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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세대를 어찌할꼬 (마 23:2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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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를 어찌할꼬 (마 23:29-36)

비만도 전염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친구나 가족이 뚱뚱하면 자신도 살이 찔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진이 32년 동안 1만2067명을 대상으로 조사해서 분석한 결과입니다. 친구가 비만일 때 자기도 비만일 가능성은 57%나 됩니다. 형제자매의 전염은 40%, 배우자의 비만 전염은 37%입니다. 함께 사는 배우자와 가족보다 친구의 영향을 더 받는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주어진 환경보다 사회적 관계가 비만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덩달아 살찌는 이유가 살찐 친구를 두고 있으면 비만에 관대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일 동안 예수님이 저주하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봐 왔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7 가지 화를 퍼부으셨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일곱 번째 화에 대한 본문을 읽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저주를 받은 까닭은 주로 교만하고 외식하는 태도 때문입니다. 속은 위선과 죄로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나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느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외식이 그대로 전염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흉보고 욕하면서 배운다고 했습니다. 나쁜 것은 애써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이내 배우고 맙니다. 우리가 그런 꼴입니다. 어느새 우리도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방심하다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못된 태도들을 흉내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세대가 가장 많이 외치는 슬로건이 있습니다. It's different! 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슬로건은 한 핸드폰 회사의 광고카피이기도 합니다. 대중매체를 모방하고 따라하는 상업주의 속에서도 자기는 개성과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아주 작은 차이인데 그 차이에 몰두하면서 자긴 남들과 다르다고 외칩니다. 마치 참새새끼들처럼 입을 모아 외치고 있습니다. ‘난 달라!’
 
그러나 유행을 따라하는 이 세대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비슷비슷합니다. 작은 차이일 뿐입니다. 유행은 허영입니다. 내 시선 속에 남들은 서로 닮은 채로 엉켜 있습니다. 하지만 나만은 남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르네 지라르(R. Girard)는 ‘낭만적 거짓’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비방하면서 냉소하면서 서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허영과 물들어가는 것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이제까지 물든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로부터 독립을 선언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물듦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즉 세속적인 구덩이에서 발을 빼고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에 몸을 담가야 합니다. 이곳에서 경건과 고상함을 배우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바른 삶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까지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악행보다 가장 극심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악행 가운데 이것을 마지막 저주로 돌렸습니다. 일곱 번째 저주는 이들이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펄쩍 뜁니다. 자기들이 선지자를 죽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선지자들의 무덤을 돌보고 있습니다. 허물어진 곳을 쌓고 비석을 꾸며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에 조상들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 과오를 흉보았습니다. 자기들은 과거에 태어났어도 선지자를 죽이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죽인 과거의 역사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이 생각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런 생각은 선지자를 죽인 조상들의 자손임을 증거함이 아니냐? 조상들이 못 다한 분량을 너희가 채워라. 즉 선지자를 죽일 일이 더 남았으니 그 일을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언과 같습니다.
 
이것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명백히 그런 짓을 할 자들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분연히 떨면서 이 저주를 내리고 계신 것입니다.
 
급기야 33 절에는 아주 심한 욕설이 등장합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 판결을 피하겠느냐?” 예수님이 얼마나 분한이 가득하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는 이들의 악행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 가운데 예수님이 가장 분노하신 곳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악행 중에도 정도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악하고 용서받지 못할 악행은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욕하신 것입니다.
 
34절에는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선지자들을 죽이고 있는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이들은 선지자들을 죽일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약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근 400 년 동안이나 선지자 활동이 그쳐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등장했지만 그는 헤롯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기들이 한 짓이 아닙니다. 서기관들을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채찍질하고 구박한다는 말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서기관인데 같은 서기관을 그리 한 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장차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며칠 후에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채찍으로 때리고 침을 뱉고 희롱할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을 핍박하고 죽일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들의 손에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저주가 이어집니다. 지옥 판결을 받게 될 때 돌아갈 형벌이 있습니다. 그 형벌에 가중되는 저주가 35 절입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라고 한 것은 창조 때부터 이스라엘 왕조 역사 거의 끝까지 기간을 뜻합니다. 그 동안에 흘린 모든 억울한 죽음의 피값을 너희에게 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가랴는 역대하 24장에 나오는 제사장 사가랴를 말합니다. 사가랴를 죽인 왕은 요아스입니다. 요아스가 어린 아기 때 아달랴의 반역이 일어났습니다.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할 때 요아스는 유모의 기지로 숨어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렇게 육년을 숨어 지냈습니다.
 
그런 중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군대를 일으켜 아달랴를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요아스가 일곱 살 때 왕위에 앉혔습니다. 여호야다가 아달랴의 반역자들을 몰아낼 때 성전에서 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밖으로 끌어내서 반역자들을 처단했습니다. 성전을 살육의 피로 물들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호야다는 요아스의 왕의 은인입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충고를 받아들여 성전을 중수했습니다. 성전에 들여놓은 바알의 흔적들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다시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이런 왕의 타락을 보고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사가랴가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 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이 말을 들은 요아스는 사가랴를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요아스 왕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헤아리지 못하고 그의 은인의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성전 뜰 안에서 하나님의 종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결코 용서받지 못할 악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요아스가 저지른 악행까지 선지자들을 죽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덤탱이를 씌우고 계십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종을 괴롭히는 죄가 크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아프카니스탄에서 순교한 배형준목사님은 신대원 10 년 후배입니다. 제주영락교회 장로님 아들이더군요. 온 국민이 비보를 접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주의 종을 죽인 탈레반은 어떤 말로도 이 악행을 변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신원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억류되어 있는 분들이 속히 풀려나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라크에서 먼저 순교한 김선일씨와 배목사님의 피흘림을 통해 이슬람 국가에 복음의 물꼬가 터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괴롭게 하고 죽이는 죄는 너무 큰 죄입니다. 어떤 죄는 회개가 되고 돌이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너무 큰 죄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을 죽인 죄는 지옥 형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종을 선대하십시오. 나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업신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모두 종교인들입니다.
 
