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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사람들의 위대함 (행 22: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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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람들의 위대함 (사도행전(22) 22:17~27)

많은 연예인들이 대마초, 마약, 필로폰 때문에 제법 문제를 일으킵니다. 중독되어 힘들어 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자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연예인들에게 왜 그러한 일들이 많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많은 경우에 인기가 주된 원인이 됩니다. 어떤 연예인들은 지금보다 더 많은 인기를 얻으려고 그런 일을 하게 되고 또 어떤 연예인은 지금 누리고 있는 인기를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마약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옛날에는 인기가 많았지만 지금은 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절망감 때문에 마약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인기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게 되면 훨씬 덜 할 텐데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인기의 속성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인기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기나 여론, 유행 혹은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사기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들은 너무나 터무니없고 변덕스럽다고 말합니다. 까닭 없이 생겨나기 때문에 생겨난 원인을 알지 못합니다. 생길 때도 까닭 없이 생기고 이유도 없이 그냥 없어집니다. 한 순간 맥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인기고 여론이고 사기고 유행입니다.

사회학자들이 이것을 두고 군중의 속성이란 이성적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이성적인데 한 사람이 모여서 군중이 되면 이성적이 아니고 감정적으로 되어버린다는 것인데 연속적이고 꾸준한 것보다 즉흥적이 됩니다. 갑자기 생겨나서 이리 저리 휩쓸리더니 어느 날은 또 침체되어 있는 모습이 됩니다. 주체적이기 보다는 유행병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판단해서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하는 것이 아니라 까닭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끌려가다가 자기도 그런 모습을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믿는 우리들마저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성결이란 뜻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예수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렇게 산다면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세상의 군중은 이성적이 아니라 감정적이고 즉흥적이고 유행병적인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인간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따로 떨어져 사는 교회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간세상은 다 똑같습니다. 동양이나 서양, 옛날과 지금 모두 같습니다. 그래서 혹 여러분이 세상 살면서 인기가 없어도 개의치 말고 그냥 지나가십시오. 다 지나갑니다. 갔다가 오기도 하고 왔다가 없어지기도 한 것이 인기이고 여론입니다.

대통령선거 한다고 여론조사를 많이 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그저 그런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예수님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따라다녔습니까? 수천, 수만 명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붙들려 재판을 받으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영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로마총독이 강도 한 사람과 예수 중 한 사람은 풀어줄 수 있는데 누구를 풀어주기 원하는가? 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망설임 없이 강도라고 말했습니다. 이 예수를 어떻게 할까? 라고 로마 총독이 다시 물었을 때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이렇게 했던 그들이 예수 믿는 사람, 예수의 종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을 따라다녔습니까? 혹시라도 그 몸에서 떨어진 손수건 하나라도 가지면 병이 나을까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으며, 사도들의 지나가는 그림자에 덮이면 병이 나을까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까? 그러다가 한 순간 죽이라고 떠들어대지 않습니까?

바울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예루살렘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악한 유대인들이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누명을 덮어씌웠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런 저런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선동되어 사도바울을 죽이려고 몰매를 쳤습니다. 그리고 성전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죽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온 시내가 난리 났습니다. 그 소리가 멀리까지 다 들려 당시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천부장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치안책임이 있었으므로 달려와서 보니 바울이 거의 다 죽을 때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살려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책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 때 바울이 천부장에게 한 마디만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일장연설한 것이 사도행전 22장의 내용입니다. 이 사도바울의 모습에서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도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이렇게 멋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의 위대함을 보면 첫 번째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는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가 얼룩말이나 영양들을 따라갈 때면 이상하게도 옆에 그러한 동물들이 아무리 지나가도 거들떠보지 않고 자기가 표적했던 그 한 마리만 따라갑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다른 것은 일체 듣지도, 보지도 못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렸습니까?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 다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메여 예루살렘에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디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2-24)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이 일 외는 어떤 것도 나를 막을 수 없다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빌립보에서 나는 오직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잡힌 것 외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잡힌 것 외에 어떤 것도 사도바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바로 위대한 사람은 이러합니다. 큰일은 하는 사람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귀히 여기시면서 온갖 권세와 능력을 주시는 사람은 하나님만 붙듭니다.

두 번째,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도바울은 교만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폭이 넓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내가 제일 큰 것을 비우고 하나님을 붙들었으므로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보다도 우선이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들을 줄도 알고 그 의견을 존중할 줄도 아는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의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교회에 들어가니 지도자들의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바울이 돌아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예루살렘에 바울을 죽이고자 벼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 큰 걱정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20절에서는 바울에게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행21:23~24) 라고 바울에게 주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주문을 한 번 가만히 보십시오. 얼른 듣게 되면 뭔가 좀 이상합니다. 기독교적이 아닙니다. 마치 유대교와 타협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주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열심을 다하여 경청하였습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락하였습니다. 듣는 척만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듣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음을 기울여서 들어야 합니다. 대표기도를 할 때 마음을 다하여 저 기도가 나의 기도라 생각하고 듣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찬양대가 찬양을 하면 그 찬양을 나의 찬양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찬양대는 우리를 대신하여 찬양하는 것이므로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대표기도나 찬양을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나의 기도요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에게는 분명히 다른 생각이 있어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줄 알고, 또 그것이 절대적으로 금지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닌 한 받아들일 줄 줄 아는 넉넉한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의 교회에 와 있습니다. 자기도 온 세상, 유럽과 아시아에 많은 교회를 세웠고 또 그곳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자기도 어른이고 지도자이지만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울이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곳의 지도자들이 주문한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절대적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인데 여기에 얼마나 넉넉함이 있습니까?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 때에는 내 생각과 조금 달라도, 때로는 좀 많이 달라도 받아들일 줄 아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법도 알고 세상의 도리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른을 어른으로 여길 줄 아는 신앙 인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신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격이 있는 사람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세우셔서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아무나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회는 뒤에서는 붙들 수 없고 앞에서만 붙들 수 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난을 받았습니까? 참 많이 맞았습니다. 집단으로 폭행을 당해서 죽을 뻔도 했습니다. 천부장이 달려오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목숨을 지키지 못했을 정도로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죽을 고비를 넘긴 바울이 숨을 쉬고 살만 하자 생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맞아 죽을 뻔한 바울 옆에 있는 사람이 천부장이라는 사실을 그것이 복음을 전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천부장이 있으면 로마의 군인들이 있으므로 죽을 염려가 없었습니다. 앞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있고 로마의 천부장과 군인들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그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에게 한마디 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며 일어섰습니다.

