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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전 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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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전 6:11-12) 
 
얼마간 사이에 갑자기 날씨가 선선해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무더워서 가시지 않을 것 같은 더위가 한 순간에 그 끝을 보이고 제법한 가을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우리의 삶도 어느 날 한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 방향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신앙의 요행수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며 성실하게 애쓰다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때가 차매 이루시는 축복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몇 가지 필요한 덕목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 인간과의 화해, 그리고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우리 삶의 필요한 선택들을 위해서 우리는 이러저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들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삶이 왠지 지루하거나 계획된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되는 일없이 시간만 흘러서 지루하고 초조한 생각이 들 때 우리는 그 순간을 눈여겨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의외로 우리가 삶의 전투의지를 불태우고 달려갈 때는 일이 잘 되고 안 되고는 둘째 문제고, 삶이 활력적이고 기대와 소망에 부풀어 팽팽한 긴장과 열정 속에 진행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 하고 한 발 빼고 뒤로 물러서 있거나 혹은 기운을 쓰다 지쳐 멍하니 있을 때 쉴 만큼 쉬면 괜찮지만 그 일정기간 지나면 삶이 무의미해지고 매우 지루해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은 새로운 목표도 세워보고 삶의 일정을 세워 또다시 달려가 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의 일상을 바라보면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이번 주 우리가 살아야 될 기본적인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화해, 통찰, 선택, 그리고 오늘은 전투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믿음의 제자요,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특별히 복음의 아름다운 사역을 이루는데 헛된 욕심을 피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나아가 섬기자 있는 성도와 교회를 돕기 위해서 전투의 의지를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적용되어야 될 일이고 역시 우리도 세상에서 우리자신을 지키고 또한 이루어야 될 영적전투의 승리를 위해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을 위하여 싸우는 영적전투의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고 그 선택에 응답하여 믿음의 발걸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영적인 전투입니다. 자신을 극복하고 죄악을 접고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한 내적인 전투부터 시작됩니다.

