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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의지이다 (요일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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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의지이다  (요일 4:7-12)

사랑은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잘 못 이해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를 사랑합니다.” 아주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애착의 감정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반드시 거기 합당한 행동을 만들어내지는 않습니다. 종종 사랑하고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알콜 중독자가 술집에 앉아서 눈물을 흘립니다. 자기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아내와 자식을 사랑합니다. 죽도록 사랑합니다.” 사랑하면 당장 집에 가야 합니다. 술을 끊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애착의 느낌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동은 반대입니다. 무책임합니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오해는 삶의 전반에서 관련된 모두를 괴롭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여기에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의 행동이 나옵니다. 감상적인 느낌이 아닙니다. 죄인 원수를 향해서 사랑을 확증하는 행동을 합니다. 그럴 능력이 있고 또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사랑은 관련된 주체와 대상을 크고 아름답게 합니다. 예수는 그 사랑으로 영적 육적 온 세계를 구원하고 지배합니다. 자신이 희생하고 망한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이기고 지옥까지 깨뜨리고 나옵니다. 오늘 하나님은 이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자신을, 가정을, 교회를, 직장과 사회를 사랑하여 살리라 하십니다. 어떻게 초대를 받아들일까요?

1. 자신을 사랑하라

사람들이 목사를 찾아올 때는 단순한 위로를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을 지적당하고 다른 방식의 삶을 살라고 말하면 방어를 시작합니다. 자신은 안 그렇다는 겁니다. 열심히 자신은 잘못된 점이 없다고 변명합니다. 자신이 잘못 알려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억울한 자신을 위로해주고 격려해 달라는 게 찾아온 이유입니다. 사랑해 달라는 겁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말 죽어도 하지 않습니다. 사업이 엉망인 것 말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전혀 적응 못하고 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이 위기인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혹시 말해도 진짜 할 이야기는 감춥니다. 목사와의 이야기를 멋진 기자회견처럼 진행합니다. 그리고는 한바탕 축복기도를 받고 돌아갑니다. 모두에게 시간만 낭비입니다.

스스로도 자기 문제를 정직하게 살펴보기를 두려워합니다. 이혼한 이유는 모두 상대에게 있습니다. 사업이 이 모양인 것은 경기가 나쁘고 함께 일하는 사람이 무능해서 그렇습니다. 가정이 이런 것도 배우자 성질이 못되어 그렇습니다. 그런 게 삶이니까 그냥 살아갑니다. 아파도 원인을 정확히 보고 고치고 새로 일어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자기가 사랑 받을만한 존재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목사에게도 그렇게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에게도 그렇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알고 있습니다. 별로 남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요. 자신이 보아도 별로 사랑 받을 만한 존재가 못됩니다. 사랑 받고 싶어요.

사랑이 부족하면 모든 게 두렵습니다. TV에서 최면술 시술을 합니다. 남자 연예인들이 최면 속에서 자기가 무서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람은 귀신, 체격이 큰 한 사람은 바퀴벌레, 다른 덩치 큰 사람은 주사를 무서워합니다. 8살 때 엄마가 돈가스 사준다 하고는 병원에 데려가서 주사를 놓습니다. 어릴 적 경험은 평생 모두를 무서워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는 게 모든 두려움을 물리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걸 감정으로 애인의 말로 들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우주의 창조주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니 나는 의지로서 받아들이고 나도 그분을 사랑해야겠다.” 이것이 사람 노릇하는 시작입니다. 기분 좋으면 사랑하고 교회 가고 싶으면 가고,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예쁜 짓해서가 아닙니다. 자식을 보세요. 하는 짓을 보면 사랑 못합니다. 울화가 터지고 속이 뒤집어집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닙니다. 의지로 사랑하는 겁니다. 화를 참고 잘 되라고 해줍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그렇습니다. 크신 하나님이시니까 그렇게 사랑하신 겁니다. 나도 그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18) 하나님 사랑하고 자신을 그대로 받으세요. 이혼했어도, 자식이 망나니라도 당당하세요. 모든 문제는 바퀴벌레나 주사기 정도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 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2. 사람들을 사랑하라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으로 대하겠다고 마음을 정하세요. 그러면 삶의 질서가 나옵니다. 좋아하는 사람만 좋게 대하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좋아할 것을 좋아하고 해결할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저도 아름다운 이성을 만납니다. 새로운 성적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감정을 따라가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애착의 감정일 뿐입니다.

