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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가 인생을 변화 시킵니다 (마 7: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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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인생을 변화 시킵니다 (마 7:7~11)

한 소녀가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서운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서워서 발걸음도 떨어지지 않고, 그만 그곳에 무릎 꿇고, 눈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호랑이 앞에서 저 좀 살려주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했는데 저 좀 도와주세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호랑이가 다가오는 것 같더니 아무소리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것 보니 호랑이가 나를 물지 않았나 보다.” 라고 생각하고 눈을 떴더니 글쎄 자기 옆에 호랑이가 무릎 꿇고 눈감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 하나님은 역시 놀랍구나! 어떻게 기도하는 호랑이를 다 만나게 하셨을까?” 정말 감사해서 “할렐루야!” 했다고 합니다. 그순간 호랑이가 한 마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석은 여러분 마음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기도하지 않은 그리스도인 있다면 그가 진정 그리스도인인가를 다시 물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만약 부모와 자식 간에 십년동안 의절하고 왕래가 없고 대화가 없다면 그것이 진정 부자관계인가 다시 물어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고 교제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던지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심하던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의 선물이요 특권입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늘 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이 기도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요나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어느 날 명령하십니다. “요나야! 네가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해라”. 그들의 악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그들을 진노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 회개하면 그들의 죄를 사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요나는 니느웨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과 원수입니다. 원수가 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 그들이 잘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로 가는 배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배 밑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의 길을 태풍을 통해서 막으셨습니다. 태풍이 몰려왔는데 그들의 탄 배가 마치 낙엽처럼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 배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놀라고 당황해서 짐을 버리다가 되지 않으니 자기들이 믿는 우상들에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배 밑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선장이 요나를 발견하고는 요나를 깨웁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혹시 하나님이 너의 기도를 들으면 우리가 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참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나가 기도하지 않을 때 불신자들이 와서 잠자는 요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시련과 고난이 어디서 오나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않을 때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세계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을 때 세상에 풍랑이 오고 환란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꾸어 말하면 이방인들, 불신자들이 와서 “권사님! 잠만 주무시면 어떻게 합니까? 빨리 기도해야죠.” “아이구! 집사님! 주무시면 어떻게 합니까? 빨리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야죠.”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 들이 기도하지 않을 때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고 조롱받고 비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점점 잃어버리는 것 중에 가장 귀한 보화가 기도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게 되고 기도를 점점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않을 때 세상은 점점 시련과 위기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도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나는 기복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 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기복적인 기도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만 잘 되게 해달라고 하고, 잘 살게 해달라고 하고, 축복 달라고 하는 기도는 축복적인 기도이니 나는 그런 기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세계 평화와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하십니까? 라고 물으면 그런 분들은 새벽 기도를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기복적인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자녀가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어떻게 기복적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기복적이라는 것은 자기만을 위해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은 다 망하게 해주시고 나만 잘되게 해주세요. 옆집 가게는 문 닫게 해주시고 내 가게만 번창하게 해 주세요.” ‘다른 집 아이는 대학 다 떨어지고 우리집 아이만 대학 붙게 해주세요.“ 이런 것이 기복적이요 이기적인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웃들도 잘되고 저도 잘되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주세요.“ 이것은 기복적인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자녀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결코 기복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저는 아이들이 둘입니다. 대학생만 둘인데 이 아이들이 커 가면서 중학교 때보다는 고등 학교 때가 더 들어가고, 고등학교 때보다는 대학생 때 더 많이 들어갑니다. 학교가 멀리 있으니 왕복 교통비가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점심 사먹고, 어느 날은 저녁까지 사먹고 옵니다. 돈이 많이 드니 용돈을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 사치가 아니고,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면 줄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여자 친구가 생기면 더 많이 듭니다. 밥도 한끼 사줘야 하는데 남자가 쫀쫀하게 얻어먹을 수만 없습니다. 영화도 한번 봐야 하는데 자꾸 얻어 먹을 수만 없습니다. 자꾸 요구를 합니다. 웬만하면 제가 다 들어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들어 주려고 노력하다가 못 들어 주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돈이 없을 때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경우는 아이들이 구하지를 않을 때입니다. 필요하면 달라고 손을 벌려야지 손을 벌리지 않으면 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부모에게 필요한 용돈을 구하는 것이 기복적입니까? “야 이놈아! 아버지에게 그런 것을 달라고 하면 기복적이야!” 라고 말합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줄때마다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에도 무엇이라고 합니까? 세상에 아무리 못된 아버지도 자기 자녀가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는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계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주는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물며 천국에 계신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너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구하는 것은 기복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건강이 어려울 때 건강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의 사업이 잘 되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 제가 건강해서 주님의 일 더 많이 하게 해 주세요.” “우리 자녀의 사업이 잘 되어서 십일조도 온전히 드리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게 해 주세요.” “제가 좀 넉넉해서 어려운 이웃도 도움이 되게 도와주세요.”

