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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흠모하고 싶은 사람 : 스데반 (행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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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흠모하고 싶은 사람 : 스데반 (행 6:8)

어떤 여성이 너무나도 자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얼굴을 성형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습니다. 물론 이 자매가 약간 기분 나쁜 거 같으면 머리를 자른 다든지, 파마를 하든지 하면 되지만 살아오면서 열등감이 많았던 이 자매는 지금까지 매사에 자신감도 없었고 심지어 성격장애까지 일어난 이 모든 원인을 외모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수술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의사가 묻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얼굴을 수술해 드릴까요?" 바로 그 순간 자기의 말 한 마디에 자신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생각게 이르자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이 질문에 누구든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자매는 평소에 자기가 꿈꿔왔던 여배우와 탤런트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마들어 달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확실히 사람의 외모는 그 사람의 정신자세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똑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통통할 때와 날씬 할 때가 자신감이나 말하는데서 차이가 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사람은 성형 수술을 한다고 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되려면 그의 생각이 바뀌고 그의 감정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외모만 바뀐다면 모습은 좀 달라질지 몰라도 그 사람 속에서 베어 나오는 분위기나 느낌은 그대로 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얼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짧게 살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잊혀지지 않는, 가장 아름다웠던 한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 15절에 보게 되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한 것입니다. 도대체 스테반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처럼 얼굴이 천사와 같다는 표현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기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말의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주석가들이 그것을 스데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봅니다. 스데반을 죽이려고 모인 사람들, 스데반이 어떻게 처벌받는가를 보려고 모인 사람들, 그들이 스데반의 얼굴을 보니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천사의 얼굴 같은 스데반의 얼굴은 어떤 얼굴이었을까요? 그 얼굴은 사람들에게 어떤 얼굴로 비쳐졌을 까요?

지금 스테반은 세상 앞에 둘러 쌓여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있습니다. 스데반은 교회 안에 구제 일을 보도록 집사로 세워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밖 민간에서는 사도들처럼 복음을 전하며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행 6:8을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거센 박해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데반의 복음 전파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반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10절을 보니까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라고 했습니다. 도저히 스데반을 논리적으로 반박해서 이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공작을 꾸밉니다. 11-13절에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람들을 사주했습니다.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우리가 들었노라" 둘째, 당시 유대인들과 지도자들을 격동시켰습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그래서 스데반은 공회에 체포되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거짓 증인을 세웠습니다.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 하는 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너무 억울한 상황입니다. 게다가 스데반에게 감당키 어려운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돌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갈고 씩씩거리며 돌을 몇 개씩 집어들었어요. 양손에 돌을 하나씩 쥐고 있습니다. 그 공회의 현장, 수많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모함하며 재판하는 자리에 있었던 그를 두고 오늘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았더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더라."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스데반이 환경이 좋았습니까? 스데반에게는 고통과 고난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이렇게 평안하게 만들었을까요? 소명입니다. 내가 비록 이 땅에서는 고통과 모함을 받아도, 비난받고 돌에 맞아도, 나를 통해서 지금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그 확신이 스데반의 얼굴을 그 고통 가운데서도 천사의 얼굴로 만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스테반이 마지막에 설교 한편을 끝으로 그는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죽음을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7:55-56절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무슨 말입니까? 그의 시선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 머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나라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사람들을 향해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예수가 참으로 영광 중에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그의 아들이심을 영안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그는 더 이상 세상 앞에 초라한 인생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를 끌어다가 수치를 줄 수 있고, 또 매질을 하면 돌로 쳐서 고통을 줄 수는 있어도 그의 심령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빼앗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아프칸에 억류되었던 23명의 일행 가운데 21명이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두 사람이 탈레반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데 그 중에 한 분인 배형규 목사님에게 엄청난 회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 선교 여행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탈레반이 무엇이라 회유를 했는가하면 당신이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면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에게 이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의지했던 예수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 역시 인간이기에 그들의 총 앞에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이제 결혼한 지 얼마 안된 그 상황에서 자기의 아내와 어린 자녀가 왜 눈에 밟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들 앞에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며 사는 것이 구차하게 느껴졌고,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고, 그는 그들의 총에 난사를 당해 사막 한가운데 그의 시신이 던져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지금 그의 죽음을 가볍게 여깁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스테반이 이 고난의 현장에서 조금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처하는 그 모습 앞을 누가 본지 아십니까? 7:58절을 보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지금 사람들이 공회에서 끌고 성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죽이기 위해서 스데반의 옷을 벗겼습니다. 그런데 벗은 옷을 '사울'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여러분, 당시 사울은 당시 헬라철학의 대가였습니다. 세계적인 석학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그는 헬라 철학의 흐름을 알고 있었고 인생의 흐름과 이치를 알고 있었고 자연의 흐름과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존경할만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셋 중에 한가지만이라도 얻기 위해 일평생을 투자하는데 바울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바로 이 현장에서 스데반의 죽음을 정당화하는 현장에 증인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당연히 죽여야 할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뭐, 후회 같은 것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8:1절에 보면 "사울이 그이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했습니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8:3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여기서 '잔멸하다'는 말은 '멧돼지가 가꾸워 놓은 밭을 짓밟는다'는 의미입니다. 멧돼지가 경작한 밭에 들어가서 마구 닥치는 대로 짓밟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사울이 미친 멧돼지처럼 마구 들쑤시며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교회를 핍박해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스데반의 죽음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잔인할수록 그의 마음엔 스데반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길래 저런 수치와 두려움 앞에서도 극심한 공포와 절망의 순간에도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죽어가면서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이 의문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풀리게 됩니다.

