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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성품 (롬 9: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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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롬9:22-24)

눅15장에는 두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아들이 아버지의 곁을 떠나 탕아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아버지임을 알지 못해서거나 믿지 못해서는 아닙니다. 아버지임을 믿지만 아버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믿지 못했습니다. 성장하는 젊은이들 중에 사춘기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가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님을 믿지 못해서는 아닙니다. 부모임을 믿는데 자신을 향한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또한 부모 특히 아버지를 향하여 불만을 토로하여 부모는 자기를 이해해 주지 못한다 합니다. 여러분에게 만약 누군가가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질문을 한다면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면 됩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한 답은 예 나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사역을 믿습니다. 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역 예수님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어 아기로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다시오신다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라 하고 그분의 생애를 우리는 사역이라 합니다. 그냥 예수님만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역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는 자기가 부처가 되는 종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사역이 있다면 부처에게도 사역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사역이지만 부처의 생애는 훌륭하게 살았던 한 개인에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가 사역이 됨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어 아기로 오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입니까 예수님이 왜 고난을 당하셔야 했고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고 예수님이 왜 무덤에 갇히셔야 했고 예수님이 왜 부활하셔야 했나요 바로 저와 여러분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왜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철저히 나와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모두가 나를 위해서입니다. 나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생애가 보리수 나무아래 있음이 나와 무슨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처의 삶은 교훈은 되지만 교훈정도야 이순신장군의 생애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최고의 절정의 마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겔18:23절에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즐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벧후 3:9절에는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처음 탕자의 비유에서 말씀드린 것도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믿는다면 오늘 말씀 또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9장 21-22절을 통해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하나님과 인간에게 적용하며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선포하셨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덩이로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행하심에 있어 어떤 일도 사람에게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완전자이신 하나님이 그 모든 일들을 하고자 하시는대로 하셨고 그분은 실수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두 종류의 그릇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입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어찌 한 사람을 진노의 그릇으로 또한 사람은 긍휼의 그릇으로 정하실 수 있냐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합니까 핑계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의 질문앞에서 먼저는 하나님을 그리고 후에는 여자를 핑계하고 싶은 것입니다. 핑계하고 싶은 사람들의 말에는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건에는 반응하는 방법이 하나님과 사람은 다른 것입니다. 시간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든 사건에 있어 부분에 반응을 보이지만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건에 있어 전체에 반응을 보이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은 시간속에 살기에 모든 것을 시간안에서 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따로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그 완전하신 하나님이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 모든 시간 사건을 한눈으로 보실 수 있는 하나님이 한 뱃속에 있는 사람 중 한 사람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듯 두 종류의 그릇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입니다.

아이의 종아리를 아버지가 때리고 장면을 그려보십시오 맞는 아이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종아리를 때리는 부모의 마음은 그 아이의 미래를 함께 그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는 나를 이해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믿어버리면 매를 맞으면서고 감격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때 그냥 구원의 대상으로 하나님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믿어야 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그릇들과 긍휼의 그릇을 통해서 자신의 성품을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처절한 진노의 그릇을 보겠습니다. 진노의 그릇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버리시기로 작정하신 그릇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이런 그릇을 하나님의 유기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유기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보면 선택되지 않은 자를 하나님께서 지나쳐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유기를 긍정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버리신자를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정죄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진노의 그릇을 정하셨다면 어떻게 인간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바울은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에 맞게 일관된 행동을 하시는 분이요 그 하나님은 결코 자가 모순적인 일을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이 진노의 그릇을 향해서도 수없이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오늘 22절을 보니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관용이 무엇입니까 너그럽게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은 기회를 주십니다. 돌아오라하십니다. 이것이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돌아 올 그 아들을 기다리며 신발도 새옷도 송아지도 가락지도 준비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아버지의 오래참아 기다려주심을 만홀히 여깁니다. 더 기다려달라합니다. 또하나의 그릇은 2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어서 그분의 영광으로 부유함을 알게 하기 위하여 준비하신 자비의 그릇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그릇을 향해서 진노의 능력을 보여주시를 원하실지라도 오래참으심으로 관용을 베푸신 것처럼 긍휼의 그릇을 향해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자비로 그것들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긍휼의 그릇은 누구입니까 이미 정리되어 있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긍휼의 은혜를 입은 저와 여러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긍휼의 그릇이라 했지 자격있는 그릇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복받은 그릇이라고 의인의 그릇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진노의 그릇일 수 있었는데 긍휼의 은혜를 입은 그릇들이 된 것입니다. 진노의 그릇 저와 여러분은 상관이 없는 자였습니까 사실 저와 여러분도 처음에는 멸하기로 예정된 그릇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의 옷을 입은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긍휼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를 통해 표현되어져야 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예수의 마음을 품고 보면 모두가 불쌍해 보입니다. 모두가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 아 멘 -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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