그러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으면서도 결국 그런 악행을 저지르게 되었을까요? 우리도 이 문제에 방심하면 같은 올무에 걸릴 수 있습니다. 경계하고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교회에서는 개인의 생각과 욕심을 버리십시오. 언제나 공동체가 우선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 이권에 침해가 있으면 참지 않았습니다.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이익이 우선입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되면 반대합니다. 자기 밥그릇에 손을 대면 으르렁댑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사욕을 채우는데 씁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서기관 위치에 두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쌓아올린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자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려고 그런 무리수를 두었던 것입니다.
 
개인의 생각과 욕심이 공동체보다 앞서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회의할 때 개인의 생각과 욕심으로 반대하고 찬성하면 안 됩니다. 항상 교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내게 손해되는 일이어도 그것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면 물러서야 합니다.
 
요즘도 교회 분쟁이 심심치 않습니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똑같은 이유입니다. 개인의 욕심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 내막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자존심과 명분이 공동체보다 우선이 되면 교회는 분열됩니다. 그래도 끝까지 자기가 선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되기 때문에 동조 세력을 모읍니다. 같은 처지와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 뭉치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특히 함께 죄를 짓는 일에는 결속력이 아주 강해집니다.
 
깡패들의 의리가 특전사 대원들보다 강합니다. 악한 일에 하나가 되지 마십시오. 사단의 노리개가 되고 맙니다. 목사님을 대적하는 이들은 새신자가 아닙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한 장로님들이나 임직자들입니다.
 
교회에서 개인의 생각과 욕심을 부리면 목회자가 괴롭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목회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녀들 앞에서 누구 흉을 보지 마십시오. 특히 자녀들 앞에서 목사님 흉을 보는 것은 신앙교육에 독약입니다.
 
아이들은 아주 성능 좋은 레이더입니다. 언제나 귀를 종긋 세우고 어른들의 말을 귀담아 듣습니다. 그러다가 누구를 흉보는 이야기가 나오면 귀가 커집니다. “엄마 누구 이야기야?” 하고 물으면 “넌 알 것 없어. 어른들 이야기야.” 그러면 모르는 척 해줄까요? 아이들 눈치가 백단입니다.
 
남 흉보기는 어른들이 아주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맞장구 쳐주는 사람이 있으면 밤새는 줄 모릅니다.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요리는 못해도 남을 도마 위에 올려놓으면 일류 요리사가 됩니다. 특히 목사님 흉은 최고 요리감입니다. 목사님이 누굴 편애하고 감싸고돈다는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과 감싸진 교인이 다 요리 재료가 됩니다. 상상의 날개를 펴고 온갖 추리를 합니다. 수사반장이 머쓱해서 돌아갈 정도입니다. 분석해 내고, 조리 있게 따지는 솜씨가 대단합니다. 동물 이빨을 하나 발견하고 공룡 전체 모형을 상상해 내는 고고학자보다 솜씨가 좋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교회를 다닐 때 기억입니다. 학생 시절에 교회 어른들의 장단점을 다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친구 아버지가 교회 재정부장이셨고, 어머니가 여전도회 회장이셨습니다. 이 친구가 집에서 들은 이야기를 다 해주었습니다. 학생회 임원들은 그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장로님이 기도를 엉터리로 하는지, 부부싸움을 했는지 다 알았습니다. 심지어는 제직회에서 어떤 꼼수를 썼는지도 다 알았습니다. 목사님 흉허물까지도 알았습니다. 아이들이 그런 것을 안다는 것이 결코 신앙생활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그런 정보들은 편견으로 만들어진 일그러진 것들입니다. 부모님이 목회자 흉을 보고, 교회 불평을 이야기 하면 그 자녀들 신앙이 어찌 되겠습니까?
 
목사님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먼저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정말 목사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고하려면 공개적인 자리를 피해서 하십시오. 정말 조용히 찾아뵙고 조심스럽게 우회적으로 표현하시면 됩니다. 그럼 목사님이 왜 그리 하셨는지 변명을 듣게 될 것이고, 이해할 것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못났어도 교인들보다 더 생각하고 더 기도합니다. 배려할 것이 많기 때문에 교인들이 간혹 이해하지 못할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내막이 있습니다. 그럴수록 목사님을 위해서 더 기도하면서 교회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목회자와 보조를 맞춰서 하십시오. 목사님보다 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목사님보다 유능한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분들은 그렇다고 목사님보다 앞서지 않습니다. 기다릴 줄 알고, 참을 줄 압니다. 목사님을 먼저 세우는 이유는 리더십 때문입니다. 목사님보다 앞서는 것은 자기가 교회의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수 십 년 동안 신학을 수련하고 훈련 받았습니다. 그래서 공적으로 하나님이 교회의 리더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 권위를 위임해 주셨습니다. 그 권위를 깎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를 섬기고 세우면 교회가 평안합니다. 부흥합니다. 온 교인들이 행복해집니다. 여러분의 목회자를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를 섬길 줄 아는 신앙은 그 가정이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공급하겠습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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