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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믿음(4) (갈 2: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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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갈2:19-21
제목 : 바울의 믿음(4)

  아프간 인질사태가 극적으로 타결되었습니다. 비록 2명이 희생되긴 했지만 나머지 21명의 인질들이 무사히 풀려나 모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지난여름 참으로 무더위와 싸우며 힘들게 보냈습니다. 게다가 이번 아프간 사건으로 더 힘들게 보낸 여름이었습니다. 이제 성큼 다가온 가을과 함께 모든 것이 해결되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이번 사건의 해결은 먼저 우리 정부의 수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협상하는 과정에 미숙한 점이 없진 않았습니다. 테러단체와 협상했다는 국제적인 비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 정부의 외교력과 설득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이번 해결은 온 국민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보다 국민은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미 지난 3년 전 이라크에서 숨진 김선일 씨의 사건이 있었기에, 그리고 이번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기에 온 국민의 관심의 힘이 컸던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번 해결을 위해 피랍가족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들과 딸, 형제와 자매, 그리고 아내의 위급함에 이들은 밤잠을 설치며 피 말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각국의 대사관을 찾아다니며 수고했고, 동영상을 만들어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얻은 기쁨이요 생명이기에 더욱 소중하다고 봅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성도들의 기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온 교회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수고하다가 벌어진 일이었기에 더욱 애타게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된 것입니다. 기도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호흡과 삶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속에 우리가 삽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이 막으시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능력으로 행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번 승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2명은 하늘나라로 불러 가시고, 19명은 살려주심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결국 기도의 승리요, 믿음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우리의 믿음은 이처럼 놀라운 힘을 발휘함을 이번 사건을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믿음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믿음을 키워야 하고, 큰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우리는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 특히 신약성경을 주도하는 바울의 믿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도 바울의 믿음을 찾아보겠습니다. 바울은 과연 어떤 믿음의 사람이었을까요?

  첫째 죽는 믿음입니다.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많은 편지 가운데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와 늘 비교가 되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을 강조합니다. 이 둘의 비교와 상관관계를 통해 우리에게 임하는 구원과 구원이후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가장 교리적으로 잘 체계를 잡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면서 율법에 대하여 죽는다는 표현을 자주합니다. 본문 19절에서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강조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젠 더 이상 율법에 메이지 않는 삶인 것을 알려줍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우리는 율법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과 성숙한 삶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교리로서가 아니라 실제의 생활과 삶으로서도 자신은 죽은 자라는 표현을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죽는다는 말이 자주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20절에도 바울의 신앙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는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실제로 생명을 죽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육적인 것들을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바울은 평생 자기를 죽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매일 죽노라..”(고전15:31) 그는 매일 죽기로 다짐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울에게서 발견하는 정말 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의 원리는 곧 죽음의 원리입니다. 구원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구원은 죽음을 통해 온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죽지 않고 사는 길은 없습니다. 죽음 없이 부활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요, 구원의 원리입니다.

  믿음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을 알았기에 날마다 죽이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존경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선 것입니다. 죽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육적인 것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죽여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많은 것이 있겠지만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 여기에서 우리가 죽여야 할 것을 2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정욕이요, 하나는 욕심입니다. 정욕을 죽여야 합니다. 정욕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일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것이 세상입니다. 우리 삶에 이것이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죽이는 것이 믿음생활입니다. 우리 속에 꿈틀거리며 치어 오르는 이런 정욕을 다스리고, 죽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또한 욕심도 죽여야 합니다. 욕심을 죽이기 위해 자족하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이미 빌립보서를 통해 바울의 자족을 배웠습니다. 자족하며 살아야 욕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한도 끝도 없는 욕심을 제어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늘 자족하는 마음, 감사의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갈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모든 것에 자족하시고, 받아드리십시오.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정욕과 욕심을 죽이고, 육체의 일을 죽이고, 날마다 나를 죽이면서 바울처럼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사는 믿음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고 강조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 부활로 이어졌듯이, 그리스도인의 삶도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 다시 사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자신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죽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계신 주님과 더불어 새로운 삶을 산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믿음은 한편으로는 죽는 믿음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새롭게 사는 믿음입니다.