나아가 외적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삶의 장면들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대로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는 장면들이 열려지게 됩니다. 이것은 누구나 쉽게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힘을 다해서 사단의 유혹을 뿌리쳐야 하고 억압을 능가하고 힘을 들여 수행해야만 이룰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또 우리 주변의 삶을 아름답게 이루는 데 일조하기 위해서 힘을 다합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성품을 갖기 위해서 애써야 하며 나아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위 기쁨과 위안을 주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세상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은총의 세계로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사명의 목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이 쉽지는 않지만 또한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우리가 처해진 곳에서 주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낮추고 절제하며 헌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미혹을 뿌리칠 수 있는 자아정체성을 확립해야 되고 절제해야 되고 악한 영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마음의 단호한 믿음과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분명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신감속에서 우리들에게 놓여진 전투를 승리한다는 확신 속에서 두려움 없이 날마다 임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영적인 전투성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힘에 밀려서나 지쳐서나 아니면 두려워서나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영적인 전투에 임하고자 하는 전투성을 상실한다면 우리 믿음의 사람은 그 시로부터 시작해서 추락하고 아무런 생명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날 때 오늘도 나한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있구나! 어떻게 하루 견디지? 하는 생각이 있다면 우리 삶은 처참하기 짝이 없을 겁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늘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구나!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일들 속에 나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나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애쓰며 그것을 위해서 내 삶은 희망과 소망이 부풀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담대하게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과업을 두려움으로 맞이하지 않고 자신감과 기쁨과 당당한 용기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영적 전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주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해당함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어섬과 앉음, 머리카락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두려움 속에 초조해 하거나 한탄해 하지 말고 극복과 하나님의 은혜주심을 생각하고 두려움 없이 자신감을 가지고 그 고비를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지는 삶의 자신감이 힘이고, 용기고, 위축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진정한 삶의 겸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주실 것을 확신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승리주실 것을 믿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계획하고 실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과정을 생각해 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킬 때 하나님은 하늘에다가 바탕을 삼고 거기다 구름으로 "내 백성을 보내라." 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우르릉 거리는 가운데 내 백성을 보내라 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모세를 무능하게 잠기게 하셨고 모세가 무능력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할 때 모세를 지루하게 설득하셔서 결국 그 연약한 모세의 입술을 통해서 바로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셨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셨을까요?
이런 일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 어떤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간절히 구했더니 하늘로부터 뚝 떨어져서 내 앞에 어떤 선물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런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주시지 않는 이유가 바로 같은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을 기도했을 때 필요한 것을 소원했을 때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 일을 위하여 준비하고 계획하고 실행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나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애절함도 배우고 인내심도 배우고 어려움을 극복함도 배우고 우리의 부족한 능력을 채우기 위해서 훈련도 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얻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습득하게 됩니다. 참는 방법, 얻을 수 있는 힘, 지혜, 지식, 그리고 좌절 속에 일어나는 힘, 이와 같은 것들을 습득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음에 우리에게 그와 같은 것이 또 필요할 때 우리는 그와 같은 것들을 다시 얻을 수 있는 여건과 힘과 능력과 기능을 소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한 번 주시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번 기도했던 것을 영원히 주시는 은총의 방법을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을 주실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기쁨을 주시려는 은총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에서의 사역을 그 백성을 통해 순차적으로 이루어가시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그 백성에게 훈련을 주시고 자격을 부여하시며 실패를 주시고 극복하는 힘을 통하여서 우리들에게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좌절을 통해서 겸손할 수 있는 방법을 허락하시고 또 우리들에게 주의 역사와 은총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일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간절히 소원하게 되고 소원한 것을 인하여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그 일을 힘쓰고 실패하고 일어나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잠깐의 연단의 시절 또는 긴 세월의 연단의 시절이 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결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세월이 쌓여 꺾이지 않는 아름다운 작품이 되며 마침내 승리의 자리까지 이르러 그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면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현재 내 일이 당장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두렵지 않고,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낮아질 수 있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고, 엎어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는 경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모든 상태가 불리하다고해서 중단하고 패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든지 최후 마지막순간에 반전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오시기도 합니다.
여호수아, 갈렙이 가데스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으로 가나안을 정탐합니다. 열 명은 와서 도저히 와서 불가하다고 얘기합니다.
여호수아, 갈렙 두 명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를 들이시리라"

그러나 사람들은 열 명의 말을 듣고 여호수아, 갈렙을 돌고 치려고 합니다. 그때까지도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으시다가 마지막 돌을 들어서 그들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회막의 영광으로 임하셔서 그들의 편을 들어주셔서 결국 그들을 승리케 하시는 것입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혔고 뒤에는 애굽의 병사들이 쫒아 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놓고 바로는 또다시 마음이 바뀌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추격하는 애굽의 마병들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추격하는 애굽의 마병을 막으셨다면 이들은 초조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끝까지 따라와 그들 뒤에 붙어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홍해를 여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가게하고 쫒아오던 애굽의 마병은 다 수장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백성들을 다시는 쫒아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백성들에게 초조함을 주시는 것은 그 한 번의 기회로 말미암아 다시는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려는 은혜요 축복임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전투는 내 앞에 놓인 대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따라서 하나님 앞에 나를 쳐서 순복시켜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부적인 영적인 전투가 우선적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그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투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간절히 소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전투는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힘이 넘쳐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감으로 자신의 힘만을 믿고 갔을 때는 여지없이 패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승리와 패배라는 것을 반복시켜가면서 이들에게 더 큰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 승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면 승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않고 하나님과 관련 없다면 실패한다는 가장 큰 승리를 체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싸움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지는 전투를 가지는데 있어서 우리는 따라서 두려운 마음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담대하게 진행해야 합니다. 세상에 일방적인 일은 없습니다. 올라가면 평지 나오고 내리막길 나와 우리들에게 쉴 적이 있고 또 우리가 쉬었으면 힘든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밤과 낮이 교차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어렵다고 한탄 말고 또 기쁘다고 자만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특별히 영적인 전투를 이뤄가는 주의 성도들로서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 해결에 대한 기쁨을 바라보는 삶의 자세를 확보하면 우리 삶의 어려움은 상대적으로 적어집니다. 아마 여러분들 아셨던 것처럼 지난번 우리 제직이 한 삼천 명 정도 되는데 제직 교육을 했습니다. 한 번만 모여서 교육하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죠? 그래서 열두 번을 나눠서 교육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시간이든지 편안한 시간에 나오십시오. 열 두 번 중에 한 번 못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열두 번 을 실시했습니다. 그랬더니 열두 번 실시해서 다 된 것이 아니라 잘 안 됐습니다. 300명 오기로 한 날은 150명 나오고 200명 오기로 한 날은 100명 정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열두 번 하니까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시 생각했습니다. 내가 50번 하면 되리라.

