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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누구냐? (룻 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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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냐? (룻 3:1-18)

오늘 세상에는 상식을 뒤엎는 일이 너무 흔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다 아시죠?
여름 내내 베짱이는 놀기만 하다가 겨울에 굶게 되고,
열심히 일한 개미는 추운 겨울에 따뜻한 방안에서 잘 지냅니다.
그러므로 개미처럼 열심히 근면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솝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현대판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이렇게 바뀝니다.
개미는 여름 내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일을 해서 신경통, 관절염,
    허리디스크에다 영양실조까지 걸려서
    겨울 내내 병원 다니느라 추운 날씨에 고생만 많이 했습니다.
반면에 여름 내내 기타치고, 노래만 부르며 놀던 베짱이는
가을에 어떻게 해서 음반하나 냈는데,
그만 그것이 히트를 쳐서 떵떵 거리며 살고, 유명 인사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상식을 뒤엎는 엉뚱한 이야기이지만,
사실 그런 이야기가 오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기도 합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현대판 개미와 베짱이를 패러디한 이야기 하나 더 소개합니다.
신입사원 개미군은 언제나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러나 베짱이는 엄마가 사준 2억 짜리 아파트에서 빈둥빈둥 먹고 놀기만 합니다.
셋방 사는 개미 군에 비해 베짱이 군의 자산이 2억을 앞서 갑니다.
그러나 알뜰살뜰 개미군은 3년 후에 3천만 원을 저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전셋집은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개미군은 3년 후에 아파트 값이 3억이 올라 집값이 5억이나 되었습니다.
이제 격차는 4억 7천만 원으로 벌어졌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개미군은 
      “제기럴 이 짓도 못했먹겠구먼” 하고 투덜거립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이 굉장히 쉬운 것 같고,
    머리만 잘 쓰면 잘 사는 길이 널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정말 살아 본 분들은
    산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계속해서 룻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룻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룻기서는 모압 여인 룻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장자 가문,
특히 다윗의 가문에 들어와 복된 삶을 누리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될 사건이
    1장에서는 감추어져 있었고, 2장에서는 어느 정도 암시되었지마는
    3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진행되어집니다.
룻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복된 손길을 발견하고
    그 손길에 붙들려지는 내일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가정을 만들어 주기 위해 무엇이라 권면합니까?
1. 나오미가 룻에게 가정을 만들어 주기 위해 무엇이라 권면합니까?(1-5절)
나오미는 룻에게 가정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한 가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장을 하고 타작마당으로 가
    잠든 보아스의 발치에 이불을 들고 들어가 누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업 무를 자에게
    관계 맺기 원한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이스라엘의 청혼 풍습입니다.
룻에게 이것은 익숙치 못한 풍습이었으며,
    자칫 정숙치 못한 여자로 오해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게다가 보아스는 그녀에 비해서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신뢰했기에 이 같은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시모의 말에 순종합니다.
    5절 [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 
룻은 당시 사람들의 관행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기업을 잇는 것의 소중성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룻이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계기는 나오미에게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복되게 해준다고 했는데
만약 룻이 믿음의 눈이 아닌 자기 소견의 옳은 데로 시어머니를 대했다면
“ 어머니도 망했잖아요.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고 쫄딱 망해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는 무슨 재주로 저를 복되게 한다는거예요?`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오미에게 있는 마음은
      나오미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복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하기 이전에
누군가가 우리를 생각하고, 우리를 위하여 염려하고,
      우리의 인생이 잘 되기를 바라는 인도자를 잘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요사이 말로 하면 멘토를 잘 만나야 합니다.
룻은 정말 나오미를 잘 만났습니다.
자신의 이익 때문에 혈육 간에도 싸우는 세상에
    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참 힘듭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룻의 앞날을 바라보며
            기업 무를 자 보아스를 소개하는 나오미는