  죽고 다시 사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사셨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늘 강조합니다. 우리의 죽음이 그런 것입니다. 죽음은 세상에서는 끝난 것으로 보지만 또 다른 삶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죽음을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잔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신앙생활의 원리에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알았습니다. 그가 날마다 십자가에 자기 육체를 죽이는 이유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죽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죽는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없으면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사는 것이 있기에 죽는 것이 유익하고, 죽는 것이 귀하고, 죽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원리를 그의 편지에서 많이 강조합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에 많이 나타납니다. 특히 본문에도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이것이 그의 믿음이고, 삶입니다. 그는 날마다 자기를 죽였습니다. 그것은 새롭게 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믿는 자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 가를 알려줍니다. 죽는 믿음에서 죽여야 할 것이 정욕, 욕심 2가지였는데, 사는 것도 역시 2가지로 사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선 믿음입니다.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말씀처럼 믿음으로 삽니다. 그 믿음의 길을 따라 하박국도, 선지자도, 베드로도, 바울도, 기독교역사에 귀한 사람들 모두 그 길을 걸었습니다. 믿음으로 산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흔적을 남겼고, 우리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주님을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좋을 때는 물론이고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더욱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분을 더욱 붙잡는 것입니다.

  이번 인질들의 지난 42일간의 악몽 같은 피랍일기가 공개되었습니다. 서명화씨가 탈레반의 눈을 피하여 바지안쪽에 깨알같이 기록하여 당시 상황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니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처절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유심히 살펴보면 죽음과 두려움의 공포 속에 그들의 삶은 어쩌면 단순했습니다. 매일 기도와 묵상과 예배와 격려와 위로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오늘은 예배에 누가 기도하고,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도 포함되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아마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명의 위협 속에 그들은 세상이 아니라 저 하늘나라, 자기를 사랑하고 섭리하고 붙잡고 계신 하나님을 붙잡은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주님과 더불어 새롭게 산 사람들은 이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선택하고 사랑하신 하나님은 나를 책임지시고, 선한 길로 이끄실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 또한 은혜로 삽니다. 바울이 이것을 강조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페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은혜는 폐하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기를 죽이며 새롭게 사는 원리는 무엇보다도 은혜가 빠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은혜로 살았고, 앞으로도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은혜 없는 그의 삶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록에서 가장 많이 반복한 단어가 바로 ‘은혜’입니다. 이것은 그가 주님을 만난 뒤 은혜로 사는 것을 알려줍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시작으로 하여, 구원도 은혜로 받았고, 지금까지 산 것도 은혜로 살았고, 앞으로도 은혜로 산다고 고백합니다. 은혜가 강권하고, 압도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통치한다고 말합니다. 은혜가 강같이, 폭포수와 같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온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고, 덮고 있다고 말합니다. 가만히 보면 바울의 삶에 은혜가 전부였습니다. 은혜가 그를 지배하고 다스렸기에 그는 주님을 만난 뒤 참 새로운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역시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 또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고 압도해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고갈되고 없어지고 바닥이 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의 침체도 은혜의 고갈 때문이고, 죄도 은혜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와 상처와 갈등도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공동체에 은혜가 없기에 빡빡하고, 답답하고, 마음 아프고,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사람이 귀해 보이고, 일에 즐거움이 넘치고, 사는 맛이 나고, 기쁨과 평안으로 모든 것을 감당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인의 모든 것은 은혜로 평가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충만이냐, 은혜의 고갈이냐에 따라 사는 것이 많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사람입니까? 은혜가 나를 지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은혜가 모자라 힘들어합니까? 은혜로 삽니까? 아니면 그냥 사는 것입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귀한 믿음을 생각했습니다. 죽는 믿음, 그리고 사는 믿음입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정욕과 욕심을 날마다 죽이고, 믿음과 은혜로 다시 사는 믿음의 길로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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