다메섹을 향해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강한 빛을 체험한 후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행22:20절에 보면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켰다"고 말씀합니다. 자신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는 이를 갈고 그 현장에서 성난 폭도와 함께 자신도 역시 스테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다고 이야기합니다. 보세요.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었고 자신의 신념 때문에 사람을 죽일 정도로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러나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도대체 저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이라고 소리를 질러도, 두려워하는 기색은커녕 그의 얼굴은 자신이 지금까지 보았던 이 땅의 그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한 얼굴 앞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핍박하는 자를 위해 7:60절에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는 이 용서의 기도는 결국 그의 삶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중보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바울은 죄와 허물로 죽었었고, 죄인중의 괴수였던 자신을 하나님이 구원하셨다는 사실, 죄로 인한 저주 가운데 버려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구원의 은총보다 자신의 인생에서 귀한 것이 없다는 그 감격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그가 훗날 믿음의 사람들에게 외친 가장 강렬한 소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엡5: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정말 그는 그렇게 배운데로 살았습니다. 죽음의 현장 앞에서도 조금도 비굴하지 않은 그 모습 앞에 자신도 그 길을 걸어갑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을 보면 고난을 많이 당합니다. 매를 맞습니다. 배신을 당합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5번이나 맞습니다. 돌로 맞고 태장으로 세 번 맞았습니다. 파선 당합니다. 굶주립니다. 핍박받습니다. 강도를 당하고 동족에게 배신당합니다.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다가와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소중한 구원의 즐거움, 자신에게 남겨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는 한 생을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으로 그 심령 깊은 곳에 은혜의 빛을 샘솟듯 쏟아내며 살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로 모인 우리의 얼굴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지고 있습니까?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로 비쳐지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 얼굴 속에 마귀의 얼굴이 묻어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에 나와도 아버지의 집에 와 있어도, 내 심령에 세상의 염려와 근심의 잡초가 덮혀 있어서 얼굴이 어둡고, 수심이 가득하다면, 문제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스데반이 죽음이 엄습해 오는 그 고난의 한 복판에서도 어떻게 이런 평안을 유지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도행전 6,7장을 읽으면서 참 재미있는 것은 스데반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충만하다'는 단어는 '흘러 넘친다'는 뜻입니다. 컵에 물이 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부어서 물이 철철 넘치는 겁니다. 시냇물에 가뭄이 들어 물이 졸졸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흘러 넘치는 겁니다. 스데반은 흘러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섯 가지를 얘기했는데, 지혜와 믿음이 흘러 넘쳤고, 성령과 권능이 흘러 넘쳤고, 이제 은혜가 그에게 충만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알기는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은혜가 그의 삶에 졸졸 흐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그에게 쏟아 부어졌던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그가 날마다 발견했던지 그의 삶 속에 은혜가 충만했다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상처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입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며 살아갑니다. 때로 내가 잘못한 상처를 남에게 준 그것이 나에게 또 상처가 됩니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받은 말 한마디의 상처, 남모르게 지은 죄 때문에 얼룩진 내 마음의 상처, 이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상처를 우리는 지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처들이 우리의 얼굴을 어둡게 한다는 겁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기쁨과 평안을 빼앗아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으로 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치유 가능하다고 얘기합니다.

저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조용한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아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성을 멋있게 만들고, 사람 모형도 만들고... 모래로 몇 시간 많은 것들을 조각하고는 흡족한 마음으로 숙소로 들어와 다음 날 자신이 만든 그 모래성이 긍금해서 나가 볼 때가 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높이 쌓아 놓았던 그것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두 없어져버린 겁니다. 거기에 누가 빗자루 질을 했다 해도 그렇게 곱게 했을까요? 너무나 깨끗한, 발자국 하나 없는 모래가 거기에 펼쳐져 있었어요.