오늘 교회 안에서 우리의 기업 무를 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목회자 또는 영적 지도자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의 신앙생활에
    목회자 잘 만나고 순장 잘 만난다는 것 축복임을 믿습니다.
꼭 지도자의 말을 귀담아 들으시고 그 말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내 앞길을 열어 주실 줄 믿습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를 만나기 위하여 무어라고 권면합니까?
3절 [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 그에게 보이지 말고 ]
보아스에게 은혜를 입기 위해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은혜를 입기 위하야 준비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준비된 심령과 삶에 은혜를 베푸십니다.
준비하되 조심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 그(보아스)에게 보이지 말라 ] 고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의 깊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뭔가 이루기 전에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를 원하며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은혜를 입는 사람들은 자기를 가립니다.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온전히 가릴 때
    하나님이 그를 복되시게 하시는 것을 봅니다.
자기 생각, 자기 모양, 자기 색깔, 자기 방법,
  이 모든 것이 버려지고 덮인 자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다.
‘너를 나타내지 말라’는 시모의 말이 룻의 모습을 온전히 가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 모습이 온전히 가려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됨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룻은 시모 나오미의 명대로 순종합니다.
2. 룻이 보아스의 곁에 누운 행동과 그녀의 청원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신앙적 교훈은 무엇입니까?(6-9절)
보아스가 저녁을 먹은 후 노적가리 곁에 누웠을 때
      룻이 가만히 가서 이불을 들고 그 발치 누웠습니다.
밤중에 보아스가 보니 한 여인이 발치에 누운 것을 보고,  놀랐겠죠?
9절 [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
여기서 룻이 한 말 [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 ] 란 말
우리 한글 성경에는 ‘옷자락’으로 되어 있지만
    히브리 본문에는 ‘날개’로 되어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추수밭에서 처음 만났을 때 룻2:12절에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 빈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룻은 바로 보아스가 그 ‘날개’ 역할을 해야 함을 암시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 나를 거두어 달라는 말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마치 어미닭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보호하듯이
    보아스만이 룻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날개인 것입니다.
보아스의 날개 - 바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뜻합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좇겨다닐 때 아둘람 굴에서 간구하기를 시57:1절에
[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
              주의 날개 아래 피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보아스의 옷이 룻을 덮을 때 룻은 비로소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룻 자신은 불행할 수밖에 없고, 저주가 임한 자이기에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없지만,
보아스의 옷자락이 룻을 덮을 때
룻은 의롭고 거룩하며 존귀한 자가 되어 사람들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은혜 입기 위하여 옷자락으로 덮어 달라는 간청은
    바로 성도가 주님께 구하는 간청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은혜의 옷자락에 덮일 때,
또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옷자락에 덮일 때
자신의 허물이나 연약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룻이 보아스를 기업 무를 자라고 합니다.
빚으로 넘어간 재산을 도로 찾아 줄 수 있는 친척이라는 말입니다.
    룻의 삶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자가 보아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기업 무를 자이심을 믿습니까?
그 분이 내 인생을 죄에서 자유케 하시고,
    나의 영적 가난함에서 부요케 하실 유력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참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음을 믿고,
오직 예수님만 확실한 대상을 정하고,
    거기에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내 놓을 때,
              새로운 인생은 시작될 것입니다.
나의 기업을 무를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준비된 마음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룻의 간청을 들은 보아스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3. 룻의 행동에 대한 보아스의 반응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까?(10-13절)
10절을 보세요. 보아스가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
룻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몸가짐을 바로 했다는 얘기입니다.
룻은 대상을 확실하게 정했습니다. 나오미도 그랬습니다.
    보아스라는 한 사람을 정하고, 그리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함부로 기대를 걸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판단하고, 쉽게 부자가 되거나 성공할 수 있는