여러분 이런 기도가 어떻게 기복적인 기도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맨 날 남의 집에 연탄을 빌리러 가는 것이 기복적인 것이 아닙니까? 매일 남의 집에 돈을 빌리러 가는 것이 축복받은 것입니까? 여러분 가난한 것이 창피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부요하다고 복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습니다. 구하라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것입니다.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채워주실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잘못된 오해가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절대 기복적인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기도의 오해가 있다면 중언부언 하지 말라는 말씀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마태복음 6장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특별새벽집회나 새벽기도 할 때 보면 통성기도 제목을 걸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3분-5분되면 다 나가버립니다. 자기 구할 것 한번만 구하고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기도하면 중언부언 한다고 오해합니다. 여러분 중언부언이라는 것은 의미 없는 말의 나열이 중언부언입니다. 자기는 뜻도 모르고 그냥 나열만 하는 것입니다. 염불 외우고, 주문외우는 것입니다.
     
저의 앞집에 남묘 호랭교인이 있는데 이 종교는 일본에서 들어온 사교입니다. 새벽부터 중얼 중얼 주문을 외웁니다. 자기는 그 뜻이 무엇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언부언은 의미 없고 뜻 없는 말의 나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부르짖고 기도하는 것은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병원에 가서 가족이 아파서 병원 문을 두드리는데 한번 열어주지 않는다고 열어주지 않으면 끝입니까? 아닙니다. 끈질기게 문을 열어줄 때까지 두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반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성전 건축하기 전에 여러분에게 기도문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여러분 이 기도문을 읽고 하루에 열 번씩 기도하십시오. 그랬더니 어떤 권사님은 하루 30번도 기도합니다. 그 기도문을 보고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언부언의 기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간절한 기도입니다. 끈질긴 기도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분 중언부언하네!” 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성령의 감동가운데 방언기도를 합니다. 방언기도를 하는 분은 자기가 어떤 기도를 하는지 잘 모릅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중언부언하네!” 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간절함이 없는 것입니다. 끈질김이 없는 것입니다. 절박함이 없는 것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을까요? 살만하니까 없는 것입니다. 당장 생명의 위험이 닥친 사람 중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 사모님이 난소암 때문에 수술을 받다가 너무 암이 많이 퍼져서 다시 닫았다고 합니다. 그 아들이 목사님인데 그분이 교회를 잠시 쉬면서 기도원에 가서 어머니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박한 순간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입니다. 3분 기도하고 기도 안하는 분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중언부언이 아니라 간절한 기도 절박한 기도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우리가 하는 오해 중에 하나님은 우리 구할 것을 다 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아도 다 알아 주시는데 무엇을 하려고 기도 하느냐? 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6장 8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구할 것을 다 아시는데 왜 기도하지. 기도하지 않아도 다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틀린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옳은 이야기도 아닙니다. 어떤 분이 한 달 동안 기도를 안 한다고 굶어죽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보았습니다. 기도는 전혀 하지 않았는데 한 달 동안 먹고 잘삽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나 믿지 않는 자에게나 동일한 햇빛을 언제나 동일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특별 은총을 주십니다. 그것은 믿는 자에게 구하는 자에게 기도하는 자에게 놀라운 은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복 받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겔 36장 30절에 보면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는데 하나님이 예언하기를 “너희가 돌아올 것이다.” 라고 했지만 “그래도 너희가 구하여야 내가 응답할 것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이가 배고파도 울지 않으면 알아서 제시간에 줄 어머니 별로 많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소화가 잘 안 되나보다 하고 더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울고 보챌 때 하나님은 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한 문제를 가지고 구하고 기도할 때 더 많은 것으로 더 빨리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예레미야 33장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구하라. 내가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시편 81편 10절에 보니 “내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응답하겠다는 뜻입니다.