그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아, 그렇구나! 이 파도가 수많은 모래의 얼룩들을 한꺼번에 씻어가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의 수많은 때와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겠구나!' 우리들 마음에 어릴 때 받은 많은 상처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이유, 삶을 살아가면서 몰래 지은 죄로 인한 두려움과 염려가 그대로 얼룩으로 남아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파도를 만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놀랍습니까? 파도가 그 많은 것을 깨끗이 씻어갈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좁은 마음속의 얼룩을 지우지 못한단 말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기쁘게 살지 못하는 이유, 평안을 갖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에 내 자신을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마음속에 은혜의 파도를 보내십니다. 그 파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안기만 한다면, 여러분이 평생을 씨름하던 그 상처와 그 흔적이 하룻밤 사이에 깨끗하게 씻겨질 줄 믿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무엇이 상처로 남아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평안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까? 남편이 계속해서 심겨준 과거의 상처입니까? 자녀로 인한 상처입니까? 남몰래 지은 죄입니까? 과거에 심각하게 범했던 죄악과 실수 때문에 고민하고 계신가요? 오늘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은혜의 파도 앞에 여러분의 가슴을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과거에 범한 실수가 아무리 중대하다 할지라도 오늘 하룻밤 사이에 여러분이 은혜의 파도 앞에 맡기기만 하신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영혼을 정결케 하실 줄 믿습니다. 눈보다 희게 하시며 주홍 같은 죄라도 양털보다 희게 하실 줄 믿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내 생각대로 안 된다고 너무 쉽게 포기하고 좌절해본 적은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도대체 누구인가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번에 제가 저의 휴가겸 선교지 운남성. 5분의 선교사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한 분은 의사선생이었고, 한 분은 대한 항공 기장 출신이었고, 그리고 한 분은 오직 중국 선교를 위해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현지 언어를 익히기 위해 대만에서 5년을 공부하고 사천성에서 12년을 사역한 선교사이고 그리고 한 분은 우리 교회가 협력하는 분입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의 것들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은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남들이 두려워하는 문둥이 환자를 위해 정말 목숨을 걸고 그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정말 천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의사 선생님을 따라 저의 일행이 해발 2000m가 넘는 고지대에 문둥이 촌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올 것을 안 그들이 밖에 나와 기다리는데 그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는데 그 일에 익숙치 않잖아요. 뭐, 선교지에서 목사란 사람이 손을 잡다 혹시나 하는 불길한 생각 때문에 그들의 손잡는 것을 거절해 보십시오.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들의 손을 잡을 때 처음에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몇 번 그들의 손을 잡으면서 잠시 이지만 생각에 잠겼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 역시,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문둥이처럼 일그러진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는지, 어거스틴은 어느 날 이 은혜 앞에 눈물을 쏟으며 고백합니다.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 할찌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주셨을 것이다" 지금 스데반 역시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주 앞에 송두리째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과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입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에 인생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도, 부도, 명성도, 성공도, 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설령 내가 그것을 누렸다 할찌라도 바닷물을 들이키듯 갈증만 더 날 뿐입니다.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신 주님입니다. 젊음은 지나갑니다. 명예도 지나갑니다. 인간적인 야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주 앞에 마지막에 순결하게 서기 위해,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으로 주 앞에서는 놓칠 수 없는 마지막 영광을 위해 세상 적인 잣대를 포기하는 자, 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생을 살면서 비록 짧은 삶이었지만, 이 한사람으로 인하여 초대 교회가 고난 한 복판에서도 더 든든히 서갈 수가 있었고, 그의 용서의 기도 앞에 한 영혼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는 한 번 설교에 3000, 5000명이 회개하고 돌아오지만, 스데반은 10명은 고사하고 오히려 설교 한번하고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그 순교의 피 위에 바울이라는 인물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역시 다음 주에 태신자를 작정하는 기간을 가지지만, 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교회를 다녀도 마음의 눈이 밝아지지 않으면 십자가에서 주님이 흘리신 피를 볼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게신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바라보고 죄 사함을 받은 확신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새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역시 주님을 위해 사는 일에 아깝지 않고 언제나 어두운 세상에서도 성령을 의지하므로 당당히 밝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은 얼굴이 밝아야합니다.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썩어 가지고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 이 처절한 고난의 한 복판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한 그 모습이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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