이렇게 마음먹으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오십 번까지는 안가고 아마 절반쯤 되니까 다 마쳐진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세례성도 교육을 하는데 열두 번 해도 안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또 오십 번 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먹으니까 그저 편안한 것 같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다가 뭐가 안 되면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가 이렇게 진행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보시기에도 언제나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우리 삶에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일을 하는데 결코 쉬우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어떤 일을 하면 잘 되던가요?
어떤 일하는데 어려움 없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던가요?
제가 보기에는 잘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한 번 끝났으면 그걸로 다시 생각하지 않고 돌아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한번 해야 될 일을 다섯 번, 열 번 찾아가도 안 될 일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셔야 됩니까? 오늘 설교 들었으니까 나도 오십 번 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는 그래도 착한 사람들하고 같이 무슨 일을 하지 않습니까? '나는 착한 사람 아닌데......' 그런 생각하는 사람 있으세요?

성도들은 비교적 착한 사람들이더라고요.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성도들을 대상으로, 착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살아가시잖아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저보다 훨씬 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어떤 일을 이루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생각하기에 그 어려운 일을 극복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것을 성도들에게 보여드리는 것이 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인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목사님 하시는 일은 거의가 잘 안 되더라, 그러나 끝에는 결국 되더라.'
저는 이렇게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목사님 뭐하나 해서 제대로 하는 것 하나도 못 봤다, 그러나 결국 끝에는 다 되더라.'
저는 그래서 우리 성도들도 그렇게 마음먹고 어떤 일을 어려움으로 여기지 말고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끝까지 진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는데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고 그것이 영원히 안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문제 해결에 대한 기쁨을 바라보는 삶의 자세를 확보하면 우리 삶의 어려움은 상대적으로 적어지는 것입니다.
한 번 해서 되면 좋고 안 되면 열 번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끝까지 하고, 그것이 우리 마음이라면 우리는 그렇게 넉넉한 마음속에 초조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끝까지 가면 결국 초조해 지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상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결국 문제해결에 대한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달려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똑같은 음식의 재료를 가졌다고 똑같은 맛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똑같은 재료가 있어도 그 재료를 가지고 특별한 맛을 내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삶의 아픔, 슬픔, 좌절, 안 되는 일, 고통스러운 일, 그것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누리려는 겁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슬픔을 누리고, 아픔을 누리고, 고통을 누리고, 눈물을 누리겠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오히려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일이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겁니다.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일을 이루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어렵기 때문에 결국은 그 일을 해결하고 그 과정 속에 우리는 더 많은 힘을 습득하게 되는 것이고 방법과 능력을 습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까지 낮아져도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기서 남은 것은 더 높아질 일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 해결에 대한 기쁨을 바라보면 우리는 지금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결코 그것이 우리를 제어하거나 슬프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우리는 늘 새로운 전투에 대한 기대를 가져야 됩니다. 새롭다는 것은 고통을 의미하지 않고 새롭다는 것은 새로운 기쁨과 감사의 기회라는 생각을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모험심을 가지고 당시에 한계라고 여겼던 세계를 향해 도전했던 사람들을 의해서 그 지경이 넓혀집니다.

