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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노모쉬까 방글라데시 (사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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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쉬까 방글라데시 (사 61:1-3)

<그 고달팠던 방글라 선교 여행>
우리 옆에 분과 방글라데시 말로 인사합시다. "노모쉬까." 방글라에서 무슬림이 만날 때에는 "앗쌀람 왈라이 꿈" 하고 인사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나 힌두교인이 만날 때에는 "노모쉬까" 하고 인사합니다. 방글라에서는 이슬람교가 국교일 뿐 아니라 전체 국민의 87%가 무슬림이기에 거의 대부분이 "앗쌀람 왈라이 꿈" 하고 인사합니다. 그러니 어쩌다가 기독교인을 만나 "노모쉬까" 하고 인사할 때에는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저희는 지난 8월 20일부터 28일까지 방글라 단기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모두 21명이 의료와 이미용, 교육 선교를 하고 왔습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로 나라가 시끄러울 때 해외 선교를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국이 민감해서 몹시 껄끄러웠지만 이미 1년 전에 계획된 프로그램이었기에 강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두 분 선교사님을 방글라데시에 파송했습니다. 박경은 목사님과 박상욱 목사님입니다. 두 분은 다 어려서부터 우리교회에서 자라나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가 된 분들입니다. 가족들이 다 우리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방글라에 간 것은 마치 딸을 시집 보내놓고 어떻게 사나 하고 딸네 집을 방문한 친정 아버지의 심정이었습니다. 그것도 낯설고 물 설은 이역 만리에 시집간 딸이 사는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라도 혹독한 시집살이라도 할 경우 격려하고 위로한다는 마음으로 갔던 것이지요. 여러분이 다 아시겠지만 박경은 선교사님은 방글라에서 함께 사역했던 남편 목사님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어린 딸 보배와 진주를 데리고 방글라데시로 갔습니다. 과연 홀몸으로 어떻게 선교활동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서 방글라로 날아갔던 것입니다.

방글라에 다녀 온 뒤 저나 함께 사역했던 팀원들의 소감은 '정말 선교 여행다운 여행'을 했다는 생각입니다. 저도 여러 나라에 단기 선교를 다녀봤지만 이번처럼 힘든 적은 없었습니다. 제일 먼저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첫날부터 고생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빡빡한 일정이 계속되었기에 물러설 수도 없이 강행군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제 자신이 놀랄 정도였습니다. 결국 그 열악한 상황 속에서 온 멤버들이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고 섬기는 모습 때문에 어려운 시간을 잘 견뎌냈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박경은, 박상욱 두 분 선교사님은 기대 밖으로 잘 하고 있었으며 저희들 모두 큰 감동과 은혜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한국에서 방글라로 직접 가는 항공편이 없어서 싱가포르에서 1박을 해야만 했습니다. 싱가를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리콴유(李光耀) 수상의 비전과 설계대로 만들어진, 세계 최고의 인공도시가 싱가입니다. 아름다운 건물, 바둑판 같은 도로망, 껌을 씹거나 침만 뱉어도 벌금이나 곤장을 맞아야한다는 엄격한 공중 질서, 싱가는 인간이 이렇게 멋진 도시를 건설할 수도 있구나 감탄을 자아내는 곳입니다. 이와 같이 싱가에 도착해서 대충 시내를 돌아본 다음날 방글라로 날아갔습니다. 싱가에서 방글라까지는 한 4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한 밤중에 방글라 수도 다카에 도착했는데 입국 수속을 밟는 일부터 덜컥 문제가 생겼습니다. 통관에 걸린 것이지요.

현지에 나눠 줄 의약품이며 학용품, 생필품, 등등 많은 짐이 있었는데 다 무사 통과하는가 싶더니만 맨 나중 사람 몇 명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NGO로서 방글라 국민들을 돕기 위해서 왔다", "이 물품들은 영리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다 방글라 국민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중 나온 박경은 목사님을 불러서 증빙서류를 꾸미고 다 서명을 한 뒤 1시간 30분만에야 해결되었습니다.

나중에 박목사님의 말을 들어보니 현 정권을 잡은 이들이 군인들인데 유독 청렴결백을 강조하기에 통관 직원들이 상부에 올릴 건수를 만들기 위하여 재수 없이 우리가 걸렸다는 것입니다. 후진국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문제 하나를 입국도 하기 전에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주일 동안의 방글라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방글라에서 우리가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6분 짜리 동영상을 잠시 시청하겠습니다.

