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과 친근히 하라 (수 23:6-16)

  • 잡초 잡초
  • 378
  • 0

첨부 1


성경 : 수 23 : 6 - 16
제목 : 하나님과 친근히 하라 

오늘 이 본문이 들어있는 이 23장과, 마지막 장인 24장의 말씀은, 여호수아가 이제 나이 들어 지도자로서의 능력이 쇠하여 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최후의 당부를 하고 있는,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강력한 지도력으로, 모세를 대신하여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  하여 내었지만,  여호수아 이후에는, 이스라엘 전체를 이끌고 나갈만한 뚜렷한  인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물이 부재하게 되어진 데는, 자질적인 문제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가나안을 정복하고 땅을 분배받은 각 지파의 수장들이, 이미 나름대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중에서 어느 특정개인을 지목해 전체 지도자로, 앞장세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장래를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모세나 자신의 때에도, 백성들을 다스리고 이끌어가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제 각 지파 별로 세력이 나누어진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체를 바르게 이끌어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어떤 특정 인물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개개인에게 신앙을 전수하며, 그들 모두에게 당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 하나님과 친근히 하라.  너희들이 지금까지 하나님과 가까이 지냈던 것과 같이 앞으로도 그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것이, 여호수아의 최후의 당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수아가, 왜 이러한 당부를 백성들에게 해야만 했을까? 
지금 여호수아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수많은 기적들을 체험을 했고,  또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신앙의 체험들이 있었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그들의 신앙이 아니라,  현재의 이후의 신앙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이 끝난 지금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섬길 수 있을까?  지금 여호수아가 백성들 앞에 선 시기가 어떤 때입니까? 
이제는 예전과 같이, 크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만한 일이 없는 그러한 때입니다.

23 : 1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전쟁이 없는 평안한 상태로, 이미 오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도, 많이 약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러한 점을 염려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최후로 당부하기를, 너희들의 인생에 큰 문제가 있을 때만,  도움을 구하는 그런 하나님으로 믿지 말고, 언제나 조그만 일이라도, 범사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지내라고, 그래서 체험적인 신앙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라고, 당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참 그런 것 같애요.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 모른다고, 조금만 환경이 나아지면, 어려웠던 과거를 잘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룬 부요한 환경에 도취되어, 예전에 가졌던 열심이나 노력, 수고를 중단해 버리고,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졸부 근성이라고 말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축복에  만족하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이런 현상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도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예견한 상황에서, 어찌 여호수아가 염려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 나타난 여호수아의 염려는,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염려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영적 상황을 바라보면, 여호수아 말기의 상황과 너무나도  흡사 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신앙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서, 영적 투쟁을 벌이면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신앙을  일으켜 세웠던 시절이 있었지 않습니까?  정말 그 때는 모든 것이 은혜였고, 모든 것이 감사였지요.  너무나도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정말,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영적 지도자들도, 우리 곁에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부흥 목사님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는, 그 부흥 목사님들의 영적인 능력이, 성도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세월이 지난,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부흥회를 해도 크게  성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많이 모이지도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날까?  많은 목회자들이 진단을 할 때에, 공통적인 견해가 이렇습니다.  두 가지로 이야기를 합니다.