결과는 모두를 망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그러한 장면을 계속 연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은 의지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가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거기 맞는 의지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크게 하고 행복을 크게 합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천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힘들여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그것들을 다스리라고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자기 형상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사탄과 짝하고 하나님을 모욕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보세요. 세상 사람들의 행동을.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나요?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은 사랑을 결정하시고 행동하십니다. 사람이 되어 우리 모욕을 자기 얼굴에 자기 몸에 받으십니다. 갖은 고난의 형벌을 받고 처참하게 죽습니다. 감정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행동하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사랑의 화신으로 나타나십니다. 최고의 사랑이 그를 최고의 존재로 만듭니다.

억지로 하는 건가요? 의무감으로 희생하는 건가요? 그건 아가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를 향해서도 기꺼이 몸을 줍니다. 해야할 일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 사랑의 권능이 일어납니다. 오래 참습니다.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싫어하고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믿고 참습니다.

30대 후반의 여자 첼리스트가 국회위원과 불륜관계에 있었습니다. 벌써 10년 이상 그렇게 지났습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목사는 그냥 유명한 음악가로만 알고 축복해 줍니다. 교회에서 연주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건성입니다. 자기 삶은 헛돌고 있습니다. 그 남자에게 애착을 느끼기에 관계를 끊지 못합니다.

사랑은 의지입니다. 저급한 삶이 아니라 고상한 삶을 향해 도약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아플 것 같아도 신비한 도움이 임합니다. 올바른 사랑의 대상이 나타날 수도 있어요. 예수가 하신 대로 해 보세요. 사랑이 무엇인지 보이고는 그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롬5:5) 강하고 아름답습니다. 외치세요. “나도 예수처럼 사랑할 수 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감정을 넘어선 능력입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왜 사랑하지 못하나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게 경험적으로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하나님을 절대로 바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제대로 알면 사랑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늙은 부모를 어떻게 사랑하나요? 눈에 보이고 경험되는 모습은 추합니다. 성격도 괴팍하고 대하기 힘들어요. 늙어갈수록 짐이 됩니다. 사랑의 감정이 안 일어나요. 이때 의무감으로 사랑하면 너무 힘이 듭니다. 거동도 못하는 어머니를 버리고 도망가는 자식들이 가끔 보도되지 않습니까? 사랑을 감정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요.

사랑은 의지입니다. 그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사랑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한 걸음 걸으면 열 걸음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만큼 내 속에서 예수께서 커지시고 나는 더욱 예수처럼 되어갑니다. 예수가 나를 위해 하듯 부모를 섬기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하는 과정입니다. 할수록 복된 사람이 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왜 다른 것들을 제쳐놓고 예배에 열심을 내야 합니까? 수입의 십분의 일을 그것도 정확하게 아니 그 이상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것은 기분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의지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처럼 되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지 마음으로 정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더 큰 자아를 일으켜 보세요. 건설적인 결혼은 상대 배우자가 서로의 느낌이 어떠하든 규칙적으로 일정하게 예상대로 서로 서로 함께 보조를 취합니다. 처음에 일어났던 애착은 조만간 사라집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순수한 사랑이 시작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진정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서로를 참으로 믿고 의지하며 아낍니다. 상대에게 좋은 일을 해줍니다. 이것은 처음에 육체적으로 느낀 사랑 즉 애착의 기분과 차원이 달라요. 신비한 사랑의 관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가정에서 그렇게 못해본 분들은 사랑하기를 결정하세요. 그리고 실천하세요. 꾸준히. 이웃을 향해서도 그렇게 하세요.

하나님과의 관계도 부부관계처럼 자녀관계처럼 사랑의 역사를 만들어보세요. 그런 게 별로 없는 분들은 불행합니다.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보세요.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 이 사랑을 하기로 의지를 정하고 행하세요. 하나님의 권능을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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