가나안 전투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지루하게 오랜 세월을 거쳐서 수많은 다양한 전투로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슬픔과 패배로 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백성을 훈련시키셨고 결국 그들에 대한 믿음을 체득할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승리하는 성도는 새로운 것을 두려움으로 맞는 것이 아니고 새로움을 기대로 맞이하는 성도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아침마다 일어날 때 '또 오늘 힘든 일을 어떻게 처리하나?' 하고 생각되지 않고, '오늘도 나에게 눈뜰 수 있는 은혜와 기쁨 주셨는데 어떻게 내게 주신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역사를 이룰까?' 하는 기대로 사람 만나고, 계약하러 가고, 일하고 어떤 일을 처리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새로운 전투라는 것은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 늘 하는 일이 있을 겁니다.
어떤 일을 했는데 내가 잘 하는 일입니다.
'잘됐다.' 하고 씩씩하게 해치워버리면 그것은 70점 밖에 안 됩니다. 어떤 내가 늘 하는 잘하는 일이 있을 때 이렇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것을 지난번보다 더욱 더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이것을 더 이상 잘 할 수 없이 이번에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그는 끊임없이 진보할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 반복이 아니라 창조적 진보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노동과 창조적 생산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적인 전사로서 단순노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창조적 새로운 생산을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이 돼야 합니다.

절대 전같이 처리할 수는 없다. 이번을 통해서 나는 전혀 체험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야 되겠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탁월한 주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요. 우리 성도들은 두 가지를 겸비해야 된다고 말씀드렸지요. 오늘도 따라 합시다.
"탁월함과 겸손함"

성도들은 탁월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탁월함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탁월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가지가 겸비될 때 우리는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빛을 발하는 것은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노력하고 애쓰는 것이 삶의 체질이 돼야 합니다. 노력도 성령충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어서 주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기대하기에 오늘도 우리는 영적전투의 장면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성도가 전투성을 상실하면 그는 한없이 누추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투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투에 대한 의지를 상실함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의 백성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반드시 고통만은 아닙니다. 요즘 아마 우기가 돼서 곰팡이가 곳곳에 피어있습니다. 심지어는 냉장고속에 있는 것들에도 곰팡이가 피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우리는 참 여러 가지로 좋은 것을 버리게 되었다고 마음에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러나 그 푸른곰팡이로부터 페니실린을 발견해서 우리 인류는 많은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어려움이라는 것은 반드시 내게 고통이라는 것과 등식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재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은 훨씬 더 큰 기쁨과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그러면 전투를 하되 믿음의 전투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번 따라서 합시다.
"하나님과 그 약속에 대한 능동적인 신뢰" 믿음이라는 것은 수동적인 인정만이 아닙니다.
'아,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구나! 나는 그것을 믿으면 되는구나.' 하고 믿는 수동적인 믿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그에 대한 능동적인 신뢰를 이루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수동적으로 방어적으로 믿는 것 뿐 아니라 진취적으로 능동적으로 우리는 더욱 더 활동적으로 그 믿음을 실현해 나가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능동적인 신뢰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말이 복잡한 것 같은데 간단합니다.