《동영상 시청》

<'기쁨과 인간미 넘치는 혼란의 도시 다카'에서의 선교 사역>
여러분, 잘 보셨습니까? 제일 먼저 방글라는 참 가난하고 무질서한 나라였습니다. 공항을 빠져나와 버스를 타는 순간부터 공항 근처에 누워있는 노숙자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구걸하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왔습니다. 방글라의 국토 면적은 한반도의 2/3 밖에 되지 않지만 인구는 1억 5천만 정도로 세계 9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구밀도는 세계 제 1위라고 합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한밤중에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서성거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는데, 낮에는 덥기 때문에 쉬고 주로 밤에 활동하는 습관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녁도 밤 9시나 11시쯤 되어서야 먹는다고 합니다.

방글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현상은 교통대란입니다. 우리나라가 교통이 복잡하다고 하는데 방글라에 비하면 아주 양반이었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면 버스라는 버스는 전 세계에서 폐차 1보 직전에 있는 차량은 다 와 있는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로 매연을 엄청나게 뿜어댔습니다. 그런데다가 차들이 얼마나 많은지 차선은 아예 무시되고 5 센티 혹은 10센티 간격인데도 척척 잘도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이 일어나 피란 행렬을 가는 것처럼 한 바탕 소동을 치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차를 탈 때마다 눈을 감고 하나님께 기도를 안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한국에서 총알 택시를 탄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다카에서 차를 타는 일은 꼭 총알 택시를 탄 기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총알 택시를 탔는데 보통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사고가 나서 운전사도 죽고 목사님도 죽어서 천국문을 지키는 베드로 앞에 섰습니다. 목사님은 자기가 천국 좋은 쪽으로 먼저 들어갈 줄 알았는데 운전기사가 먼저 들어갔습니다. 목사님이 베드로에게 따지자, 베드로 왈 "너는 설교할 때마다 교인들을 졸게 만들었지만 이 운전사는 손님들마다 기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이 유머가 방글라에 꼭 맞아떨어지는 유머였습니다. 차를 탈 때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마다 "오늘도 무사히!" 하며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습니다. 처음 며칠동안은 조금 큰 버스를 탔는데 이 운전사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하여튼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그 복잡한 도로를 미꾸라지 빠져나가듯이 쏙쏙 잘도 빠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팀원 중에 박철형 약사님이 그 기사에게 'King of Drivers', '운전사 중에 왕'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우리가 타게 된 미니 밴의 운전사는 젊은 총각이었는데 처음에는 얌전하고 차분하게 운전하더니만 복잡한 도시 한 가운데로 들어가서는 완전히 돌변했습니다. 그야말로 인정사정 보지 않고 무자비하게 폭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철벽 거리를 잘도 뚫고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이 운전사에게는 제가 'Emperor of Drivers', '운전사 중에 황제'라고 농담을 건넬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잊을 수 없는 풍경이 방글라의 교통 사정이었습니다. '정글의 법칙'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런 환경 속에서는 어떤 운전사이든지 배짱이 두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싱가를 보여주신 다음에 방글라에 들어가게 하신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정반대 되는 나라를 한 번 비교해보라는 뜻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싱가는 너무 잘 사는 나라고 너무 질서가 반듯반듯해서 좀 인간미가 모자라고 각박한 도시처럼 보였고, 방글라는 무척 무질서하고 혼란하고 가난한 것처럼 보였지만 뭔가 모르는 인간미가 넘치고 사람 사는 맛이 나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경제와 질서만 가지고 어느 나라가 더 좋고 더 나쁘다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고 두 나라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다 있는 것 같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보기에 참으로 열악하고 가난한 방글라 사람들이 삶의 만족지수에 있어서는 세계 제 1위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세상에 자기가 제일 행복하다고 믿는다는 것이지요. 인도의 캘커타를 배경으로 해서 만들어진 영화 'The City of Joy'를 보신 분들은 방글라의 수도 다카를 연상하시면 될 것입니다. 가난하고 무질서해도 기쁨과 인간미가 넘쳐나는 도시가 방글라 다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얼마나 이번 선교 여행을 세심하게 배려하셨던지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 하루는 다카 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바람에 통행 금지령이 내려져 두문불출하는 가운데 말씀과 기도로 준비하게 만드셨습니다. 생각해보니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제가 비도 오고 습기가 높아 후텁지근한 가운데 끝까지 사역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통금된 하루 동안 말씀과 기도로 내공(內工)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여걸, 박경은 선교사님의 교육 복지 사역>
박경은 목사님은 방글라에 간지 2년 만에 참 눈부신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함께 일할 때에는 잘 몰랐는데 단연 여걸 중에 여걸이었습니다. 박목사님 자신도 자기가 남잔지 여잔지 성(性)에 혼동이 온다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현지에 가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Home Base', 즉 기지(基地)를 구축하는 일입니다. 박목사님은 밀뿔 지역에 'Mother & Baby Care Center', 즉 '모자 보호 센터'라는 아주 훌륭한 기지를 마련해서 일단 안정감을 확보해놓고 있었습니다.