첫째는, 성도들에게 절박한 기도의 제목들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예요. 
예전처럼 먹고사는 일이 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만 살 수 있던 그런 시대였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개교회 중심으로 이제는 저마다 기반이 잡힌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말씀에 얼마나 갈급 했던지, 교회마다 부흥회나 사경회를 열어, 그 시간들을 통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도, 담임 목사님을 통하여 양질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이렇게 신앙적 환경은 좋아졌는데, 오늘 우리의 신앙의 성장은, 이전보다 더 나아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대답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예전에 우리 부모님 세대나, 우리 선배들의 시대에 가졌던, 신앙과 비교해 볼 때에,  현재 우리의 신앙은, 많은 부분 약해져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은혜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요. 나름대로 우리도 은혜의 생활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과 같은 큰 은혜의 체험이 없기에, 하나님을 삶 가운데 잘 못 느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당부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했던 내용과, 일치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 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  예전에 큰 문제를 도우셨던 하나님, 우리의 작은  문제까지라도 돕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평소에도 그 하나님과 친구와 같이,  친밀하게 교제하면서, 우리의 범사에 도우심을 받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는, 주님의 당부인 줄로 믿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과 친구처럼 지냈던 인물들이 있음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약 2 : 23절에 보니,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클레인이란 사람이 말하기를, “친구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사람과, 나 자신이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서로간에 닮은 점이 있고, 서로간에 교감이 있는 만남.  이것이 친구로서의  사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런 관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셨고, 또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관계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모습,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랜 세월을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내 신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과 친근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감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내 삶이 닮아가는 모습들이 지금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런 모습들이 우리의 신앙 가운데, 아직까지도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신앙은, 그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정도의 신앙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게 그거 아니냐?  여러분 아닙니다.  대단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는 것과 사귀는 것은 다릅니다.  또한 사귀는 것과, 친밀한 것과도 다릅니다.  아는 것은, 나와 관계가 없어도 알 수가 있어요.  그러나 사귐은 그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호감이 갈 때만이,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쌍방의 교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귐의 관계가, 또 더욱 더 친밀한  관계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서로간에 우정이라고 표현할 정도의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간에 정해놓은 약속들을 충실히 이행할 때에, 비로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과 친밀히 하라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분과의 언약을, 그 약속하심을, 우리의 삶 가운데 믿으며, 그 분의 말씀을  힘써 순종함으로 이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정립되어져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입게 되고, 오늘 말씀과 같이, 나 한 사람이 천 명을 쫓는 역사를 일으키며, 오늘 우리에게도 약속하신 축복의 땅으로, 우리를 친히 인도해 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반적인 사귐으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친구와 같이 친밀해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가 친밀해 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져야 되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두 가지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스스로 조심하라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 초반에 보게 되면,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라고 했습니다.
조심하라.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입니까?  언뜻 보면,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의 원어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조심하여” 라는 말을, 히브리어 원문에 보게되면, “솨마르”라는 말인데, 그 뜻은, “울타리를 치다”  “지키다”  “유의하다” 라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울타리를 치고, 그 말씀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말라고 하는 뜻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양은 울타리 안에서, 목자의 인도함을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안전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도,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비로서 그 삶이 안전해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축복 가운데 지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많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이 읽고, 묵상해야 됩니다.  또한 많이 배워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울타리가 어디까지 쳐져있고, 또 어떻게 쳐져있는지 깨달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말씀을 모르니, 어디가 울타리  밖이고 안인지 구별을 못하고 지낸다는 거예요.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신앙 가운데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는 울타리 안에 있는 줄 아는데, 왠 이리가 덮치는 겁니다. 
“아니 울타리 안에 왜 이리가 들어오나?  목자가 도대체 어떻게 울타리를 관리했기에 이리가 들어와 나를 상하게 하고, 괴롭게 하나?”
하나님을 오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울타리 밖에 나와 있는 줄 모르고, 괜히 목자 탓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알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오해가 있으면, 하나님과 어떻게 가까워 질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수시로 체험하면서도, 늘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며 불평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지도자가 들려주는 말씀만 있었지, 자기 스스로 깨달아 아는 말씀이  없었기에, 하나님 앞에 조심없이 행하며, 늘 불평과 원망을 일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더욱 더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멀어진 관계를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 모세나 여호수아가 얼마나 많이 노력을 했습니까?  여호수아가 이제 나이 들어 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순간까지, 이 일을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조심하여”  이제는 스스로가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 중심으로 살아  가며,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라고 하는, 하나님과 친근히 하라고 하는, 여호수아의 당부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에, 이리와 같은 위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사나운 사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지금 이리와 사자로 인해 고통받고 있습니까? 
괜히 목자 되신 하나님을 오해하며 원망하지 말고, 오늘 이 말씀 들려주실 때 속히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금 말씀의 울타리로 들어와, 그 말씀이 항상 옳은 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그 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잃었던 모든 것들을 회복시켜 주시는, 귀한 역사를 일으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분별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과 같이, 스스로 조심하면서, 늘 말씀을 가까이 하며, 말씀을 살피게 되면, 삶에 지혜를 얻게 되어, 잘못된 선택이 없이, 늘 평안과 성공의 길로 나아가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에 울타리를 쳐서, 그 울타리 밖으로는 어떤 경우에도 나가지 않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과 친근히 하기 위해서,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 후반의 말씀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말씀하고 있지요?
오늘 여호수아가 최후의 당부를 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이방인들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까? 신 10 : 12절 말씀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말로 표현되는 것 아닙니다.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행동이 없는 사랑의 표현은, 모두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목숨과 같이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그 행위가, 지도자로서의 의무감에 있어서 나타난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높여 주셨기 때문에, 자신도 하나님을 향한 의리감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의무감이나 어떤 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
이런 사랑이 여호수아에게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었지만, 이런 사랑에 근거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뜻대로 행하려고 하는, 불순종의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도 이러한 백성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 말씀에,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노라 고백하고 있고, 사랑한다 고백하고 있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을 떠난지 오래 되었고,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식어버린지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고, 또한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고백과 사랑의 고백이, 진실로 하나님 보시기에 인정할만한 고백입니까?
예수님도 베드로를 향해서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때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런데 왜 주님은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까? 
지금 베드로가 고백하고 있는 그 사랑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질문하셨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냥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지 않으시고,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서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보다, 세상의 모든 것들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그 사랑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런 사랑을, 하나님께 나타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그러한 진실된 사랑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습니다.  의무감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기도하지 않다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 때 기도하러 나옵니다.
주일성수도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드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물질에 대해서도 인색합니다.  십일조도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일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또 한 가지 사실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신앙을 물려주지 아니했다는 것에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24 : 31 절 말씀을 보세요.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들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수아가 그렇게 당부했건만, 그 백성들은 끝내 하나님을 저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던 그 사람들이, 가나안 정복 이후  그 신앙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 다음의 성경이 무엇입니까?  사사기 아닙니까? 
삿 2 : 10 절에 보면, “그 시대 사람도 다 열조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그 후손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하고 싶은 감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 당사자를 자랑하고 싶은 감정인 것입니다.
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얼굴을 마주보고 싶겠으며, 어떻게 남에게 자랑하고 싶겠습니까?  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식들에게  네 아버지를 본받으라고, 닮아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일들은 남편을 사랑할 때만이,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들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의무적인 예배 참석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하시길 바랍니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하신 일들을 감당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했습니다. 
사랑하면, 수고가 힘들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면, 봉사가 즐겁습니다.  드려지는 헌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더 많이 드리려고 합니다.
이런 기쁨과 즐거움의 헌신이,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자랑스럽게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재물만 유산으로 물려 줄 것이 아니라, 신앙을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재물은 못 물려줘도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게 된다면, 그 자녀는 하나님 앞에 분명 복을 받게 됩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면서 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로 여기며, 하나님 앞에 사랑의 빚진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친근히 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스스로 조심하시고, 또한 하나님을 순순한 마음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여기서 전진하지 못하고 퇴보하는 신앙을 가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가나안 땅에서, 속히 망하는 일들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이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면서, 오늘 이후로는 정말 달라진 모습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시고, 또한 그에 합당한 은혜와 축복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