내 삶의 시련을 통해서 그 믿음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전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확신하고 하나님의 돌보심과 승리를 믿고 자신 있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백성은 반드시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랑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반복되는 현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반복되는 현상 속에서 사람들은 원리를 추출하게 됩니다. 또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지면 그 이루어지는 것 가운데 공통된 점을 사람들은 발견하게 됩니다. 그 공통점을 발견해 내는 것을 우리는 원리의 추출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떤 믿음의 사람이 행동하는데 여기도 사랑이 풍부하고 이렇게 말해도 나누어도 배려해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도 거기에 모두가 사랑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그런 반복되는 삶의 현상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믿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믿으면 사랑을 베풀게 되는구나!
하나님은 결국 사랑이시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은 바로 이것입니다.
능동적인 신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능동적인 신뢰가 바로 우리들에게 있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합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떤 사람과 약속했을 때 외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화장을 공들여 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외모를 가꾸기에 시간을 쏟을 겁니다.
다른 사람과 만날 때 패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어떤 옷을 입을까, 어떤 장식을 할까, 신경을 쓰게 될 것입니다.
대화하는데 중점을 두는 사람은 내가 오늘 가서 무슨 얘기를 할까? 이 얘기 저 얘기 골라보기도 하고 이 얘긴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간단하게 메모하고 아니면 손바닥에 한 두 글자라도 적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 사람을 만날 때 내가 어떤 뜻을 이룰까요? 우리가 만나 대화할 때 어떤 뜻을 이루게 될까요? 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이 있고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싸우는 선한 싸움을 이루게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전투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상황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함을 이르는 겸손함을 말합니다. 내 상황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를 못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내가 움직이고 있고 그것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왜 겸손이 힘이죠? 겸손해야 연습하고 훈련합니다. 겸손해야 승리 후에도 자만하지 않고 지속적인 진보의 지경에 나아갑니다. 겸손하지 않으며 우리는 훈련의 장면에 돌입할 수도 없고 승리하고 난후에 지속적인 훈련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또 자만하는 순간 우리는 떨어져 추락할 뿐입니다. 믿음으로 전투하는 것은 전투의 최종적인 승자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는 어리석음에 빠지면 높아지지도 못하고 추락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 하나님을 통하여 오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싸움을 싸우되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데 그것이 선한 싸움이어야 합니다.
선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곧 그것이 나 자신을 넘어 다른 이들에게까지 유익을 끼치는 겁니다. 즉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쁨을 끼치는 것이 바로 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나 자신의 유익하나 넘어서면 그 순간부터 우리들에게 보여 지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전에는 보이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살아야 되는데 내가 잘돼야 되는데 내가 어떤 것을 이루어야 하는데 내가 무엇인가 쌓아두어야 하는데 내가 안정적인 것을 구축해야 되는데 라는 것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세계가 좁아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나 하나를 넘어서더라는 말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지요? 우리는 다른 것이 보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피로가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줘야 될 것이 보이고 우리자신보다 훨씬 넓은 세계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심이 우리에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한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목적이 모든 방법을 합리화시켜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승리하되 선한 방법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 앞의 전투를 승리해서 내가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고 주변사람이 기뻐하고 유익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승리는 성취감속에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이루어지는구나! 라는 뜻의 발견 앞에 겸허해지는 역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제 어떤 일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에 대한 방법과 길을 찾는 수준을 넘어서서 우리는 모든 이들과 함께 승리와 은혜를 나눠야 합니다. 전쟁의 승리자가 있으면 패배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과의 싸움이 아니라면 내가 인생의 경주에 승리했다고 해서 내 앞에 패배자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어갈 때 가장 저급한 승리는 기진맥진해서 승리하는 겁니다.
여기에는 승자와 패자의 구분이 명확합니다. 내가 억지로 힘겹게 승리했기 때문에 승리하는데 급급하느라 방법도 수단도 내가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릴 것 없이 사용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유증이 큽니다.
경우에 따라서 승패가 다시 뒤집어집니다.
믿음의 사람의 경우에는 특별히 힘에 부치니 엉뚱한 세상방법까지 동원하다가 마지막에 이룬 그 승리 때문에 오히려 저 계곡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수준은 뭐냐 하면 준비하고 계획하고 예상했다가 승리하는 겁니다. 전후를 살펴 과정과 방법도 신중하게 선한 방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을 패배자로 만들지 않고 그도 역시 세워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에게 역시 승리의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는 빨리 승리한 것-좋은 것 아닙니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쉽게 승리한 것도 별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빨리 승리했다면 어려움가운데 사유하고 그 가운데 우리가 여러 가지 고통을 겪으며 그것을 묵상하며 그 가운데 얻을 것은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힘들이지 않고 승리했다면 우리는 쉽게 승리했기 때문에 고통가운데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을 얻지 못하고 새로운 방법과 힘을 습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 별로 수고하지 않았는데 승리했어.' 이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고통 없이 승리했다는 것은 우리는 고통을 당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고통이 있다면 우리는 그 가운데 감사해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내가 그 고통쯤은 능가하고 이길 사람이라고 우리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승리가 뭘까요?
현장의 승패유무를 떠나서 보다 큰 그림의 최후적 승리를 구현하고 여유와 하나님의 은혜의 근본적인 틀을 가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패배였습니다.
붙잡혀 갔고, 묶임 당했고, 조롱당했고, 그는 찔림 당했고, 결과적으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분명한 패배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장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보다 큰 틀의 승리를 이루는 최후의 승리의 구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승패에 연연해서는 더 큰 승리를 이룰 수 없음을 봅니다. 내가 지금 마음 아프다. 내가 지금 마음이 쓸린다. 상처받았다. 아니면 내가 지금 어떤 일에 실패했다. 이것을 가지고 연연해한다면 결국 우리는 더 큰 최후적인 승리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백성들은 그것을 넘어선 더 큰 승리와 은혜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고난당하기 때문에 기쁘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를 이루게 됩니다.
고난이 뭡니까? 어려움 때문에 큰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때로는 우리는 사방의 욱여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고통 속에 사람들에게 쓸림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서 최후적인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평가는 언제든지 바꿔질 대 있습니다.
역사의 평가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서 가치기준의 변화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진정한 궁극적인 승리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누군가, 또 세상에서 무엇인가, 또 어느 시간엔가, 우리는 경주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늘 우리는 자신과 삶의 목표와 그리고 시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 자신 안에 있는 죄악의 요소들, 내 삶에 있어질 해야 될 일들, 그리고 제한된 시간 속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분주히 가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전투를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산에 갔더니 큰 그림을 걸어놨더라고요.