  이 방법, 저 방법을 따라하지 않고,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매일 열심히 이삭을 줍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그것을 그 동안 보아스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내가 평소에 얼마나 인생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는가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남들이 한 순간 일확천금을 터트리며 멋지게 성공하며 살더라도,
전혀 흔들림 없이
나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면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은 인생의 새로운 기회를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안심과 위로를 합니다.
11절 [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
보아스가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룻의 행동을 보고도
그녀를 음탕한 여자로 보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의 인격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현숙한 여인` 신앙과 인격이 탁월하여 몸가짐에 매우 신중함을 보여줍니다.
룻은 결코 남정네의 품이 그리워
  함부로 자기 몸을 굴리는 천한 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보아스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룻의 순수한 동기,
즉 기업 무르기의 규례를 따라 행하려는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정하신 기업 무르기 규례를 따라 행한다고 하지만
    실제 그 일을 행하는 당사자인 룻은
        두려움에 몸이 떨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보기 좋게 거부라도 당하면 무슨 개망신인가?
남의 이목을 피해 남정네의 품으로 파고들었는데
    나중에라도 누가 이 사실을 알고 소문이라도 내면
            어찌 얼굴 들고 살 수 있으랴?
염려와 두려움으로 잔뜩 긴장하여 불안에 휩싸여 있는 룻을 향하여
보아스는 우선 안심을 시킵니다.
[ 내 딸아 두려워말라 ]
그리고 룻의 순수한 의도를 100% 수용하여
    보아스는 한 가지 중요한 약속을 합니다.
    11절에 [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
이 말을 듣는 순간 룻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이 솟구쳐 올라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정도(正道)를 벗어나려고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치우침이 없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기업 무르기라는 정당한 명분이 있기에
    보아스가 룻을 그 밤에 취하여 동침하여도
        불륜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비난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 순간 원칙을 고집합니다. 12절에
[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
      라고 말하면서 이어서 기업 무르기의 정당한 절차에 대하여
      13절에 소상하게 설명합니다.
보아스는 룻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기업 무르기에 대한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원칙과 정도를 벗어 난 기업 무르기는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분별력이 있는 신중한 사람입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놓친 점을 보아스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기업 무르기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만 바라보았고
보아스는 그 틀을 적용하는
      정도와 원칙이라는 실제적인 면을 예리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보아스의 영성이 매우 깊습니다.
주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급하게 서두르다가
  중요한 작은 부분을 빠트리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작아도 정도라면 살피는 것이 더욱 성숙한 정도(正道)입니다. 
    신앙의 정도를 택하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보아스의 약속을 받고 새벽까지 있다가
보아스로부터 겉옷에 보리를 여섯 번 가득 얻어서
다른 사람을 피하여 나오미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4. 집으로 돌아온 룻과 나오미의 대화 속에서
      우리 자신의 어떤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14-17절)
새벽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집에서는
며느리를 그렇게 보내 놓고 시어머니 나오미가 밤을 새우고 있었습니다.
그 긴 밤을 나오미는 분명 기도하며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새벽이 밝아 왔을 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머니, 저예요...` 문을 두드리는 룻의 목소리는 밝고 쾌활했습니다.
문을 급히 열고 며느리를 맞이한 나오미는 다짜고짜 묻습니다.
[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 이 질문을 원어로 정확하게 풀어 쓰면
      `Who are you?, 즉 너는 누구냐` 라는 질문입니다.
아니 며느리를 몰라보아서 ` 너 누구냐?` 라고 묻습니까?
이 말은 아주 직설적인 질문입니다.
“ 너 여전히 혼자 돌아 온 거냐, 아니면 보아스로부터 은혜를 입고
      결혼할 신부의 자격을 얻은 여자로 온 거냐` 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스스로 한 번 물어봅시다. “너는 누구냐?”
오늘도 예배를 통해 주님의 은혜를 입고
    나의 기업 무를 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미래의 희망적인 약속의 말씀을 받아
        삶이 기쁜 샘이 되어 바다처럼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자인가?
아니면 예배는 드리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도 모른체
      혼자 낙심 절망 좌절 나아가 원망 불평하며 살아가는 자인가?

