한 번 받아들인 것은 끝까지 고수하는 기술이다.”

  참 멋진 말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이성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기분과 상관없이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는 기술이라는 것입니다. 기술을 얻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도 일종의 훈련이 필요하고, 훈련을 통해서 좋은 습관을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 사단은 성도를 해롭게 하지만 하나님을 언제나 유익하게 하시고 행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만 굳게 믿읍시다.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라지가 많은 세상입니다. 가라지의 위장성과 잠복성과 해독성을 기억합시다. 내 속에 있는 가라지를 뽑아냅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곡식같은 온전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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