네 번째 또 하나의 오해가 있습니다. 나 같은  평신도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어디 집사님이나 권사님, 목사님의 기도를 들으시지 우리 같은 평신도의 기도를 듣겠는가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목사이기 때문에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님이기 때문에 기도를 더 빨리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어린아이의 기도도 응답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서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목사냐? 전도사냐? 가 기도의 응답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7절 이하의 본문을 통해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우리에게 강조해 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마태복음 7:7-8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것은 다 같은 표현입니다. 기도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찾는 것입니다. 닫힌 문을 여는 것입니다.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축복의 문을 두드리라. 건강의 문을 두드리라. 행복의 문을 두드리라. 다 같은 기도의 표현입니다. 그저 한번 구하라 그러면 되지 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반복하셨을까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강조법입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또 강조하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너희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이마다 얻고, 찾는이가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하나님의 두 번씩 반보되는 약속이요 장담입니다. 하나님이 “너희가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응답할 것이다. 이루어 질것이다.”라고 장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이고 기도는 기도입니다. 당장 어려우면 옆집 아줌마한테 하소연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하소연 하지를 못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약속해주고 계시는데 여러분이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구체적인 예까지 들어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악한 아버지라도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계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너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1장 3절은 이것을 성령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축복이든 물질의 축복이든 사업의 축복이든 구하는 자에게 반듯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몇 달 전에 한화의 김승현 회장이 자기 아들이 술집에서 누구에게 맞아서 대신 복수 했다가 얼마나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습니까? 세상에 이런 아버지도 있는데 자기 아들 대신해서 복수를 갚아주는데 하물며 선하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 구하는 것을 왜 응답해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여러분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약속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이 이 말씀을 붙들고 위대한 학문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어떤 예술가가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위대한 작품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가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그는 미지의 진리를 캐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업가가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반듯이 사업에 성공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어느 사람의 약속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명곡은 잘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명작은 잘 읽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난해하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중요하고 위대한 말씀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그냥 지나갈 때가 많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것을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독일 속담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이 기도의 손을 모으면 하나님은 복을 주시려고 손을 펴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기도에 예민하십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무엇을 구할 때 부모는 더 주지 못해서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기도하면 기도하는 자신이 변화됩니다. 기도하면 환경이 변화됩니다. 기도하면 인간관계가 변화됩니다. 기도하면 미래가 달라집니다. 여러분 오늘 힘들고 어려우십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제가 언젠가 책을 읽다가 보니까 신원 에벤에셀의 박성철 회장님이 신길성결교회 장로님이신데 그분은 원래 고아출신이라고 합니다. 고학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는데 그분이 예수님을 만나서 기도하면서 이렇게 사업을 일으키고 큰 회사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대선 후보 중에 한 사람이지만 저는 그분을 정치적으로 여러분에게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명박씨 그는 얼마나 어렵게 자랐습니까? 그래서 중학생, 고등학생 때에도 어머니를 따라서 풀빵장사하고, 뻥티기 장사를 했습니다. 하필이면 여학교 앞에서 어머니가 뻥티기를 파는데 얼마나 창피한지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팔았다고 합니다. 엄마가 “야 이놈아! 네가 남의 것을 빼앗아서 파는 것도 아닌데 왜 창피해 하느냐?”라고 엄마가 책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가난 속에서 자랐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그는 기도의 보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만한 위치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대통령이 되고, 안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을 보면 그에게는 기도가 놀라운 축복의 선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어려움 속에 기도하고 구할 때 하나님은 그의 필요를 채워주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부흥회를 인도하러 시골에 갔는데 목사님이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목사님! 이 시골이 얼마나 예전에 가난한 동네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교회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기도를 배우면서 이 동네에 지금 목사님이 백 명이 넘습니다.” 총회장이 몇 명이 넘고, 그 동네에서 장로님이 몇 분이 나오고, 회사 사업에 성공한 사업가가 몇 명이 나오고, 그 시골에 먹을 것이 없어서 가난하던 동네에 교회가 들어와서 그들이 기도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은 기도하셔야 되고, 기도를 활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기도는 써야 합니다. 오늘 특별히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마태복음 6장 6절에 보니 “너는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내게 갚으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새벽기도에 나올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 2층에 중보기도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해 보십시오. 우리교회는 두 주간 동안 릴레이 중보기도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매일 한 시간씩 두 주간을 기도하면서 여러분이 구할 것을 간구해 보세요. 먼저는 생각하십시오. 내가 무엇을 구할 것인가? 내가 지금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 내가 기도할 제목이 무엇인가? 를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다음 주일 나누어 주게 될 기도책자에다가 여러분의 기도제목을 구체적으로 적으십시오. 막연하게 기도하면 막연하게 하나님도 응답하십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하면 구체적으로 응답하십니다. 먼저 생각하십시오. 그것을 적고 그리고 기도실에 들어가서 기도하십시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응답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응답받은 것을 믿으십시오.

마가복음 11장 14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것으로 믿으십시오. 여러분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일대일로 나가보십시오. 히스기야는 사형선고를 받고 벽을 향해서 눈물로 기도할 때 그의 생명이 15년이나 연장 받았습니다. 한나는 자식을 얻지 못해서 성전에 나가서 눈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기도의 간증이 있으십니까? 이런 절박한 기도를 들어보셨습니까? 기도하는데 돈이 들지 않습니다. 기도하는데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정한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만났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일으켜서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웨일즈라는 사람이 쓴 책 중에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대주교는 정한시간에 당번이 되어서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늘 습관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늘 기도할때마다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듣는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어느날 그는 성전에 나가서 “하나님! 전능하신 여호와여! 자비하신 하나님이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날따라 하나님이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냐! 무엇을 내게 구하느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대주교가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 정말 제 기도를 들으시네요. 하나님! 정말 살아계시네요.” 그는 너무 놀라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소리를 들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미세한 기도소리를 듣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약속을 응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성도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고, 충만한 은혜의 삶을 살 수 있고, 생명력이 있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다. 중보기도실 은밀한 곳에 나아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시고, 어떻게 응답하시는 가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기도의 아름다운 체험을 다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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