[ 너는 누구냐? ] 오늘 본문 말씀에서 두 번 나오는 말입니다.
9절에 보아스가 밤중에 발치에 있는 룻을 보고 놀라며 하는 말이
    [ 네가 누구냐? ]
그 때 룻은 [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라고 했습니다.
        나를 거두어 주소서 내게 은총을 베푸소서.

그런데 시모 나오미가 [ 너는 누구냐? ] 물을 때는
    본문 말씀에서는 보아스가 자기에게 행 한 것을 다 고했다고만 기록하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그 장면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 어무이 말도 마이소 내 마 죽는 줄 알았심더
  그 분이 예, 자기 시키는대로만 하라 카면서예
    그 사람이 이렇게 양식을 많이 주었다 아임니꺼... ]
너는 누구냐? 첫 번째 너는 누구냐? 의 룻이 아닙니다.
룻은 보아스의 은총을 입은 자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사람은 같지만 그러나 그 마음과 계획과 미래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보아스의 옷자락이 룻을 덮어 주었던 것입니다.
주의 날개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미국 병사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동료들은 그의 시체를 전쟁터에 그냥 방치해 두고 싶지 않아서
    기독교식 장례를 치러 주기로 했는데,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작은 공동묘지가 딸린 성당을 기억해 냈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가져간 병사들은 해질 무렵 겨우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에는 허리가 굽고 야윈 신부가 그들을 맞아들였습니다.
한 병사가 정중하게 말을 꺼냅니다.
“친구가 전쟁터에서 숨졌습니다. 우리는 그를 이곳에 묻고 싶습니다.”
신부는 병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했지만
아주 서투른 영어로 이렇게 대답했다.
“ 미안합니다.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면
        이곳에 묻어 줄 수가 없습니다.”
지친 병사들은 너무 지쳐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자 노신부가 그들을 불러 세워서 하는 말이
“그렇지만 울타리 밖에 묻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 말에 화가 나긴 했지만 병사들은 
      하얀 울타리 밖에 땅을 파고 친구를 묻어 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전선을 옮기라는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친구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그곳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울타리 밖에 친구를 묻은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리둥절한 병사들은 성당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묻은 자리를 알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 말에 노신부의 얼굴에 미소를 지우며 하는 말이
“어젯밤 댁들이 떠난 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내가 울타리를 옮겨 놓았습니다.”

보아스도 신분의 울타리를 없애버렸습니다.
      룻을 받아드리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울타리를 옮겨놓았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울타리를 옮겨 놓는 그 이상의 일을 하셨습니다.
아예 울타리를 없애버리셨습니다.
그 누구도 주의 날개 아래 피하여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룻의 손에 보퉁이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 보퉁이에는 보아스가 싸준 보리가 들어 있습니다.
보아스가 시어머니에게 드리라면서 룻의 겉 옷 자락에 싸 주었던 보리입니다.
      그 보리의 양이 정확히 얼마큼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리는 보아스가 나오미에게
      미래의 장모님 댁에 보내는 일종의 예물이었다는데 있습니다.
17절에 `빈손`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보리를 싸 주면서 기특하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 빈손으로 당신의 시어머니께 돌아가지 마시오 ]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룻의 손에 보리를 들려주었습니다.
보리를 들고 가는 사람은 룻입니다. 룻의 손이 빈손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작 그 룻을 보면서 채워지고, 넘쳐난 사람은 바로 나오미였습니다.
일전에 나오미가 고향에 돌아 왔을 때, 동네 사람들 앞에서
`여호와께서 나를 치셔서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라고 울먹였는데
    이제 하나님은 나오미의 빈손에 희망과 소망을 가득 들려 주셨습니다.
비록 나의 손에 든 것으로 다른 사람의 빈손에 희망을 안겨다 줄 수 있다면   
그는 진정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룻의 보고를 들은 나오미가 룻에게 꼭 당부하는 말이 있습니다.
5. 룻의 보고를 들은 나오미는 룻에게 무엇이라고 권면합니까?
      이것을 어떻게 우리 신앙생활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18절)
나오미는 보아스가 룻 편에 보내온 보리를 손에 건네받고서
      참으로 많은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인생이 불공평한 것 같고, 산다는 게 다 부질없는 일인 것 같더니
    그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분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오미가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사람이 변하니깐 계속 중요한 말만 합니다.
18절 [ 이에 시모가 가로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않으리라 ]
‘가만히 앉아 있으라’ 를 두 글자로 줄이면요? 잠잠입니다.
              한자로 줄이면 쉿! 입니다.
일이 잘 되어 간다고 성급하게 자랑하러 다닐 일도 아니고,
또 자기 딴에는 더 잘되게 한다고
      여기 저기 일 벌려 놓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가 일을 다 이루기 전까지 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 알아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그걸 알았습니다.
      며느리가 가져온 보리 몇 되박을 보고서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계십니다.
초라한 보리 보퉁이를 든 한 자매를 보내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
    너는 믿음을 가지고 잠잠히 내가 하는 일을 보아라 ] 고 말입니다.

사62:1절에 [ 나는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
7절 [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게 하라 ]
나의 생애를 통해
우리 내일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때로는 우리는 쉿 하며 지켜볼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결론>

사62:4절 [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뿔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 ]
헵시바 - 나의 기쁨  뿔라 - 결혼한 여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바로 헵시바가 되고 뿔라가 됩니다.

네가 누구냐? 주님의 은혜를 입기를 원하는 당신의 종이 니이다.
네가 누구냐? 주님의 은혜를 입은 뿔라가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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