그런 뒤 주변 4킬로미터 반경 안에 가난한 집 어린이들을 돌보는 탁아소 7군데, 방과 후 초등학교 학생 23명을 교육시키는 '슈코볼 센터'라는 공부방 하나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초등학교 하나도 더 세워서 기독교 교육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비전도 품고 있었습니다. 주로 빈민들을 대상으로 교육과 복지 선교에 집중하는 박경은 선교사님이 매우 자랑스러웠고,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듬직해 보였는지 모릅니다. 사실 방글라와 같은 나라는 거기에 가서 사는 것만도 선교요 참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했는데 2년 만에 억척같이 선교 기지를 확충해나가는 모습을 직접 보고서는 제가 많이 놀랐습니다.

이번에 함께 간 의료팀과 이미용팀, 교육팀의 봉사와 헌신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최조영 장로님과 박철형 약사님, 김명자 간호사님, 등 의료팀은 빈민촌 지역을 돌며 2백명 가까운 환자들을 치료하고 약을 처방해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인술(仁術)을 베푸는, 자상하고 인정 많은 최조영 장로님과, 언제나 시원시원하고 유쾌한 박철형 약사님이 시약(施藥)하는 모습에 잔잔한 감동이 일었습니다.

또한 미용실 원장이신 문선희 집사님을 비롯해서 박윤자 집사님, 박승옥 권사님, 등 여러분들이 아이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모습, 또 목욕시켜주는 모습도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인천 최고의 미용사가 방글라에 갔더니만 선교사님 가족들에게까지 소문이 나 아예 하룻밤을 한국 선교사님 댁에 묵으면서 많은 선교사님 가족들의 머리까지 손질해주었습니다. 또한 청년들이 함께 가서 페인트칠도 해주고 어린이들과 게임도 하고 공부로 가르쳐주고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일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습니다.

<박상욱 선교사님의 CCTB 신학교 교수 사역>
박상욱 선교사님은 미국 유학을 마친 뒤 다카에 있는 CCTB(College of Christian Theology Bangladesh)에서 교수로 사역하기 위해 방글라 말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방문한 날은 토요일 아침이었는데 때마침 교수님과 전교생이 모여서 금식 기도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제가 한 시간 동안 영어로 강연하고 학장님이 방글라어로 통역했습니다.

캠퍼스가 참 아름다웠는데 예배드릴 채플이 없어서 앞으로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가지고 갔던 돈 300불을 헌금하면서 채플 짓는데 'Seed Money', 종자돈으로 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제 양심에 하나님이 주시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방글라 선교의 미래는 신학생들을 잘 교육시켜 좋은 목사들을 배출하는데 있다. 우리교회가 채플을 지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그 채플 이름도 '내리 채플'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학장님께 어느 장소에 어떻게 채플을 지을 것인가를 물었더니 장소를 직접 보여주셨는데, 박상욱 선교사님에 따르면 미화 2만불 정도, 한국돈 2천만원 정도가 들 것이라는 후문이었습니다. 그 정도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내리 채플'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할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나중에 이 메일이 오기를 좋다고 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뒤, 2천만원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방글라에 함께 갔던 분이 방글라 선교를 위해 쓰라면서 2천만원을 들고 오셨습니다. 즉각적으로 "아, 이것은 방글라 신학교에 내리 채플을 지으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구나!" 확신이 왔습니다.

여러분, 방글라는 문맹률이 60%나 됩니다. 10명중에 6명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이지요.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에 잘못된 관습과 미개한 풍속으로 많은 방글라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 주변은 빈민 지역이었는데 비가 많이 오는 몬순 계절에 움막 같은 습한 곳에 대가족이 살면서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돕는 일은 우리의 전 재산을 다 털어도 부족할 듯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방글라의 미래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박경은 선교사님처럼 어린이 교육, 박상욱 선교사님처럼 신학교 교육을 잘 시켜서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효율적으로 방글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첩경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방글라의 푸른 내일을 바라보며>
이번 여행은 제 개인적으로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선교 여행이었지만, 또한 가장 보람 있고 열매를 많이 맺은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주신 교우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무엇보다도 귀한 시간과 물질을 바쳐서 단기 선교 사역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이제 오늘 주신 말씀처럼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워주시고 주의 영으로 충만케 하셔서 방글라에 파송된 우리 선교사님들이 1)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2)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3) 포로된 사람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4) 갇힌 사람에게 놓임을 선언하고, 5)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6)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선교사님들의 봉사와 헌신 덕분에 우리 주님께서 방글라 백성들에게 1) 재 대신 화관을 씌워 주시며, 2) 슬픈 마음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시며, 3)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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