뭔가 봤더니 곰이 있는데, 곰이 이렇게 이빨을 보이고 있는 사진인데 곰의 이빨이 다 썩었어요. 곰의 이빨이 다 썩었어요. 그게 이제 삭아서 다 부셔지겠지요. 그럼 곰도 사람처럼 치아를 다시해서 끼우나?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거기에 뭐라고 썼냐면 '등산객들이 이런 자연의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 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등산객들이 이렇게 야생 동물에게 먹이를 주니까 그와 같은 사람들이 먹는 먹이를 먹고 이와 같이 이빨도 상하게 되고 또 이와 같이 자연에서 스스로의 자생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곰이 그 이빨이 다 상실되어서 없어졌다고 생각합시다.

어떻게 자연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먹이를 채취하고 그것을 먹고 어떻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그럼 사람들이 먹이를 주는 것은 그 곰이나 여러 생물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약화시키는 겁니다.
가엾어서 주는 것이지만 그들을 약화시키는 겁니다.
오히려 그들이 배고픈 가운데 스스로 먹이를 찾도록 해야 되고 그들이 강하게 투쟁해서 결국 이와 같은 자연의 세계 속에서 그들이 본능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을 놔두는 것이 우리가 그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려움 주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가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가는 것이 우리에게 결코 가장 큰 도움은 아니라고 생각하셔서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 눈물이 있으면 가슴 아프고, 슬픔이 있으면 가슴 쓰리고, 우리 삶 가운데 괴로움 있을 때 우리는 답답해서 정말 숨을 쉬기 어려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실 때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이룰 하나님이 계획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 이 세상과의 싸움,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영적인 전투가 있어야 합니다.
전투성을 상실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야말로 누추한 존재가 되어 이 세상에서 지루하게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용기 있고 자신 있게 삶의 장면을 향하여 달려가는 전투성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달려가는 성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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