인생에 절대의 기회가 두세 번 온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온다고 합니다. 작은 기회가 아닌 큰 기회를 말하는 것인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놓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놓치는 것이 아닙니다. 몇 사람은 그 기회를 붙들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위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몇 번 밖에 없는 그 기회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다 붙들면 더 위대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기회를 붙들었습니다. 혹 여러분 앞에 그 멋진 기회가 오게 되면, 시시한 기회는 다 흘려 버리고, 큰 기회는 제대로 붙드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위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사도 바울은 모든 기회를 나를 위한 기회로 쓰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위한 기회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연설할 기회를 얻어 연설한 것을 보면 처음에는 마치 자기를 위해서 변명, 변호하는 것 같습니다. 22장 1절에서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어라 라고 말합니다. 해명한다고 했지만 실제 그 내용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를 위해서는 한 마디 해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번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죽은 줄로만 생각하지만 예수는 죽은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전에 예수를 가짜라고 이야기 하고 예수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수없이 따라다녔던 내가 그 예수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박해했던 사람이 나인데 그런 내가 죽은 예수를 만났겠습니까? 예수께서 살아있으니 만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 예수가 내 인생의 주인이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을 보면 참으로 미련하게도 보입니다. 때로는 저런 말을 하면 당할텐데 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17절에서 그는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나의 환상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예수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습니다. 네가 아무리 말을 해도 저 유대인들은 너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은 귀가 없고 교만해서 너의 말을 듣지 않을테니 그냥 내버려두고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낸다고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미련스러운 말일까요? 왜 마치 죽으려고 작정한 것 같은 말일까요?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들만큼은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역사를 보면 늘 당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집트에 당했고 바벨론, 앗수르에게 당했고 페르시아에게 당했고 지금 본문에서는 로마에 당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하나님께서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있는 차에 바울이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고 하나님이신 예수가 나보고 저 유대인들은 내버려두라,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후에 죄의식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있는데 이제는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그들의 두려운 마음에 결정타를 날려버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소원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행복하고 싶은 소원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받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아니라고 해도 모든 사람은 사랑받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유대인들이 바로 여기에 걸린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않아도 좋지만 여호와에게 만은 사랑받아야 되는데 혹시 자기들이 죽인 예수가 여호와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2~23절에 이 말하는 것까지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빨리 돌아오면 되는데 돌아오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을 생각해 봅니다. 이런 소리를 하면 터지고 깨지고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왜 이런 소리를 할까요? 바울에게는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절대철학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관한 한 사도 바울에게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철학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양보할지라도 예수와 복음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그 말이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 말을 아끼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복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철학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도 바울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다섯 번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자기 권세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예수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지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입니다.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세상을 운행하시고 계시는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시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얼마든지 없앨 수도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인식이 사도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리스도가 세상을 심판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마음이 사도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성도가 세상뿐만 아니라 천사까지 판단할 것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느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세를 순간 순간 마다 누렸습니다. 겸손하면서도 나는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또 그에게는 어디를 가든 주눅 들지 않는 힘이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초라하지 않고 누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누군데’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을 얻어서 군중들에게 말할 때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오늘 22장 바로 앞에서 사도 바울이 허락을 얻어서 연설하기 전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대단합니다.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기회가 났다고 덥석 덤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디 가서 함부로 말하거나 아무렇게나 앉거나 먹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시시한 것은 받지 마십시오. 세상에 있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받지 마십시오. 받으려면 큰 것을 받으십시오. 하나님께 주시려면 큰 것을 주시라고 말하십시오. 아무거나 다 좋다고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못 먹는 것, 못 쓰는 것, 다른 사람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큰 것을 받아야 합니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손을 들어서 조용히 하는 모습들 보십시오. 그냥 조용이가 아니라 매우 조용히 하고 난 뒤에 말합니다. 피고가 아니라 통치자가 자기 휘하의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이런 위대한 모습을 똑같이 보인 사람이 순교자 스데반이었습니다. 산헤드린 대법정에서 재판장인 대제사장이 심문하며 이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볼 때 스데반의 대답하는 모습이 이렇습니다. 그는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였습니다. 스데반은 그 때 성경에서 가장 긴 설교를 하였습니다. 최후진술의 금쪽같은 시간을 자기를 위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한 기회로 삼지 않고 순간순간 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어떻게 하면 한마디라도 더 예수를 말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산헤드린 법정에서의 스데반의 얼굴 표정을 천사의 얼굴이더라고 성경을 적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그런 평안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기 권세를 아는 사람 그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나 스데반이 그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위대하게 쓰십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사람의 위대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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